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이 11월 21일 내년 봄 예정인 독수리(FE) 훈련에 대해 "외교를 저해하지 않는 수준으로 규모를 줄여서 열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대다수 국내 언론은 북미고위급 회담 및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이 유화책을 내놓은 것이라는 분석을 쏟아냈다.
나흘 후에는 또 하나의 '낭보(?)'가 전해졌다. 유엔 대북 제재위원회와 미국이 남북한 철도 연결을 위한 공동조사를 대북 제재의 예외로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상당수 언론은 이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기대감이 커진 탓인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공동조사 제제 예외가) 남북의 합의와 인내, 한미 간 긴밀한 공조를 통해 이룬 소중한 결실"이라며, "착공식도 연내에 가능할 것"이고 "우리가 연결하게 될 철도와 도로는 남북을 잇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역지사지 해보면
미국이 군사훈련 축소에 이어 철도 연결 공동조사까지 양보를 한 만큼 북한이 화답할 차례라는 희망 섞인 주장도 많이 나왔다. 그리고 조만간 북미 고위급 회담이 열릴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하지만 북한은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왜 그럴까? 마음이 바뀐 탓일까? 그렇지 않다.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미국의 유화책은 결코 북한에 인센티브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6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약속하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은 한미군사훈련의 '축소'가 아니라 '중단'이었다. 그런데 매티스는 중단 지속이 아니라 규모 축소를 언급했다.
거칠게 비교해보자. 만약 북한이 핵실험이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규모를 줄여서 하겠다'고 하면 한미 양국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오해 없길 바란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이자, 역지사지의 관점을 가질 때 우리가 원하는 결과에 다가설 수 있다는 의미의 반문이다.
철도 공동조사 제재 예외 인정도 큰 양보 조치로 보기는 어렵다. 첫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자체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유엔 및 미국의 대북 제재가 그만큼 촘촘하게 짜여 있고, 그래서 착공식을 하고 실제로 연결까지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미국은 대북 제재 완화 및 해제의 문턱을 계속 높여왔다. 처음에는 비핵화 '합의'에서, 그 다음에는 비핵화 '달성'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비핵화 '검증'을 제재 해제의 기준으로 제시해온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문턱을 높일수록 북한의 의구심도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에 주저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자아도취와 김정은의 자아비판
최근 트럼프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대북 제재를 비롯한 "최대의 압박" 덕분에 김정은이 비핵화에 동의하고 협상장에 나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는 자기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시하는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제재에 있다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제재의 고삐를 당기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이러한 트럼프의 자아도취와 자기 확신은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하거나 북한과의 대타협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아마도 트럼프의 본심이 무엇인지 가장 궁금한 사람은 김정은일 것이다.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해놓고선 왜 멱살을 더 강하게 부여잡고 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추측건대, 북미고위급 회담이 겉도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김정은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의 방미시 트럼프와의 면담을 회담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에 대한 확답을 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관계의 교착상태가 지속될수록 김정은은 자아비판을 할 것이다. 본인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냐고 말이다. 그는 올해에 두 가지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비핵화 추진의 명분인 종전선언이고 또 하나는 비핵화 추진의 실리인 대북 제재 완화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명분도 실리도 손에 쥔 게 없다. 그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최악의, 그러나 개연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트럼프의 자아도취와 김정은의 자아비판이 이상한 '케미'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케미가 일어나 천재일우의 기회가 유실되기 전에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대책 가운데 하나는 트럼프의 제재 중독을 치유하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시도하고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한 이들 나라의 요구는 오히려 제재 강화의 빌미로 작용하고 있다. 대북 제재는 북한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까지 염두에 둔 일종의 '쓰리 쿠션'이기 때문이다.
하여 문재인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외교안보팀은 미국을 상대로 대북 제재 유지·강화가 아니라 완화·해제가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이라는 점을 논리와 경험을 총동원해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피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다른 미래를 원한다면 말이다.
* 필자 신간 <비핵화의 최후-보이지 않는 전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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