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노동자 전태일을 만나다

[기고] 48년 전 전태일, 114일 전 노회찬을 기억하며…

"전태일의 영전에 바친다."

2004년 1월 5일부터 3월 31일까지 80여 일에 걸쳐 노회찬이 쓴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펴냄)의 여는 글 제목이다. 그는 "우리가 가는 길이 바로 역사이고 이를 기록하는 것은 나의 임무라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2018년 11월 13일 오늘은 전태일이 떠난 지 48년째 되는 날이다. 노회찬이 떠난 지 114일 되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노회찬이 남긴 삶의 흔적, 그 기록과 사료들을 뒤적이면서 '노회찬이 만난 전태일'을 기록하고 있다.

노회찬과 전태일, 첫 만남

1948년 9월 28일(음력 8월 26일) 경북 대구시 남산동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버들다리 위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전태일. 1956년 8월 31일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나 1970년 부산중학교 2학년을 다닌 노회찬과 살아생전 전태일 사이에는 직접적인 만남의 인연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전태일은 노회찬의 삶의 여정 속에 언제쯤 등장할까? '전태일(全泰壹)'이라는 이름은 <경향신문> 1970년 11월 14일 자 '평화시장 재단사, 병원서 숨져' '혹사 등 항의…분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70년 기사에는 총 73건, 71년에는 총 28건, 72년 총 2건, 73년 총 3건, 74년 총 6건, 75년 총 2건, 77년 총 2건, 79년 총 2건, 80년 총 18건이 검색된다.

▲ <경향신문> 1970년 11월 14일 자 '혹사 등 항의…분신'.

노회찬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시절, 또는 재수생 시절 전태일의 이름을 언론이나 소문을 통해 접했을 가능성이 꽤 높지만 지금으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입 재수를 하고 있던 1972년 10월, 노회찬은 강압적으로 국회를 해산시킨 박정희의 10월 유신에 분개한다.

"중학교 3학년 교과서에 나와요. 국회는 해산시킬 수 없다고. 그런데 국회가 해산됐다는 거야. 내가 잘못 알고 있는가 해서 책을 다시 봤어요. 확실히 잘못된 거라. 나는 그 다음 날 엄청난 데모가 일어날 줄 알았어. 국회가 해산됐으니까. 그런데 아닌 거야. 멀쩡한 거야. 이게 지금 뭐냐,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 이래 가지고 어린 나이에 저항을 시작한 거죠."

정부 발표는 일체 신뢰하지 않게 된 대신 노회찬은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김상현의 <월간 다리>를 구독하고, 강제 폐간된 장준하의 <사상계>를 서울 청계천 헌책방에서 권당 30원씩 한 보따리씩 사다가 읽는다. 박정희의 잘못된 통치와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저항은 이후 쭉 이어진다. 1973년 경기고 1학년 때 정광필, 이종걸 등과 유신반대 유인물('귀 있는 자 들어라')을 학내에 배포하고, 4월 18일에는 수유리 4.19 묘소에 가서 친구들과 함께 참배를 하고, 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민청학련 사건이 터진 1974년에는 독재 정부를 규탄하는 시사 토론회를 열고 수업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런 그가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1970년 전태일의 분신, 1977년 9월 9일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사건(이른바 '청계노조 9․9결사투쟁')을 모를 리는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두 번째 만남: 책

전태일과 노회찬이 만난 것은 책을 매개로 해서였다.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노회찬은 1983년 2월 26일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취득한다. 이 6개월간의 직업학교 시절이 그의 기억에는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으로 남아 있다. 수료 이후 그는 서울, 부천,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을 하였고, 1989년 12월 감옥에 가기 전까지 7년간의 수배 생활이 시작된다.

1982년부터 노회찬과 직업학교에서 함께 용접을 배우고, 87년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등 친형제 이상으로 친근감을 느낀다는 김종해 씨는 2007년 3월 어느 날 "노 의원이 보내 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떴다"며 "가슴이 넓고 따뜻한 남자인 노 의원이 우리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소회를 밝힌다.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전태일 평전>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펴냄)과 함께 노회찬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전태일 평전>의 원고는 1978년 11월 손학규·김정남에 의해 일본에서 김영기의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된다. 이후 1983년 6월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엮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이란 이름으로 돌베개에서 출판된다. 저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으로 1차 개정판이 나온 것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난 1991년 1월이었다. 이후 2001년과 전태일 재단의 2009년 신판 등 표지를 바꿔 다시 나온다. 김종해가 받은 <전태일 평전>은 아래 1983년 판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보인다.

