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설'은 어떻게 사체까지 300만 원에 팔았나?

[26년, 형제복지원]<6>우리 사회 통치 모델로서의 시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정 속에서도 우리는 형제복지원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2013년 한국 사회에 여전히 시설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여러 권력과 폭력의 구조들이 그곳을 재생성하기도, 은폐하기도 한다.

여덟 살이던 1984년 10월 16일 형제복지원에 입소해 1987년 또 다른 시설로 옮겨진,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이 다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 이제라도 시설은 어떻게 생겨났고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개인을 부수어 갔는지 물어야 하는 때이다. 살아남은 자와 다른 사회 구성원이 소리를 들으려 하고 여러 질문들을 곱씹을 때, 답이 아닌 '길'이 보일 것이라 믿는다. 그 소리가 우리 사회에, 우리의 가슴에 퍼지도록 인권오름과 탈(脫)시설 운동을 하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이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현재적 쟁점을 짚어보고자 기획 연재한다. <편집자>

26년, 형제복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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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노들장애인야학에서 열린 '탈시설 워크숍'에서 '시설' 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시설'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성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사실 깊은 성찰은 고사하고 시설에 대한 인식 자체가 내게 없을 때였다. 어떨 결에 수락은 했지만 그곳은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글을 쓰기 위해 읽은 시설 수용자들의 증언 자료집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직접 대면해 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명목상으로는 복지시설이었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수용소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사실상 짐승과 같은 처우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시대에 이런 시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 시설이 작동하는 원리와 양상을 하나씩 따져볼수록 그것이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설에서 작동하는 기본 원리들은 사실상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내가 이 사회에서 본 것보다 더 순수한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공간의 정체가 뭐지?'하는 생각이 자료들을 읽어나가는 동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어떤 특별한 공간이 그런 기능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마치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를 바꾸는 거울처럼 사회의 여러 공간 및 배치들을 비춰주면서 동시에 뒤집혀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곳을 '타자공간(espaces autres)' 혹은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라고 불렀다(그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요양원같은 '시설'도 그런 공간들 중 하나라고 했다). 그런 공간들은 사회 전체의 윤곽을 그려주지만 사회의 외부에 위치하며, 무엇보다 사회 내부의 질서와 뒤집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매우 이질적인 어떤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곳은 예외적이고 특별한 공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사회와 무관한 공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상에 대해서다. 다시 말하자면 그곳은 우리 사회가 어떤 곳인지를 말해주는 특별한 공간이다.

따라서 소위 '시설의 문제'는 '문제 시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설 일반'의 문제도 넘어선다. 그것은 시설이 비추고 증언하는 사회 일반, 다시 말해서 '시설 사회'의 문제이다. 시설을 필요로 하고 시설을 통해서 작동하며, 무엇보다 시설의 원리 위에 구축된 사회 말이다. 언젠가 어느 활동가가 내게 물었다. 시설은 도대체 왜 없어지지 않는 거냐고. 여러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시설 사회'라서 그렇다.

형제복지원 피해자인 한종선씨의 글 <살아남은 아이>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글은 형제복지원에 대한 증언이면서 80년대 한국 사회에 대한 증언이다. 그러나 이 글은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시설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은 문을 닫았지만 다시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생겨난 것처럼, 시설은 다만 변형될 뿐이며, 문제는 진화할 뿐이다. 물론 지금의 나로서는 현재 시설의 작동 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었고, 어떤 세련된 관리 및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여기서 한종선 씨의 글을 따라가며, 시설이 어떤 곳인지, 왜 우리가 '시설'이 아니라 '시설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지 말해볼까 한다.
▲ 부산시 북구 주례동 산18번지에 자리 잡은 옛 형제복지원. 한때 30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하던 수백억 원대의 대지 및 시설이었다(1990년 1월 13일 모습). ⓒ연합뉴스

권력 모델로서의 시설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읽다보면 시설장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 권력 체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한종선 씨의 표현을 빌자면 그곳은 "원장의 말 한마디에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수용자들은 "멀리서 원장이 가까이 오면 하던 것을 모두 중지한 채 거수경례를 했다." 시설장만이 아니다. 모든 직위들은 항상 힘의 행사와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지원 안에서 직위를 갖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직위를 이용해서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설장이 불편한 심기를 조금만 드러내도 말단에서는 어마어마한 폭력이 행사되었다.

