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점도 발견된다. 레이건-고르바초프 만남은 양국 사이의 핵군비 경쟁이 최절정에 달하고 "핵 겨울(nuclear winter)"라는 말이 지구촌을 배회할 때 이뤄졌다. 그런데 이들은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핵 군축과 냉전 종식에 합의했다. 그 비결 가운데 하나는 두 지도자의 '화학작용'에 있었다.
레이건은 훗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고르바초프와 나는 화학작용을 일으켜 우정과 대단히 유사한 뭔가를 만들어낸 게 분명하다." 고르바초프 역시 낸시 레이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 남편과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 같아요."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떨까? 김정은은 최연소 핵보유국 지도자이다. 트럼프는 최고령 핵보유국 지도자이다. 두 사람은 작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식의 험악한 말들을 쏟아냈었다.
그러다가 작년 봄부터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지도자가 어느덧 우정을 고백하는 사이가 되었다. 트럼프는 작년에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고, 하노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선 "나는 김정은을 매우 좋아하고, 그도 나를 무지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김정은과 트럼프는 레이건-고르바초프에 이어 세계사의 한 폐이지를 또 장식할 수 있을까? 불신과 권력 정치가 지배한다는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인간적 요소'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를 보여줄 수 있을까? 예단키는 어렵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깜짝 놀란 만한 합의가 나올 공산이 크다. 트럼프 코드에 그 답의 일부가 있다.
북미 정상회담의 1등 공신은 오바마?
트럼프는 하노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도 이 일을 해내지 못했다. 오바마 행정부도 하지 못했다." 오바마에 대한 경쟁심이 트럼프가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선택한 아주 중요한 배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정책은 'ABO(Anthing But Obama)'로 압축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 일은 뒤집고 그가 하지 않은 일은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대 미국 대선 후보 가운데 최초로 북미정상회담 의사를 밝힌 사람이 바로 오바마였다. 만에 그가 자신의 공약처럼 북미정상회담을 했다면, 아마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북미정상회담의 1등 공신이 오바마라는 역설적인 진단은 이래서 가능해진다.
또 하나 있다. 트럼프는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어!" 워싱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감과 본인 특유의 나르시시즘이 잘 묻어난 표현이다.
그리고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의 비결을 '미친 자의 이론(Madman's Theory)'에서 찾는다. 그는 "화염과 분노", "북한 완전 파괴", "내 핵 버튼이 (김정은 것보다) 더 크고 심지어 작동도 한다"는 식의 발언을 통해 한반도 위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왜 그랬을까? 사후 합리화인지는 모르지만, 트럼프는 북미정상회담에 임하면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위기를 증폭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오바마를 이겨야 하고 '나 혼자 한다'고 다짐해왔던 트럼프에게 '스몰딜'이나 '크게 주고 작게 받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통 크게 주고받는 '빅딜'을 예감케 하는 상황은 또 있다. 흔히 외교는 국내 정치의 연장이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트럼프를 정치적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핵폭탄급 이벤트'가 워싱턴에서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과 같은 날에 열리기 때문이다.
헤드라인 장식하려면
2차 북미 정상회담은 2월 28일에 끝난다. 당연히 그 결과가 미국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 하지만 복병이 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이 미국 하원 청문회장에 서는 날도 2월 27~28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대선 당시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커넥션 의혹, 트럼프의 탈세 의혹과 정치자금법 준수 여부, 트럼프 재단의 사업관행 등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할 예정이다. 하노이에선 핵폐기를 위한 담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워싱턴에선 핵폭탄급 증언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코언은 이른바 '러시아 스캔들'의 핵심적인 증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1심 재판에서 트럼프 캠프의 선거자금을 유용해 트럼프와 성추문에 휩싸였던 여성 2명에게 입막음용으로 돈을 지불하고 의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코언은 감형을 받아내기 위해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의 도우미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가 20일 트위터를 통해 청문회 일정이 잡혔다며 "국민은 내 얘기를 기대하라"고 밝힌 것도 핵폭탄급 폭로가 나올 수 있음을 예고해준다.
그래서 벌써부터 워싱턴에선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트럼프 진영에선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북미 정상회담을 훼방 놓기 위해 의도적으로 코언의 청문회 출석 날짜를 회담과 맞춘 것이라고 비난한다. 반면 반(反) 트럼프 진영에선 트럼프가 헤드라인을 가로채기 위해 김정은에게 큰 양보를 하거나 빈 수레를 요란하게 흔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당연히 트럼프로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빈 손'이었다는 비난과 코언의 충격적인 증언이 맞물리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트럼프가 이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서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뮬러 특검팀의 '러시아 스캔들' 최종 조사 결과 발표도 임박해지고 있다.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정치적 필요가 더욱 커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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