노회찬과 전태일의 만남이 이루어진 또 하나의 책은 "제17대 총선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치세력화의 결실인 민주노동당은 44년 만에 국회에 진출하였다. 이 일기를 첫 원내 진출의 경과 보고서로 전태일의 영전에 바친다"는 <힘내라 진달래>(사회평론 펴냄)이다.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지휘하는 동안 <선대본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노회찬의 난중일기'로 명성을 얻었고, <힘내라 진달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출판됐다. <힘내라 진달래>는 2004년 11월 3일 제13회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한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전태일 문학상'은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횃불을 높이든 전태일을 기념하고자 1989년에 만들어진 상이다.

▲ <힘내라 진달래>(노회찬 지음,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2004년 9월의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당시 소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2004년 9월 2일(목) 맑음

전태일기념사업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대본 일기>가 올해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선대본 일기>를 전태일 문학상에 응모한 것은 상을 받기 위해라기보다 노동자정당의 첫 원내 진출의 경과보고서로서 전태일의 영전에 바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전태일의 이름이 들어간 상을 받게 된다니 노벨평화상을 받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다.

2004년 9월 7일(화) 비

하루 종일 전태일문학상 수상 치레를 했다.
최연희 법사위원장이 축하한다며 점심을 샀고 대한변협 회장은 난을 보내주었다.
이종걸 의원은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축하 메일 보내준 분들에게 일일이 답하지 못했다.
상은 명예지만 또한 멍에다.

▲ 이소선 어머님과 노회찬. ⓒ연합뉴스
후대의 사람들이 전태일의 일기를 통해 노동운동의 역사를 풍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듯이, 노회찬도 일기라는 지극히 개인적 행위를 통해 진보정당의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11월 3일 오후 5시 전태일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태일이의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날이 없었을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노당이 생긴 것을 보면 태일이의 죽음이 헛된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노회찬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의 강령이자 이념"이며 "노벨문학상과 전태일문학상을 선택하라면 전태일문학상을 고르겠다”며 특유의 화법으로 수상소감을 밝힌다. 노회찬의 보좌관들은 전태일이 생전에 여동생과 같은 봉제 노동자들에게 붕어빵을 사준 것을 상징하는 대형 붕어빵에 '전태일 계승'을 새겨 그에게 축하선물로 건넨다.

세 번째 만남: 추모식‧노동자대회 등 행사


전태일과 노회찬의 만남은 11월의 전국노동자대회 현장과 11월 13일 마석 모란공원 추모식, 그 외의 여러 모임을 통해서 줄곧 이루어진다.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제1회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회'. 노회찬이 깊게 관여했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에서 발행한 <노동자의 길> 1988년 11월호(제33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11월 13일, 오후 2시경에 이르러서는 이미 2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세대 노천극장이 의기충천한 노동자들로 가득 메워졌다. (…) 11월 13일, 18년 전 이 날은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동지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산화해간 날이다. 이 날을 기려, 노동자들은 18년 후인 오늘 '전태일정신 계승 및 노동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아주 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다니러 가는 것이다"라는 그의 유언을 오늘, 연세대, 그리고 여의도에서 그의 친구들이, 동지를 아는 동지의 모든 분신들이, 동지를 모르는 동지의 모든 분신들이 힘찬 투쟁을 통해 실현해 낸 것이다."

1여 년 뒤인 1989년 12월 23일 노회찬은 인민노련 활동과 관련해 이적단체 가입 등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12월 26일 자 <한겨레>에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청주교도소를 거쳐 1992년 4월 1일 만우절 날 만기 출소한다. 이후 눈을 뜨고 있는 그의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진보정당이 있어야 세상을 바꾸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한겨레> 1989년 12월 26일 자 ''인노련 재건' 3명 구속'. '인노련'은 '인민노련'을 잘못 표기한 것임.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후 7월 15일(목) <노회찬의 난중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종일 많은 비 내리다 13시 '전태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회의원 간담회'에 참석했다.
남상헌 대표, 김동완 목사, 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위원장, 전순옥 박사, 정인숙 위원장이 나와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친구인 이승철, 임연제 씨도 함께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의원들의 이름은 기억할만하다.
배일도, 이목희, 유인태, 오제세, 전병헌, 이인영, 이광철, 김덕규, 박계동, 유기홍, 김근태."