복지원에서는 '이유 없는' 폭력도 자주 행사되었는데(어떤 때는 단순히 날씨를 이유로, 또 어떤 때는 말 그대로 '그냥'), 이는 권력이 그 순수성 내지 절대성에 다가갈 때 드러나는 권력의 진면목이다. 권력은 절대적이 되어갈수록 그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력 자체가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설에서 자의적인 폭력, 이유 없는 폭력이 행사되는 것은 권력을 확인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어떻게 이런 '절대 권력' 내지 '순수 군림'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권력자에게 일어난 일보다는 수용자, 즉 피해자에게 일어나는 일과 관련이 있다. 시설에 수용될 때 수용자들은 사실상 모든 사회성, 다시 말해 모든 사회적 관계와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다. 그들은 단 번에 연고 없는 자, 권리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모든 맥락들이 제거된 채 거기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그 순간 그들은 생존을 시설에 전면적으로 의탁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단순 생명체로 축소된다. 삶의 이러한 전면적 의존이 그것을 의탁 받은 체제의 절대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수용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시설과 시설장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이곳은 권력의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모든 맥락이 해제되므로 수용자의 삶은 동물 내지 짐승의 것으로 수렴해간다. 2009년 시설 문제에 대해 글을 쓸 때 내가 읽은 많은 증언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짐승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실제로 사람을 가축의 축사에서 재우는 경우도 있었고, 사실상 사육이라고 불러도 과장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감금하고 먹을 것을 개밥그릇에 주는 곳도 있었다. 한종선 씨 표현을 뒤집어 말하면 그곳은 '사람'을 '짐승'으로 전락케 한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권력이 무한 증식되는 이러한 모델은 이 공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병영사회에서 권력자들의 이념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미 지적한 것처럼 형제복지원은 1975년 유신 치하에서 공포된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해서 설립되었다.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사회 전체를 규율 잡힌 통제공간으로 만들려던 시점에 길거리의 부랑자들에 대한 강력한 수용조치 이루어진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광주학살 이후 철권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전두환 정부는 '정의사회구현'이라는 미명 아래 유신체제에 이루어진 이런 조치들을 계승하고 강화해갔다.

군사정부 시절 한국 사회는 사실상 병영사회였고, 여기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폭력과 고문, 납치와 암매장이 이루어졌다. 형제복지원에서 이루어진 끔찍한 폭력과 고문, 암매장 등은 당시 사회에서 일정한 제약 때문에 완전히 실현될 수 없었던, 당시 권력이 가진 욕망의 순수한 실현에 가까웠다. 즉 형제복지원은 분명 예외적 공간이었지만, 그것은 사회의 이념으로부터 일탈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회의 이념이 예외적으로 선명하게 구현된 공간이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재차 강조하건대, 시설은 사회로부터 추방된 자를 수용한 예외적 공간이지만, 그것은 사회로부터 일탈된 공간이 아니라 사회를 특별한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이윤 모델과 영적 모델로서의 시설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경제적 능력을 부인당한 사람들이며, 대체로 자립의 신념과 의지가 부족한 사람들로 간주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시설에서는 이들의 경제적이고 영적인 가치가 부각된다는 것이다. 시설이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권력 모델과 이윤(수익) 모델, 영적 모델이 별 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와 자본, 교회로 대변되는 이들 영역은 그 작동 방식과 매체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근간에는 상호전환가능성이 존재한다(권력과 이윤, 이데올로기의 상호전환).

형제복지원은 일단 사회에서 모든 경제적 수단과 능력을 박탈당했거나 부인된 존재가 시설에서 어떻게 경제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수용자들은 일반 노동시장에서는 낮은 생산성 때문에 거부되지만, 수용소 상황에서는 보통의 경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노동통제와 임금착취가 가능하기에 높은 수익을 낼 수가 있다. 이들은 일반 노동시장에서는 취업할 수 없었지만, 형제복지원에서는 양재와 목공, 철공 작업에 배정되었고, 사실상 임금을 받지 못한 채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복지원은 이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더욱이 사회에서는 노동능력이 없으므로 무가치하게 평가된 신체 자체가 시설에서는 생체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시설에 대한 정부 지원이 수용자의 숫자에 따라 이루어지므로 이들의 신체를 확보하는 것은 돈과 직결되어 있다. 한종선 씨에 따르면, 이런 이유로 복지원은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끌고 갔다." 그런데 형제복지원의 경우에는 생체가 아닌 사체에서까지 가치를 발견했다. 형제복지원은 죽은 이들의 사체를 실습용으로 300-500만원을 받고 병원에 판매했던 것이다.

