북한은 2017년 6차 핵실험과 화성 15형 ICBM의 시험발사 후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그러나 2018년 4월 21일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핵실험과 ICBM의 시험발사 중지, 북부 핵실험장 폐기,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 국제사회와 적극적 대화, 경제건설 총력 집중 등을 결정했다. 이는 사실상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한 모라토리엄 선언에 해당한다.
이어 2018년 5월 24일 북부의 풍계리 핵실험장을 공개리에 폭파했는데, 이는 비핵화를 향한 행동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실시한 이후 총 6차례의 핵실험을 모두 풍계리에서 실시했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북한이 보유한 유일한 핵실험장이다. 폭파 후 풍계리 핵실험장에 대한 검증이 없었다는 점에서 위장 폐기라는 의혹이 있지만 지하 수백 미터의 갱도로 이루어져 있는 핵실험장의 구조상 강력한 폭발 시 내부구조의 손상이 불가피하다. 풍계리 핵실험장의 복구가능성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즉각적인 추가 핵실험을 단행할 수단은 없는 상태다.
6차례의 핵실험으로 핵기술을 완성했기 때문에 풍계리 핵실험장이 필요하지 않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북한의 핵탄두 소형화 기술에는 의문이 있으며, 각종 핵탄두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핵실험이 필수적이다. 핵무기의 신뢰성 검증과 현대화를 위해서도 핵실험이 필요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2017년 9월 현재 미국, 러시아, 프랑스는 각각 1032회와 715회, 198회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미국은 2017년 12월 플루토늄을 이용한 임계 전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러시아도 최근 낮은 수준의 핵실험(Zero-Yield Test)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술 발달에 따라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으로 핵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많은 실험을 통해 빅데이터를 확보한 미국과 러시아 등 핵무기 선진국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북한이 2018년 동창리 시설의 해체에 착수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주발사체 기술은 탄도미사일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지만, 동창리는 미사일 발사기지가 아닌 로켓의 발사와 엔진을 시험하기 위한 시설이다. 북한은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에 모두 이동식 발사대(TEL)를 사용했다. 미국은 북한이 아직 ICBM 기술을 완성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며, 동창리 시설을 해체할 경우 ICBM급의 새로운 로켓엔진의 개발과 시험발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북한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동창리 시설의 일부를 복구하는 징후를 보였지만 어떤 상태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북한이 하노이회담에서 제안한 영변 핵단지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영변 핵단지는 원자폭탄(핵 분열탄)용 분열물질인 고농축 우라늄(HEU)과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포함한 북한 '현재 핵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영변 핵단지에는 HEU 생산을 위한 원심분리기(4000기 추정)와 플루토늄 추출을 위한 원자로 및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이 있다.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 과정에서 수소폭탄(열핵무기) 기술을 적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위해서는 3중수소인 트리튬이 필요하다. 3중수소는 영변의 원자로에서 생산할 수 있으며, 북한의 다른 지역에서는 생산이 불가능하다. 영변 이외의 지역에 고농축 우라늄 생산시설이 존재할 개연성이 높지만 영변 원자로를 폐기할 경우 플루토늄과 3중수소의 생산이 불가능해져 북한의 핵연료 주기(nuclear fuel cycle)는 손상을 피할 수 없다. 특히 플루토늄과 3중수소를 지속적으로 생산하지 못할 경우 핵탄두의 유지와 관리에 문제가 발생한다.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최종적인 의도를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2018년 이후 북한이 취한 일련의 행동은 비핵화의 초기단계 실행조치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행보와 변화 가능성
트럼프 대통령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만족스러운 평가를 내놓았으며, 미군 유해송환과 북한이 억류하고 있던 미국계 인사들의 석방에 대해서도 크게 환영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미 비핵화 협상은 미국의 역대 정부가 해내지 못했던 성과로 치장되고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에 대해 그 어떠한 상응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국은 비핵화의 최종 목표가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 FFVD)'이며,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 및 ICBM 시험 발사를 중단하고 북미 비핵화 협상에 나선 2018년 미국은 대북 독자제재를 오히려 강화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의지의 진정성에 의문을 품고 있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선제행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응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북한에게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핵연료 주기의 핵심인 영변 핵단지의 영구폐기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상응 조치도 유도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노이회담 이후에도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으며, 제재의 공조체제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영변 핵단지를 비롯해 핵탄두와 탄도미사일 제조시설, 이미 생산된 운반수단과 핵물질 및 핵탄두 등 북한 전역에 산재한 핵프로그램을 단기간에 해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고로 2017년 운영을 중단한 고리1호기 원자력발전소의 폐기에는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북한의 입장에서 완전한 비핵화 이후 제재 해제라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은 대북제재의 효과를 확신하고 있으며, 북한의 양보를 강요하는 일방적인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북한이 그동안 미국과 국제사회의 불신을 초래했다는 원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이 파격적인 양보를 할 개연성은 높지 않다. 미국의 상응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양보는 김정은 위원장으로서 소위 '최고존엄'의 위상추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제재의 효과가 지도층이 아닌 취약계층과 일반주민들에게 집중된다는 것도 한계다.