2005년 9월 30일 오후 5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 '전태일다리'(버들다리) 위. '전태일기념상 제막식'이 있었다. 이어 전태일 35주기 하루 전날인 11월 12일 오후. 1만5000여 명의 시민과 단체가 참여해 만든 전태일 동상과 4000여 개의 동판이 빛나는 속에서 '전태일거리 준공식'을 가졌다. 눈에 띄는 여러 동판들 가운데 노회찬과 그 보좌관들의 동판도 있었다.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 2005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비정규 권리보장입법 쟁취·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민주노총 창립 10주년 기념 2005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노회찬‧권영길‧천영세‧심상정‧단병호‧이영순 등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2005년 12월호 <신동아>는 송년특집으로 '2005년,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는다. 노회찬은 '청계천 버들다리에서 전태일을 다시 만난' 11월 12일 토요일의 '전태일다리'와 '전태일거리' 준공식 순간을 꼽는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2001년 1월 1일 나는 몇 사람과 청계천 6가를 찾았다. 정월 초하루 칼바람 부는 오전 8시의 청계천 6가는 인적은커녕 제자리에 10분을 서 있기도 어렵게 추웠다. 일부러 유념해서 찾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곳에 설치된 전태일 추모동판은 나뒹구는 휴지조각에 덮혀 있었다. 빗자루로 쓸고 장미꽃을 바치고 술도 한잔 부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자주 찾아와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깨끗이 청소해놓겠다고. 혼자서 하기 힘들면 함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놓겠다고. 하지만 그뒤 이곳을 찾은 것은 몇 번 되지 않았고, 그날의 다짐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전태일이 산화한 뒤 많은 이가 또 다른 전태일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실제 전태일이 산화해간 그 불꽃으로 민주노총이 설립되고 민주노동당이 창당됐다. 그러나 전태일이 몸을 불살라 한국의 노동현실을 고발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어느만큼 달라졌는가. (…) 전태일이 자신은 굶어가며 여공들에게 붕어빵을 사주던 때에 비해 물질적 생활수준은 어느 정도 나아졌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그 당시보다 더욱 벌어졌다.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억압구조 또한 결코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 대해 전태일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들의 책임은 전혀 없는지. 우리는 정말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지. 전태일 다리 위 그의 동상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다."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2009년 11월 13일 오전 10시 모란공원 전태일 39주기 추도식 자리. 노회찬은 "오늘 이 자리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두 모여 있습니다. 전태일 앞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태일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거창한 약속보다도 우리 모두가 아직은 전태일이 되는 길을 찾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는 말로 추모 발언을 한다.

이날 노회찬의 트위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전태일 열사 추도식 끝내고 이소선 어머님과 국밥 한 그릇 했습니다. 제삿날이라며 소주 자꾸 따라주셔서 석 잔 마셨습니다. 제 어머님과 동갑인 81세인데, 안목이 예리하십니다. 저 보고 많이 예뻐졌다고 말씀하시네요."

2010년 11월 30일 오후 7시 노회찬은 (사)참여성노동복지터('참터')가 주최하고 수다공방과 (주)참신나는옷이 주관하는 제4회 수다공방 패션쇼('대한민국 명품 봉제콜렉션 2010') 모델이 되어 만화가 박재동, 탤런트 정혜선 등과 함께 런웨이에 선다. 봉제기술인과 사회지도층 인사 그리고 소비자가 함께 하는 신나는 패션쇼다.