이런 착취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해준 것이 교회였다. 교회는 수용자들의 강제 수용 자체를 도덕적으로 합리화하며(단순한 자립의지 박약에서 영적인 죄악까지, 교회는 수용자들에 대한 다양한 도덕적 범죄 항목을 만들었으며, 강제 수용 자체를 죄에 대한 일종의 처벌로써 옹호했다), 수용시설 안에서의 강제 규율이나 강제 노동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당화했다. 게다가 지금도 교회는 많은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경우 시설은 마치 교회공간, 다시 말해서 세속과 구분되는 영적인 공간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로써 사회로부터의 각종 규제와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권력의 독립된 공간이 창출되는 것이다. 한종선 씨는 "교회는 복지원 내부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것은 물론 형제복지원 내 건물들의 배치를 지칭한 말이었지만, 복지원 권력의 종교적 성격과 영적인 착취를 지칭하는 말로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 1987년 2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지면 캡쳐

'시설 사회'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앞서 말한 것처럼 시설은 일종의 타자공간이고 그만큼 예외적이고 특별한 공간이다.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사회적 관계로부터 배제된 공간이지만 음각화의 방식으로 사회를 그대로 비추고 있는 공간이다. 앞서의 비유를 들자면 그것은 전체 사회를 대칭적으로 비추고 있는 거울 이미지다. 따라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울 이미지는 사회에 대한 우리 인식의 유용한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거울 이미지를 바꾸어서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도 사실은 그 거울이 비추고 있는 곳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사회 말이다.

1990년대 민주화와 더불어 군사정부는 종언을 고했고 병영사회 모델도 공식적으로는 해소되었다. 정치, 경제, 사회의 각 영역들, 특히 공식적 부문들은 제도적으로 상당 부분 자유화 되고 합리화 되었다. 그런데 시설 문제를 살펴보고 있으면, '시설'은 마치 민주화 과정에서 벗어난 예외 공간이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꽤 많은 시설들이 여전히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설사회'라는 문제의식에서 볼 때 우리 사회가 그다지 크게 변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일부 시설들은 군사정부 시절의 병영사회 모델과 그렇게 달라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시설'은 예외적 공간이라는 생각, '시설'을 '여기'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그런 황당한 시설들을 이 시대에도 여전히 존속할 수 있도록 방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설 문제의 근간은 지금도 남아 있는 그런 '시대착오적인' 시설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 끔찍한 시설이고 폐쇄되어야 마땅하지만, 이런 '문제 시설들'로 '시설의 문제', 더 나아가 '시설 사회의 문제'를 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축 축사가 세련된 요양 시설로 바뀌고, 폭력배들의 인신납치가 사라지고, 전문가들의 판단을 빌어 시설 입소가 결정된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어떤 식으로든 격리하고 별도로 관리 통제해야 하는 사회는 시설 사회이다. 시설 사회란 바로 그런 시설을 통하지 않고서는 '함께' 사는 방법이 마련되지 않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되었을 때, 수용자들은 모두 복지원 시설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시설 사회 속에 그냥 버려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구걸로 연명해야했고 결국 다른 '시설'에 입소해야 했다. '시설 사회'는 시설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랑자든 장애인이든, 사회의 일부 구성원들을 '시설'을 통해 격리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종선 씨도, 그의 누이도, 그의 아버지도 모두 그렇게 다른 시설들을 전전해왔다. 한종선 씨 자신은 기초생활수급권에 근거해서 아슬아슬한 삶을 겨우 살아왔고, 정신병을 앓는 누이와 아버지를 시설에 둔 채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형제복지원의 '드러난 야만성' 때문에, 우리 사회의 '드러나지 않은 야만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시설수용자들의 탈(脫)시설을 직접 가로막는 것은 시설장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탈(脫)시설을 막고 있는 것은 시설사회이다. 기초생활수급권에서부터, 이동권, 활동보조인제도, 탈시설을 위한 주택지원 등과 관련된 문제들이, 시설보다 더 높은 담을 쌓고 탈시설을 막고 있다. 게다가 더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삶의 추방과 포기, 방치 등을 통해 삶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는 권력 현상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설에 대한 문제 제기를 출발점으로 해서 시설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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