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서민들은 촛불 혁명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제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한다. 무늬만 진보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를 능숙하게 헤쳐가는 유능한 진보의 모습을 바라고 있다. 적어도 몇 년 뒤에는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라도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 6000억 달러 달성과 전체 무역액 1조 달러 달성에 대해 축사를 했다. 그러나 반도체 등 특정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계와 대기업 중심 수출 구조 문제도 동시에 지적했다. 반도체와 석유화학, 자동차 등 10대 제조업 분야가 국내 제조업 전체 이익의 87.4%를 차지한다. 2014년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11%였지만 올해는 21%로 압도적으로 높다. 국제적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수출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제 전반에 막대한 타격이 온다는 뜻이다. 실제로 국제적인 반도체 과잉 생산과 과잉 공급으로 내년엔 이런 호황도 끝날 것으로 전망된다.
시급하게 생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답은 나와 있다. 거대 대기업이 이런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중소기업을 육성하고, 이를 통한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로 수출의 다변화를 조속히 이뤄내야 한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상생하는 산업 생태계가 필요하다. 특히 다양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제품을 가진 중소기업들이 먼저 새로운 시장을 열고, 그 뒤를 이어 대기업들이 따라가서 시장을 장악하는 단계별 접근 전략을 펴야 한다. 그렇게 역할을 분담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들에 대한 기술 탈취와 특허 죽이기를 정부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대기업들이 이제는 제값을 주고 중소기업들이 개발한 기술과 마케팅 전략, 심지어는 브랜드 이미지까지 정당하게 사오는 역할 분담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협력하고, 이익을 공유하는 산업 생태계가 전제돼야 이런 협력이 가능해진다.
한국보다 먼저 수출 6000억 달러를 돌파한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등은 탄탄한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고,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공정경제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경제의 구조적 적폐를 바꾸는 경제 민주화 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등 공정 경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혁신 노력이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과제다. 통제되지 않는 재벌들과 대기업들의 과도한 독점은 시장을 왜곡시키고, 이제는 역으로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들로 인해 내수 시장이 지나치게 위축돼 있으므로 적극적인 증세와 과감한 복지, 그리고 원·하청 관계의 정상화 등 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통해 분배 구조와 시장의 기능을 정상화시켜야 한다. 이제 구조화된 집단적 욕망 시스템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사회적 대타협의 노력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정부의 공권력과 국가적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고 우리 경제를 합리적으로 발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민주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공정한 경제'만으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 대안으로 요구되는 것이 '새로운 시장'이다. 바로 복지국가 경제 정책의 또 한 축을 이루는 '혁신적 경제'를 '공정한 경제' 정책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정해진 파이를 가지고 제 살 뜯어 먹기 싸움을 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파이'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 혁신으로 새로운 파이를 만드는 것은 자본을 가진 특정 대기업들에게 한정된다. 물론 기술 혁신을 위한 정부의 산업 정책도 필요하지만, 이미 개발된 기술과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기존의 전체 중소기업들에게도 혜택이 골고루 미치기 때문에 더 필요하다.
적극적인 시장 개발이 필요하다
인구의 변화를 알면 기회가 보인다. 우리나라는 저출산과 고령화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지만 세계적인 인구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1999년 60억 명에서 현재 세계 인구는 약 76억7000만 명이다. 신생아 검진, 예방접종, 여성 건강 관련 제품들과 약품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다. 심지어 산아 제한을 위한 피임약과 관련 제품 시장도 증가하고 있다.
한류의 직접적 영향권에 있는 아세안(ASEAN) 지역의 인구만 해도 무려 6억 명이다. 이들 중 매일 아침에 케이팝(K-pop)을 들으며 일어나, 유튜브 동영상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잠이 드는 한류 팬은 이미 6000만 명이 넘는다. 한류한국국제교류재단(KF)이 펴낸 '2016 지구촌 한류 현황'에 따르면 88개 국가에서 1652개의 한류 동호회가 결성돼 5939만 명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이미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더 많은 인구가 사는 시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시장에 우리가 파는 상품은 아직 화장품 등 몇 개 품목에 불과하다.
