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미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12일(현지 시각) 북한의 미공개 미사일 기지 13곳의 위치를 파악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해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가 1면 머리기사로 최초 보도한 이후 국내외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NYT 보도 자체가 극히 편향된 것이다. 우선 기사 제목부터가 팩트와 맞지 않는다. 이 매체는 종이신문 머리기사에선 '북한의 은폐된 기지는 속임수를 시사한다(Hidden Bases In North Korea Suggest Deceit)'라고 썼고, 인터넷 판에선 '거대한 속임수(Great Deception)'라며 더 자극적인 제목을 뽑았다.
하지만 북한이 아직까진 속인 건 없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폐기 의사를 밝힌 대상은 동창리에 있는 서해 위성 발사시설이다. 그 외의 미사일 기지에 대해서는 활동 중단이나 폐기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신고도 하지 않은 상태이다. '속임수'나 '기만'과 같은 표현은 아직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NYT 보도는 전형적인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해당된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속임수를 쓰고 있고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이에 넘어가고 있다는 자신들의 선입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주관적 편향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매체는 CSIS의 분석을 주도한 빅터 차 석좌를 가리켜 "저명한 북한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가장 잔인한 독재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 자체가 품고 있는 편향성은 앞서 언급한 팩트와 동떨어진 기사 제목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잔인한 독재자" 김정은과 그를 만난 트럼프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 기자들의 구미에 맞는 취재원, 즉 빅터 차의 분석과 주장은 대단한 권위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빅터 차가 "저명한 북한 전문가"인지는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전문성은 차치하더라도 양심마저 부족한 인물이다. 빅터 차는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에 쓴 책에서 "북한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에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며 오바마 행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문했었다.
그의 조언이 먹혀든 탓인지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로 후퇴했고 그 결과는 북한의 붕괴가 아니라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비약적인 강화였다.
그는 또한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 NYT에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북한은 끝났다'는 제하의 글을 보냈다. "몇 주가 될지 몇 달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 정권은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김정은 정권이 멀쩡히 존재하자 빅터 차는 <중앙일보>을 통해 "북한의 붕괴에 대해 속단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가 12일 자 NYT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트럼프가 나쁜 거래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이라며, 그 거래는 "북한이 미국에 하나의 시험장과 몇 개의 시설을 폐기하겠다고 하면서 그 대가로 평화협정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거래를 두고 "트럼프가 어떤 전임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것을 얻어냈다며 승리를 선언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북한이 현 단계에서 요구하는 것은 평화협정이 아니라 트럼프도 한때 "축복"이라며 흔쾌히 서명하겠다고 약속한 종전선언이다.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한참 아래 단계에 있다. 그리고 김정은은 미국이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를 완화하면 북한도 빠른 속도로 비핵화를 해나가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가 종전선언은 계속 뒤로 미루고 대북 제재는 강화하면서 일이 꼬이고 말았다.
이게 팩트다. 그런데 빅터 차는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해 몇 가지 시늉만 하고 핵무기와 미사일 기지는 폐기하지 않으면서 미국으로부터 평화협정과 같은 큰 것을 받아내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트럼프가 여기에 동의한 것처럼 덧붙이고 있다.
물론 미국의 언론과 싱크탱크가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에 회의적인 분석과 전망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는 있다. 하지만 분석과 전망은 어디까지나 팩트에 기반을 둬야 한다.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트럼프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라는 자기만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을 뒷받침하기 위한 글쓰기는 소설의 영역에 남겨둬야 한다.
단언컨대, 한반도 비핵화의 속도가 늦어지고 불확실성이 커진 본질적인 이유는 트럼프 행정부가 할 바를 하지 않고 있는 데에 있다. 트럼프가 자랑하듯 밝혔듯이 북한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했고, 풍계리 핵실험장은 폐쇄했다. 동창리 기지도 영구적으로 폐기할 뜻을 밝혔다. 미군 유해 일부도 송환했다. 그런데 미국이 지금까지 한 것은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중단키로 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저명한 북한 전문가"라면, 그리고 미국의 양심을 대변하는 언론이라면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트럼프 행정부에게 신속한 상응조치를 요구하는 게 맞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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