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 외무부 대미정책국 소속이었던 응우엔칵후인이 1997년에 로버트 맥나마라를 비롯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주요 정책담당자들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다. 1965년 미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본격화한 직후부터 북베트남에 '비밀 평화 협상'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이에 응하지 않았었다.
도무지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미국 측 인사들은 30년 가까이 지나서 '왜 그때 협상장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응우엔칵후인을 비롯한 베트남 측 인사로부터 위에서 소개한 답변을 들었다.
제재 중독의 결과는 비핵화의 최후?
이 대화를 소개한 이유는 오늘날 북미관계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최선희 외무성 부상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 사이의 실무회담에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사이의 고위급 회담에도 응하지 않고 있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얘기를 반복해서 하고 있다. "제재를 비롯한 최대의 압박은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유지될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는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약속한 바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러한 얘기를 반복할수록 북한의 대미 불신도 커지고 있다. 16일 북한은 외무성 산하 미국연구소 정책연구실장의 '담화'를 통해 "제재압박"과 "인권소동"을 비난하면서 "조선반도 비핵화에로 향한 길이 영원히 막히는 것과 같은 그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경고까지 내놨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북베트남을 상대로 맹폭을 가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북한을 상대로는 경제 무기인 제재의 강도를 높이면서 비핵화 협상을 제안하고 있다. 북베트남의 메시지는 간단하면서도 단호했다. "폭격과 대화는 양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제재와 협상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협상을 거부하자 폭격의 강도를 높이는 것으로 응수했다. 심지어 평화 협상에 임하지 않으면 핵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북한을 상대로도 경제적 고통을 배가시키려고 하고 있다. 경제 제재를 강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들의 인도적 지원마저도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있다.
트럼프는 왜?
'아웃사이더' 트럼프와 그의 참모진을 포함한 미국 주류는 사사건건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북 제재와 관련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선 트럼프는 김정은의 약점을 잡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여기서 약점이란 트럼프가 김정은이 경제발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를 비핵화를 달성할 압박 수단으로 동원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2017년 4월 20일 노동당 결정서를 통해 경제발전에 총력을 집중하겠다고 다짐했다. 트럼프도 김정은과의 만남을 통해 북한 정권이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에 얼마나 큰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트럼프에게 이 점을 수시로 강조해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의 호소와 문 대통령의 권고를 무시해왔다. 그는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하고 자신과 협상을 선택한 이유는 강력한 제재를 비롯한 '최대의 압박' 덕분이었다고 여긴다.
또한 협상의 달인을 자처하는 자신의 '거래의 기술'은 최대한 적게 주고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트럼프가 틈만 나면 "핵전쟁도 없고 북한의 핵실험도 없고 미사일 발사도 없고 미군 유해도 받아낸 반면에 내가 북한에게 준 것은 없다"고 자랑(?)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기질을 잘 볼 수 있다.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한 것이 중대한 양보 아니냐?"는 반박성 질문을 받으면 "그건 우리 돈 수백억 원을 아끼기 위해서 중단한 것"이라고 응수하곤 했다.
이런 트럼프에게 신뢰와 제재는 '쌍무기'에 해당된다. 그는 틈만 나면 김정은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심지어 "사랑에 빠졌다"고까지 말했다. 동시에 "나도 제재를 해제하고 싶다"며, 대북 제재가 해제되면 "북한은 남한만큼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속삭인다. 김정은을 향해 "나를 믿으면 비핵화를 해라. 그러면 제재를 풀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번에야말로 제재가 통할 것'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김정은의 생각은 다르다. 미국이 제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북 제재를 둘러싼 게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는 북한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쓰리 쿠션'인 셈이다.
아마도 트럼프의 제재 중독은 북한과의 대타협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트럼프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님의 제재를 위시한 최대의 압박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되는 비핵화(FFVD)를 달성하려면 제재의 페달에서 발을 떼어서는 안 됩니다. 이란 핵협정보다 더 강력한 북핵 합의를 받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재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트럼프는 이 말에 현혹되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는 나르시시즘과 인정 투쟁 욕구가 누가보다도 강하다. 그리고 상대방의 약점을 잡고는 최대한 적게 주고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 것을 '협상의 기술'로 여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미국이 제재에 중독될수록 한반도 비핵화는 멀어진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완승'을 추구하는 그의 기질이 비핵화의 '최후'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드는 까닭이다.
앞서 소개한 응우엔칵후인은 미국인들에게 이런 말도 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북폭은 우리를 분개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북폭을 받으면서 협상을 한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염두에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굴욕을 갚기 위해서는 남베트남의 지상전에서 미국군을 박살 내는 것밖에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로 그 후 우리는 승리했고, 당신들은 베트남에서 철수했습니다."
다행히 북한은 아직까지는 판을 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동시에 제재로 인한 고통이 아무리 커져도 굴복할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면 트럼프는 웃는 얼굴로 북한의 멱살을 더 조일 것이 아니라 자신도 할 바를 하면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제재를 강화하면서 "서두르지 않겠다"는 정책이 트럼프 본인이 그토록 극복하고 싶어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 자문해보면서 말이다.
※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졸저 <비핵화의 최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책 소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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