인구 증가와 인종 비율의 변화로 유통, 제조, 서비스, 레저 등 각종 산업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미국은 얼마 전 인구의 다수가 전통적인 와스프(WASP : 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 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아니라 히스패닉 계열로 바뀌었다. 소비 제품과 유통 시장도 변화되고 있다. 미국 유통 시장의 강자는 월마트가 아니라 아마존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다.
새로운 인종과 증가한 인구들이 구매하는 거대한 아마존(AMAZON)과 이베이(eBay)의 바다 속에서 우리나라 제품들을 팔기 위해서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의 역할과 기능을 바꿔야 한다. 해외 공관에 상무관을 파견하고, 코트라 지사가 현지 시장을 조사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즉, 인터넷 아마존 쇼핑몰에서 우리 제품을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아마존이 요구하는 구조에 따라 전술적으로 우리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인터넷 무역투자진흥공사를 설치해야 한다.
중국은 강력한 1자녀 산아제한 정책으로 태어난 19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을 일컫는 '바랑하우', 소위 '소황제 세대'라 불리는 계층이 소비를 주도하고 있다. 부모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이들 세대의 높은 교육 수준과 서구적 삶의 추구로 중국 시장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부 기관들이 이들의 취향과 관심을 분석하여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드는 전략적 연구를 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하고 있다.
다산(多産)을 권장하는 이슬람 전통으로 중동은 청년 인구가 급속하게 늘고 있고,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할랄(Halal) 식품 인증 외에는 이슬람 시장에 접근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들과 사업을 하려면 이자를 지급하고 은행에 돈을 빌리는 것을 금지하는 코란에 따라야 한다. 기존의 국제결제금융 시스템과 계약 관행으로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히잡과 차도르, 부르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서 이들이 구매하고자 하는 고가의 섬유 제품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하루 70만 명이 오가는 동대문 시장에 이슬람 문화를 아는 상인이 얼마나 될까? 세계 인구 4위로 2억7000만 명이 사는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고 이미 우리나라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오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 기업가와 상인들을 위해 이슬람 문화를 교육하는 곳은 아직 없다.
시장 지향형 R&D로 'R&D 패러독스'를 극복하라
연구 성과로는 99% 성공해도 시장에서 활용되는 기술은 찾아보기 힘든 상황을 'R&D 패러독스'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연구개발은 지금 심각한 R&D 패러독스에 빠져 있다.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이 아닌 정부 연구개발(R&D) 지원금을 수주하기 위한 연구, 대학에서 국제학술지에 게재할 연구 실적을 쌓기 위한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연구 성과의 활용과 상용화보다는 연구 과제 수주와 논문이나 특허에만 몰두하는 국가 연구개발 구조를 바꿔야 한다.
시장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창조 경제와 R&D 패러독스는 샴쌍둥이 같이 서로 닮은 정책이다. 좋은 기술과 좋은 상품을 만들면 저절로 활용된다는 공급자 지향의 시각이 만들어낸 판단 오류이다. 팔리지 않고 사장돼 버리는 것은 좋은 기술일지라도 좋은 상품이 못 된다. 샤오미를 보라. 그동안 중국산 제품은 낮은 품질과 불법 짝퉁으로 저평가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에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샤오미의 전자 제품에 사람들은 대박을 외치며 열광했다. 샤오미의 제품들은 가성비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
이처럼 시장은 기술이 아니라 현존하는 소비자들의 수요에 의해 움직인다. 기술의 추세는 새로운 발명이 아닌 시장에서 요구하는 제품을 위해 기존의 기술을 융·복합하는 것이다. 시장의 요구를 분석하고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융·복합하여 수요의 타이밍에 맞춰 제품을 제공해야 한다.