참터는 2003년 동대문 지역 봉제의류 영세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향상과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 및 사회적 지위향상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나아가 전태일 정신을 따라 빈부격차를 없애고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수다공방은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 박사가 설립한 참터에서 만든 공동 작업 훈련장이자 브랜드로, 그 성과는 사회적 기업으로 (주)참신나는 옷('참옷')을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2012년 11월 1일 '전태일다리 명명식'에 참석한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2012년 11월 1일 (목) 맑음

오후 2시 심상정 후보와 함께 전태일다리 명명식에 참석하다. 2001년 1월 1일 신년 기념행사로 전태일 열사가 산화해간 그 자리를 청소하고 장미꽃을 바쳤던 일이 기억난다. 그간 추진해온 사업 중 하나가 첫 결실을 맺어 감개무량하다. 그러나 전태일거리는 아직 공식 지정되지 못했고 전태일기념관은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전태일기념관이야말로 양대노총 1백만 조합원이 1만 원씩만 내어도 정부 힘 빌리지 않고 지을 수 있는데 민주노조운동 25년에 우린 아직 이걸 못하고 있다. 이럴 땐 과거 노동운동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2012년 12월 31일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자격으로 노회찬이 '박근혜 당선인께 드리는 공개서한'에 전태일은 158억 손배소 유서를 남기고 떠난 35세 노동자 최강서와 함께 등장한다.

"저는 방금 당선인의 트위터에 트위터 친구 한분을 소개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바로 최은우(@nannaya4260) 씨 입니다. 지난 21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씨의 친누나입니다. (…)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몸을 불사른 것이 당선인이 대학 1학년생이었던 1970년 11월의 일입니다. 그런데 42년이나 지난 지금 '법을 지키라'는 말을 하기 위해 두 달째 철탑 위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인님

더 이상 지켜만 보지 마십시오. 일부 힘센 자들이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을 짓밟는 현실이 더 이상 용인되어선 안 됩니다. 이번 대선 결과가 그들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하는 신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직 인수에 여념이 없으시겠지만 당선인께서 더 시급히 인수해야할 중요한 것은 바로 '생사의 기로에 내몰린 국민들'입니다. 법을 지키라는 노동자들의 절규, 23명의 희생자를 낳은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복직을 요구하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 고 최강서 씨 가족의 회한이야말로 당선인이 우선적으로 인수하고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고 최강서 씨는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고 했습니다. 불의가 만든 절망 앞에서 무릎 꿇고 항복하는 국민이 있는 한 '국민행복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당선인의 약속이 조속히 실현되길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4년 뒤인 2016년 12월 22일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정책토론회' 축사에서 노회찬은 "46년 전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지키자며 스스로 촛불이 됐습니다. 그때도 근로기준법 있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음으로 인해 전태일 열사의 항거가 있었습니다"라면서 "왜 대통령이 탄핵 됐습니까. 헌법을 위배했기 때문입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69조는 취임에 즈음하여 대통령으로 하여금 헌법을 준수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하도록 하고 있다.

2017년 11월 13일 노회찬은 모란공원 전태일 묘역 추모식에 참석, 최순영(전 민주노동당 의원), 김주영(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최종진(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직무대행) 등과 함께 전태일을 떠올리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 같은 날 청계천 전태일 동상 앞에서는 '노조하기 좋은 세상 운동본부'가 전태일 열사 47주기를 맞아 기자회견을 연다. 노동기본권과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정부와 재계에 촉구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노동 존중은 기만이고 껍데기"라고 선언한다.

▲ 전태일 열사 47주기 추모식. ⓒ연합뉴스

그로부터 1년 뒤인 2018년 11월 13일 오늘도 이전과 다름없이 모란공원에서는 '전태일 추모식'이 열릴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노회찬의 모습을 찾는 것은 이제는 어렵게 됐다.

마지막 만남이자 첫 만남: 마석 모란공원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모란공원은 최초의 사설 공동묘지라고 한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숨진 많은 넋들이 모여 있는 곳이자,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 못다한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1970년 11월 18일, 당시로는 외진 이 곳에 전태일이 묻힌 뒤부터 모란공원은 민주화의 상징공간이 됐다. 이소선 어머님은 아들이 모란공원에 온 이유를 "노동자들의 분노에 놀란 보안당국이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외곽에 아들을 묻길 종용해 모란공원까지 오게 됐다"고 했다.

늦봄 문익환 목사, 진보학계의 거목 김진균 교수,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전태일 평전을 펴낸 조영래 변호사, 용산참사 희생자, 삼성전자 노동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등 많은 분들이 민족민주열사묘역을 지키고 있다. 그 때문인지 모란공원 묘역은 1년 내내 추모식 행사가 끊이지 않고 열리고 있다. 이제 매년 7월 23일이면 또 한 사람을 기리는 추모식과 다짐의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7월 23일 돌연 세상을 등진 노회찬이 마석 모란공원을 영원한 휴식처로 삼은 것이다.

