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혁은 주류 학문이자 보수적 입장을 대표해온 "국가안보 패러다임"과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면서 진보적 시각이 투영된 "민족통일 패러다임"에 한반도 문제에 대한 연구와 공론화가 갇혔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면서 "시대착오적인 두 시각을 극복하고 민족과 세계, 통일과 평화를 호환시켜" '평화주의'를 대안적 시각으로 제시하고 싶다는 포부를 이 책에 담았다.
저자의 지적처럼 '평화'만큼이나 천차만별의 의미를 품고 있는 표현도 드물다. 이는 비단 종교적, 문화적 차이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평화는 "합법적 폭력기관으로서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흔히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선택과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전쟁을 벌이면서도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특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 국가 지도자들은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을 신봉한다. 여기서 힘이란 주로 군사력을 의미한다.
평화학의 도드라진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견된다. 국제정치학을 비롯한 기성 학문도 평화를 주된 주제로 삼고 있지만, 이들 학문은 평화의 수단으로 군사력 건설과 세력 균형을 중시한다.
반면 평화학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다. 평화학의 대가인 요한 갈퉁이 자신의 책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수단과 과정이 최대한 평화의 정신에 부합할 때, 그 목적과 결과도 최대한 평화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평화는 흔히 '전쟁이 없는 상태'로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의 부재는 평화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가령 한반도는 65년 넘게 휴전 상태, 즉 사실상의 전쟁의 부재 상태에 있지만, 평화 상태에 도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비단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지 못하고, 북핵 문제가 미해결 상태에 있으며, 한반도 문제 당사자들 사이의 갈등 관계가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반도 주민들은 전쟁의 공포뿐만 아니라 빈곤과 억압, 차별과 양극화, 불평등과 환경오염 등 다양하고도 촘촘하게 짜여진 "구조적 폭력" 혹은 "비평화" 상태에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 평화학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전쟁 부재의 제한적 평화관을 비판"하면서 "평화가 안보는 물론 정의, 민주주의, 인권, 발전 등과 상호작용하면 만들어지는 역동적 개념이자 가치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17년의 위기를 딛고 2018년에 대전환을 거쳐 2019년에는 평화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현안을 쫓다 보면 큰 그림을 놓일 수 있고 정작 중요한 가치도 간과할 수 있다. <한국 평화학의 탐구>가 소중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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