문제는 사실상 이미 대선 캠페인에 들어간 미국 국내정치와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다. 미국 내 일반적 정서는 북한에 대한 불신이며, 대북제재 유지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볼턴 보좌관을 포함한 강경파뿐만 아니라 국무부와 재무부 등 대부분의 관료 역시 제재의 유지와 강화에 동의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해제를 상응 조치로 북한과 협상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새로운 셈법'의 모색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4월 시정연설을 통해 북미 협상의 시한을 올해 말로 정하고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가지고 나올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더 이상 제재 해제에 매달리지 않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북한 당국과 매체들은 자신들이 정당한 조치를 취했으며, 이에 대해 미국이 '새로운 셈법'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하노이회담에서 북한의 패착요인 중 하나는 제재 해제라는 미시적 대상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은 양국관계 정상화, 평화구축, 비핵화, 유해송환 등 4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북미 간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적대관계 해소이며, 핵문제의 해결은 그 일부에 해당한다. 북미관계가 개선될 경우 제재 해제는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부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각적인 제재 해제가 어려운 현실에서 영변 핵단지 또는 일련의 비핵화 조치에 대한 상응 조치로 북미관계 개선을 목표로 설정했다면 일정한 합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포괄적 합의/단계적 이행' 방식은 현 단계에서 고려가 가능한 현실적인 비핵화의 해법이 될 수 있다. 포괄적 합의는 비핵화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큰 틀에서 비핵화의 스케줄과 로드맵을 도출하는 것이다. 단계적 이행은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의 장기적 속성과 복합성을 감안해 폐기 절차를 몇 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는 것이다. 핵심은 초기단계의 상호신뢰성 확보이며, 북한은 영변 이상을 내놓기 어렵고, 미국은 제재를 해제해 주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한 절충안이 필요하다.
따라서 북한의 영변 핵단지 폐기 제안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상응 조치를 분담하는 방식이 모색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제안한 비핵화 조치에 대해 미국이 정치적 차원의 상응 조치, 한국은 경제적 차원의 상응 조치를 취하는 일종의 등식관계로 정리될 수 있다.
북미 간에는 싱가포르 합의문에 따라 양국관계 개선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북미 양국이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인도적 지원과 북한 방문 금지조치 등을 해제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연락사무소는 적대국간 관계정상화의 출발점으로서 상호 신뢰구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아가 남북이 9.19 군사분야합의서를 통해 사실상의 종전선언과 불가침에 합의한 만큼 북미 종전선언 또는 평화선언을 도출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선언은 과거의 전쟁을 종료하는 것이지 미래의 불가침 약속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 단계에서 미국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대안에 해당한다.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지원을 재개하고 인적교류를 허용할 경우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 중 일부인 북한 노동자 송출 금지 문제 해결에도 숨통이 트일 수 있다. 노동자 송출 금지는 개인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경제적 상응 조치를 취함으로써 북한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대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한국정부가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조치는 대규모 인도적 지원, 금강산 및 개성공단사업 재개, 5.24조치의 해제 등이 될 것이다. 우선 대규모의 인도적 지원, 즉 식량지원 카드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148만 톤이 부족하며, 이는 종자와 사료 등 모든 소요량을 합산한 것이지만 대략 북한의 1일 식용 소비량이 1만 톤 내외라는 점을 감안할 경우 북한의 식량난은 자체해결이 어려운 심각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대규모의 식량을 지원할 경우 북한이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금강산관광사업, 개성공단사업, 그리고 5.24조치는 모두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취한 조치라는 점에서 국제제재와 성격이 다르다. 관광분야는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금강산관광사업의 재개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며, 원산 금강산 국제관광지구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는 북한으로서도 관심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개성공단사업의 재개 역시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사안이지만, 많은 부분 제재와 중첩된다는 점에서 창의적인 해법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5.24 조치의 경우 제재와 관련이 적고 북한에 실익이 있는 분야에서부터 우선적으로 해제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선박의 남측 해역 운항 금지 조치 해제, 대북 지원사업 재개, 방북 불허 및 북한 주민 접촉 제한 조치 해제는 현재로서도 가능한 사안이며, 남북 간 교역 및 물품 반·출입 등은 상황을 고려해 조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안들은 미국과 UN의 양해가 필요하지만 한국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다. 한국정부가 경제적 상응 조치를 취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제재 해제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할 수 있는 대안이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도 북미 관계개선과 경제적 실리를 동시에 도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한국정부의 경우 책임과 부담이 발생하며, 특히 협상이 결렬될 경우 대내외의 비판에 직면하게 될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남북관계를 지속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의 감수는 당연한 일이다. 남북관계를 불가역적인 단계로 진입시키고, 비핵화를 견인하는 것은 한국정부의 중요 과제다. 이를 위한 정치적 결단과 아울러 적극적인 대국민 설득의 필요성이 있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포괄적 합의/단계적 이행' 방식에 기초하여 초기 단계에서 한미와 북한 간 신뢰관계가 형성될 경우 비핵화 협상의 순조로운 이행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비핵화 협상의 골든타임이 김 위원장이 시한으로 정한 연말까지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비핵화 협상의 동력을 창출하지 못할 경우 교착국면의 장기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역분쟁과 홍콩 시위사태 등으로 인한 미·중 대립구도가 격화되고 있고, 유조선 피격 사건에 따른 미국과 이란간의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에 있어서 북한 문제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6월 말의 한미 정상회담은 비핵화 협상 교착국면을 타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선택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을 견인해 내기 위한 해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노이의 교훈은 한국정부의 역할이 북미 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양측이 동의할 수 있는 절충안을 지속적으로 투입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북미 간 불신이 상존하는 상태에서 협상으로 이견을 좁히는 방식의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6월 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의 외교안보라인, 특히 대미 외교팀의 역할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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