대통령 직속 시장개발위원회(MDO)가 필요하다
시장 개발을 위해서는 이를 담당할 정부 조직의 개편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직속으로 시장개발위원회(MDO: Market Development Organization)를 만들어야 한다. 시장개발위원회는 새로운 인구 변화, 한류 및 다문화 등을 기회로 한국 시장을 공격적으로 만들어가는 대통령 직속 조직이다. 시장개발위원회는 통상 교섭과 투자 분야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외 시장을 정부 주도적으로 찾아내고, 그 시장에 국내 기업이 진출하도록 하며 해외 투자와 IPO까지 지원하는 총체적 역할을 포함한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 경제의 한계는 시장을 창조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대기업들만 몸집을 늘리고 배를 불리는 창업 경제였기 때문이다. 창업을 하고 상품(서비스)을 만들면 뭐 하는가? 상품(서비스)을 팔 시장이 없는데. 시장이 없으면 상품(서비스)도 썩고 민심도 썩는다.
참고할 만한 시장개발위원회(MDO) 전문 조직으로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있다. 1962년 특별법에 따라 설립된 USTR은 통상 교섭은 물론 대내외 투자 등을 총괄하는 대통령 직속 기구이다. 이 조직의 최대 강점은 200명 이상의 전문가가 입사 후 줄곧 통상 관련 업무만 담당한다는 것이다. 10~2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들이 즐비하고, 이들이 수십 년째 특정 국가와 무역 분쟁이나 다자 기구에서 갈등 현안 등을 다룬다. 미국이 어느 나라보다 통상 교섭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 같은 시스템 덕이다. USTR을 이끄는 수장은 대통령 주재 각료회의의 장관급 고정 멤버다. 장관급 기관장이 버티는 덕에 다른 정부 기관들과 협업도 훨씬 수월하다. USTR은 19개 관련 기관으로 이뤄진 무역정책심의그룹(TPRG)을 총괄하고 지휘한다.
반면에 우리나라 통상교섭본부장실은 산업통상자원부의 5개 실 중의 하나다. USTR은 장관급이 수장이지만, 한국의 통상 조직 책임자는 차관도 아닌 차관보다. 다른 부처와 원활한 공조는 당연히 어렵다. 순환 보직으로 인해 직원들의 이동이 잦아 전문성을 가지기도 쉽지 않다. 어떤 프로젝트든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책임지고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대통령이 바뀌면 이들의 업무도 바뀐다. 정권이 바뀌어도 전문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조직, 국운 융성의 사명을 가지고 새로운 해외 시장을 개척할 전담 조직이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을 위한 '사업 플랫폼'이 필요하다
해외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현지화 지원을 위한 정부 기관도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장에 대기업과 더불어 중소기업이 진출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면 된다. 대기업의 해외 매출 신장은 고용 증가로 이어지지 않으나 중소기업의 매출 신장은 고용 및 고용 조건 등 여러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것이다.
특히 중소기업이 단계별로 성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도 만들어줘야 한다. 창업자가 아이템 발굴, 회사 설립, 기술 개발, 영업 전략 수립, 인맥 관리, 투자 유치, 정책 자금 신청, 마케팅, 해외 수출, 주식시장 상장을 위한 기업 공개(IPO : Initial Public Offering)까지 모든 것을 다 하기에는 버겁다. 기업을 발굴하고 초기 투자를 해서 나스닥까지 상장(IPO)하는 해외의 유명 벤처 캐피탈(VC)처럼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선택하고 집중해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누어서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중소기업 토탈 BIZ 플랫폼을 정부가 구축하고 지원해야 한다. 정부가 사업의 단계별로 전문가들로 비즈(BIZ) 플랫폼을 구축하고, 글로벌 IPO까지 성공 사례를 주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방향은 옳다.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를 한 축으로 삼아 내수를 살리면서 국민의 삶을 보듬어 주고, 공정한 경제와 혁신적 경제 정책으로 경제의 새로운 활력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미 실패한 것으로 증명된 규제 완화에 언제까지 매달릴 것인가? 시장의 작동 방식을 잘 알고, 정부의 역할을 정해야 한다. 중소기업을 살리고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대기업들조차 활용해야 한다. 정부가 끌고 나가고 기업이 따라오는 방식, 이미 이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세계 인구가 먹고 자고 마시고 입고 즐기는 모든 곳에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가 들어갈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
(박민식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은 전 국회의원 보좌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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