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균의 죽음과 정치의 기본

[최창렬 칼럼] 정치개혁 없는 사회개혁은 허구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국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선진국이다. 올해 한국의 소득수준이 그렇다. 유사 이래 처음 3만 달러 초과를 기록했다. '30-50클럽'인 인구 5천만이 넘는 소득 3만 달러 초과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에서 7번째다. 그러나 한국의 소득 불평등은 OECD 국가 중 4번째다. 굳이 각종 통계지표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점점 벌어지는 추세다.

개혁의 제도화가 이 시대의 화두인 이유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개혁을 위한 제도화의 동력은 사라지고 있다. 사회적 생태계의 하위에 위치한 계급들이 직접 정치의 장에서 개혁연대를 결성하지 못하면 그들의 이해는 대표되지 않는다. 한국정치의 한계다. 이른바 개혁세력이니 촛불정부 등도 변화를 견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통해 다양한 계급이 국회에 진출해야 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여야 정당의 계산은 의원 정수의 문제, 지역구와 비례대표와의 비율, 지역구 의원 선출 방식 등에서 제각각이다. 지금의 국회 의석 분포나 정당의 이념적 지향 등으로는 한국사회를 바꿀 수 없다. 비정규직, 자영업, 청년 등 정치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자신들의 이해를 직접적으로 정치영역에서 주장하지 않고는 바뀔 수 없다. 16세기부터 18세기 까지 신흥 상공업 계급이 주도한 서구의 시민혁명은 자신들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정치영역에서 이해가 관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됐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도 각 계급과 계층이 정당을 통하여 이익을 집약하고 표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정당의 어원은 본래 부분을 대표한다는 part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은 포괄정당(catch all party)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계층과 계급을 가리지 않고 보수와 진보 유권자를 공략해서 의석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른바 '애매모호 전략(ambigious strategy)'이다.

그러나 의회주의가 정착된 서구 국가들에서는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정체성이 정당의 존재가치를 구성한다. 한국은 정의당을 제외하고 특정 이념과 가치를 정당의 지향으로 내세우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사회는 상위와 하위에 위치한 계층의 격차가 워낙 클 뿐만 아니라 이 추세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달 14일부터 이달 7일까지 최소 50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난 11일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 씨가 숨졌지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김용균'들에 이 사회는 주목하지 않는다. 한국의 사고사망 만인률(1만 명 당 비율)은 2013년 기준으로 0.71, 미국은 0.37, 독일 0.17, 영국은 0.04이다. 한국은 영국의 18배다. 산재사망수는 유럽연합의 5배, OECD 국가 중 1위이지만 이러한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의제 밖에 존재한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도 경영계의 반대와 이와 직간접으로 이해가 얽혀있는 국회의원들의 무관심으로 표류하다 가까스로 개정됐다. 노동자 스스로가 정치영역에서 자신들의 이해와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성장시대의 패러다임으로의 회귀와 낙수효과의 부활로 요약되고 있다. 공정거래법과 상법 등 경제민주화 법안들의 국회 처리는 줄줄이 무산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경제기조인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의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 재벌이 독식하는 성장 패러다임으로 회귀한다면 부의 집중과 기득권 동맹은 더욱 강고해지고 소수자와 약자들은 '죽음'과 '위험'으로 속절없이 내몰려 질 것이다.

사회적 관심 밖으로 내몰리는 비정규직과 약자들이 사회적 유대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한국사회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할 수 없다. 국내전체 기업의 99%가 중소기업이다. 전체 고용인원의 88%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대기업의 독식구조는 깨지지 않는다.

투자활성화도 시장경제 질서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바탕위에서 가능하다. 균등한 기회,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가 사회적 가치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자영업과 비정규직들은 더욱 '위기'에 노출된다. 포괄정당인 거대정당들이 포진한 현재의 의회구도에서는 약자들의 삶이 대표될 수 없다. 한국사회의 경제사회적 모순은 결국 '정치'가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정치가 지금의 정치여서는 안 된다. 선거제도의 대변혁은 그래서 필요하다.

주권자가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정권은 더욱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최근의 지지율 하락이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국민은 정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반응성은 핵심 요소인 대표성과 책임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주권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살필 정치적 감수성이 반응성의 본질이다. 21대 총선에서의 정치공학적 셈법에 포획되지 말고 선거개혁 등 담대한 정치개혁을 추구해 나갈 때 오히려 그 정당에게 유권자는 표를 몰아준다. 우리 정치는 아직도 기본을 모르고 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