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제를 분점정부에 대한 고려 없이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을 분리시킨 제도라고 비판한 사르토리의 말은 오히려 한국정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다. 한국의 정당 카르텔 구도와 여소야대의 분점정부 상황의 조합은 연합정치의 부재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거대 야당의 맹목적 비토와 맞물리면서 정치 자체가 작동되지 않는 의회정치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의 발화가 2016년 10월 29일 이었으니 2년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과 재판을 비롯한 적폐수사가 단행되었으나 촛불혁명의 궁극적 지향인 사회 개조는 시동도 걸지 못하고 좌초될 위기에 처해있다. 물론 사회적 양극화와 부정의한 사회적 관행의 타파에 성공적이지 못한 상황에서도 집권세력의 보수야권에 대한 상대적 우위가 견지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제1야당의 수구적 안보관과 퇴행적 반공주의에 기인하는 효과일 뿐이다.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등 보수야권이 개혁적 중도 보수의 지향을 보인다면 언제든지 지지율 추이는 바뀔 수 있다.
현재 50% 중·후반 대에서 등락을 보이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국정 동력을 상실할 수치는 아니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한 한반도 안보 지형의 변화와 향후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낸다면 다시 지지율은 상승 곡선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와 민생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국정 운영 동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촛불혁명이 지향하는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의 변경은 불가능해진다.
문재인 정권은 집권 3년차를 앞두고 있다. 지지율이 개혁의 원천이겠으나 입법 불능에 가까운 교착을 재생산하는 정당구도에서 지지율은 공허하게 다가올 뿐이다. 집권세력과 그 핵심의 정치적 입지의 강화 외에 어떠한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이른바 '보수통합'이 선거공학에 의해 탄력을 받고 민주평화당과 정의당 등의 진보성향의 정당들도 새로운 연대를 모색한다면 21대 총선을 앞둔 내년에 현재의 정당구도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정당이기주의와 합종연횡에 따른 정당 재편성 국면에서 새로운 한국사회의 구조변화를 모색할 개혁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
대통령과 여야 원대대표들이 협치를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예상대로 곧 깨졌다. 정당연합도 협치도 지금의 한국정치의 능력으로는 언감생심이다. 다소 무리가 따르더라도 개혁의 제도화를 위해 과감한 정당통합과 연대가 긴요하다는 주장을 본보에서 여러 번 역설했지만 정당통합의 골든타임도 지나갔다. 지금의 정당구도는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박근혜 탄핵 전인 2016년 20대 총선의 의석분포이기 때문이다. 국회가 한국사회의 개혁을 막고 있는 역설에 직면해 있다.
소득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전관예우와 공공기관의 낙하산 인사는 지난 정권과 다를 바 없다. 성장담론이 지배적 의제로 등장하면서 기득권 블록은 더욱 강고해지고, 하위 계층의 신분 상승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악화와 거시경제 지표 악화의 주범으로 몰리고, 비정규직의 정규화는 성장 동력 잠식의 주된 요인으로 인식된다. 제1야당은 지지층 결집의 수단으로 수구적 행태와 언어를 동원하고 있다. 여야의 협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이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여야의 정책연합을 통한 입법연대의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제2의 촛불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개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기득권이 나설 리는 만무하다. 시민들의 개혁 동력도 찾기 어렵다. 어디에서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및 결과의 정의가 작동되는 사회를 위한 에너지를 찾을 것인가. 정치적 허무주의와 패배주의의 극복은 정치의 회복으로만 가능하다. 정치 복원은 언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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