2018년 7월 27일 오전 국회영결식에는 3000여 명이 모였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줄 서서 노회찬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는 가슴 찡한 장면이 있기도 했다. 새벽 4시 서울 구로동을 출발하는 '6411번 버스'를 통해 고인이 말했던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에 속하는 분들이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48년 전 전태일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라는 내용의 일기(1970년 8월 9일)를 남겼다. 조영래는 "이 결단은 20여 년 동안 그가 겪어온 그 지독한 가난과 고통과 학대와 모멸을 벗어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면서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라고 적고 있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사업장에서 백혈병 및 각종 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조정합의가 이뤄졌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안을 사회적으로 공감시키고 그 해결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단체인 '반올림'과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KTX승무원들 역시 10여년의 복직투쟁을 마감하고 180여명이 코레일 사원으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입사한 뒤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을 믿고 일해 왔는데 자회사로 옮기라는 지시를 듣고 싸움을 시작한지 12년 만입니다. 오랜 기간 투쟁해 온 KTX승무원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2018년 7월 23일 서면발언으로 대체된 정의당 93차 상무위 노회찬의 모두발언 내용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노회찬은 우리 곁을 떠난다.

ⓒ노회찬재단준비위원회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다

전태일과 노회찬. 이 두 사람 모두 노동자와 서민, 약자들의 벗이자 먼 길을 함께 하는 길동무로 살다가 떠났다. 혹독한 노동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조영래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보고 바보라고 부르는 세상의 거꾸로 된 가치관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신이 가려고 하는 길이 절대로 그릇된 길이 아니라고 하는 강렬한 자기 확신의 표현이었다. (…)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택한 길은 인간의 길이었다."

노회찬의 한자 이름 '魯會燦'을 내 식대로 풀이하면, '어리숙하고 둔한(魯) 사람들이 모여(會) 세상을 빛낸다(燦)'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세상의 수많은 바보들, 목소리를 빼앗긴 투명인간들과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노회찬이 이루고자 한 꿈이었다.

"저에겐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선진복지국가로 나아가는 꿈입니다. 노동이 존중될 때 선진복지국가는 그만큼 빨리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노동존중사회를 만드는 데 이 몸 바치겠습니다."

짐작컨대 전태일이 선택한 '인간의 길'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전에 노회찬은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제가 써달라고 할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잘 놀다 간다', 이렇게 쓰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다시 묻는다면 그는 어떤 말을 들려줄까? 과연 그의 묘비명으로는 어떤 게 괜찮을까? 뜻밖에도 수줍음이 많았던 노회찬, 묘비명이 없어도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다.

전태일과 마찬가지로 이제 멈춰버린 노회찬의 꿈과 삶을 잇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일 수도 있다. 힘들고 지칠수록 함께 걸어갈 길동무가 되어 서로서로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으며 다들 후회 없이 잘 놀다 갔으면 좋겠다.

끝으로, '노' '회' '찬' 하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말 잘 하는 스타 정치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 같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성과힘 펴냄)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이런 세간의 상식과는 다른 말을 전한다.

"우리에게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말은 생각이에요. 노회찬 전 의원을 두고 '스타가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바보의 언어예요. 노회찬 전 의원이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요.(…) 노회찬 전 의원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언어를 쓰고 있었어요.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특별한 말들을 쓰고 있었어요. 뛰어난 언어였어요."

한때 엄청 다투는 사이였다가 당 활동과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를 통해 친하게 지내게 된 유시민 작가는 울음을 삼켜가며, "회찬이 형!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서 형을 좋아했어요"라는 추모의 글을 남겼다.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은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으며 잔잔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뭘까. 나만 그런 걸까?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하는 '좋은 사람' 노회찬이 멈춘 데서 다시,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려 한다. 고인과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여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의 벽돌을 하나씩 쌓아가고 있다. 내년 1월 공식 출범을 앞두고 있다. 지금 그를 만나고 싶다면 재단준비위원회 홈페이지를 잠깐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바로 가기 : 노회찬재단 준비위원회)

▲ '노회찬재단 준비위원회'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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