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앞에서 얌전해지는 이유는?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연금 사회주의? 주주권 행사는 자본주의

아주 신중한, 그렇지만 자기 자산을 소중하게 여기는 투자자를 생각해 보자.

자신이 10%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 알짜 자산이 있었다. 그 투자자가 보기에 이 알짜 자산을 매각한다면 충분히 수천억 원은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표 이사가 주주 총회도 열지 않고 자신이 최대 주주인 회사에 그 알짜 자산을 공짜로 넘겨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투자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바로 달려가서 대표 이사를 해임시키겠다고 나설까? 신중한 투자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뭔가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면 주가가 떨어져서, 자신의 주식 가치만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투자자는 조용히 대표 이사를 만나자고 요청한다. 차분히 물어볼 것은 물어보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는지 들어보려 할 것이다.

그런데, 대표 이사가 만나주지도 않고, 또는 어렵게 만났는데 엉뚱한 소리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정말 해임시키겠다고 나설까? 신중한 투자자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는 부족해서 대표 이사가 무시하는 것 같으니 다른 주주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공개적으로 서한을 보낸다. 합리적인 해결 방안을 찾아보자고 정중히 요청한다.

신중한 투자자의 행위는 경영 간섭이 아니라 최후의 방어 수단


그래도 무시한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신중한 투자자도 어쩔 수 없다. 내 주식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은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표이사 해임안을 주주 총회에 발의하고 다른 주주들의 위임장이라도 모아야 한다.

이 신중한 투자자의 행동이 경영 간섭일까? 결과적으로 대표 이사 해임안을 냈으니 그것만 보면 경영 간섭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방어 수단이다.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상황에서, 최대한 조심스럽게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도저히 방법이 안 보이니 최후의 수단으로 대표 이사 해임이라는 칼을 빼든 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방어마저 포기하는 투자자는 없을 것이다.

만약 이 신중한 투자자가 내가 노후 자산을 맡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당연히 내 노후 자산이 걸린 일이니 이 투자자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랄 것이다. 너무 신중해 만약 최소한의 방어 수단마저 사용하지 않는다면 투자자는 자신의 소임을 방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현재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의 작동 원리가 위와 같다. 아니 위의 신중한 투자자보다 더 단계적으로 접근한다. 문제가 포착되면 우선, 비공개 서한을 보낸다. 그 조치로 해결이 안되면 비공개 중점 관리 기업으로 선정하는 절차로 나아간다. 여기까지 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으면 공개 중점 관리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공개 서한을 보내도록 되어 있다.

국민연금이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를 통해 행사하는 주주권은 모든 방안을 쭉 늘어놓고 아무 방안이나 불쑥 꺼내는 방식이 아니다. 문제가 포착된 이후에도 경영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소한의 조치부터 단계적으로 실행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행사되는 주주권 행사에 연금 사회주의라는 비난은 어울리지 않는다. 주식회사의 주주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운영 원리이지 사회주의의 운영 원리가 아니다. 국민연금이 보유 중인 주식 가치에 훼손이 발생해도 그냥 꾹 참고 있어야 한다면, 집사(스튜어드)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지난 6월 4일 오전 밀수·탈세 혐의에 대해 조사받기 위해 인천본부세관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조양호 회장 일가의 탈세, 갑질 혐의 등으로 국민연금이 투자한 대한항공 지분 가치는 하락했다. ⓒ연합뉴스

해결되지 않았는데, 추가 조치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측면에 있다. 공개 중점 관리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공개 서한까지 보냈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주권 행사를 규정하는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지침'에는 더 이상의 조치가 없다.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권 행사를 경영 간섭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제외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국민연금의 자산 가치를 하락시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제 할 만큼 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 버리는 국민이 국민연금공단을 믿고 노후 재산을 맡길 수는 없다.

또한, 강력한 조치를 아예 배제시켜 버리면, 문제 해결 가능성도 낮아진다. 문제를 일으킬 기업 입장에서도 성실히 응할 이유가 없어진다. 공개 서한까지 보낸 이후에 다른 조치가 예정되어 있지 않다면, 경영진 해임과 같은 위협을 느낄 만한 조치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 전 단계 조치의 협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이 이러한 상황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일가에 대한 각종 갑질 및 밀수, 탈세 혐의 수사가 이어지면서 국민연금의 지분 가치가 심각하게 하락했다. 국민연금은 그 동안 비공개 대화와 공개 서한 발송, 경영진 면담까지 진행했지만, 뚜렷한 개선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대한항공이 잘 알고 있기에, 전향적인 조치를 내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라!

방법이 없지는 않다. 주주권 행사를 전담하기 위해 구성된 수탁자 책임 전문위원회에서는 할 수 없지만, 국민연금의 최상위 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에서는 할 수 있다. 기금운용위원회가 별도로 의결하면 경영 참여 주주권 행사에 해당하는 임원 해임 제안과 같은 조치를 할 수 있다.

국민연금의 대한항공에 임원 해임 제안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이를 경영 간섭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마지막 단계에서 하는 임원 해임 제안은 다른 조치를 모두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이 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방어권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경영 행위를 방해하려는 목적은 전혀 없는, 국민의 노후 재산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말고 대한항공 문제 해결을 위해 그 최소한의 방어권을 행사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것이 생색 내기용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지금 나서야 한다.

(홍순탁 내만복 조세재정팀장은 회계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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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복지국가 만들기에 직접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복지 주체 형성'을 목표로 2012년에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기초연금 강화, 부양의무제 폐지, 지역 복지공동체 형성, 복지국가 촛불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은 열린 시각에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복지 논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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