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이 "겁 난다"는 동네 정치 실상

[장석준 칼럼] 사립 유치원 사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

몇 년 동안 내가 사는 동네의 참여예산위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동 위원으로 시작해 어쩌다 보니 구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뜻깊은 경험이었다. 건너 듣거나 막연히 짐작만 하던 동네 정치 현실을 생생히 접할 수 있었다.

우선 눈에 띈 것은 참여하는 이들의 평균 연령이 너무 높다는 점이었다. 남녀 불문하고 대개 50~60대였다. 마흔이 넘은 내가 "젊은이” 소리를 들었다. 그나마 평균 연령을 낮추는 데 공헌하는 집단은 30~40대 주부들이었다.

다음으로 인상적인 것은 직업군이 대단히 제한돼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정해진 규칙이라도 있는 듯, 몇몇 직업군이 위원 목록을 거의 다 채웠다. 위원 명단의 '직업'란만 봐도 대한민국 대도시의 지역 유지가 보통 어떤 사람들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 규모가 큰 사립 유치원 원장이었다.

사실 돈도 안 되는 일에 아낌없이 시간을 내 참여했으니 일단은 칭찬부터 받고 볼 일이겠다. 드높은 시민 정신의 발로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런 시민 정신이 유독 지역사회 안의 몇몇 직종에서만 지나치게 꽃을 피우니 이는 분명 이 나라 동네 정치가 뭔가 크게 잘못돼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사립 유치원 문제, 왜 이제야 터졌을까

최근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사립 유치원 감사 결과를 일부 공개하면서 사립 유치원 문제가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부의 누리과정 지원금을 원생들이 아니라 원장 일가의 호의호식에 쓴 각종 비리가 밝혀졌다. 이를 계기로 누리과정 지원금 지급 방식을 바꿔야 한다거나 사립 유치원을 공립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등 개혁 여론이 들끓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사립 유치원 문제가 왜 이제야 쟁점이 됐을까? 한국 사회에서 사립학교 재단이 교육 말고 주로 어떤 일에 골몰해왔는지 떠올려 보면, 사립 유치원 문제의 뿌리가 어떠할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아니, 그렇게까지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좋다. 누리과정 지원금 제도가 실시된 지 벌써 몇 년이 된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며 시작됐으니 말이다. 이 지원금이 애먼 데 흘러들어가는 문제를 발견하고 시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야 실상이 분명히 드러나고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사립 유치원 감사 결과를 공개한 박용진 의원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뒤에 꺼낸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대중 정치가로서는 더 없는 호재일, 화제의 주인공이 됐음에도 박 의원은 "솔직히 겁이 난다"고 했다. 사립 유치원 원장들이 지역구에서 수백 표를 움직이는 큰 손들인데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당장 2년 뒤 총선이 걱정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용진 의원은 그럼에도 과감히 생활 속 적폐와 싸우는 쪽을 택했으니 참으로 용기 있다 하겠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는데도 "용기"까지 동원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거기에는 내가 목격한 이 나라 동네 정치의 실상이 버티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이나 지방자치단체장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도, 광역의원도 단순다수대표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는 소선거구제로 뽑고 있다. 선거구마다 한 명의 최다 득표자를 당선자로 만드는 방식이다. 기초의원만은 중선거구제로 선출한다지만, 양대 정당 구도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대다수 선거구가 2인 선거구이므로 실상은 가면 쓴 소선거구제에 불과하다.

이런 소선거구제에서는 남보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후보가 승자가 되고 나머지 후보들에게 던진 표는 모조리 사표가 된다. 승자는 단 한 명이고, 승자와 패자들 사이의 차이는 깊고도 멀다. 그리고 이 피 말리는 승패가 오로지 4년에 한 번씩 있는 지역구 선거에 달려 있다. 그러니 웬만한 정치인이라면 자기가 속한 정당의 이념이니 정책이니 하는 것보다는, 혹은 나라 전체의 미래보다는 지역구 동향에 더 골몰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정치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게 일상적으로 지역사회 여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나 집단이다. 이를테면 지역 유지들이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일수록 이런 이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대도시에서도 구시가나 오래 된 주거지에서는 사정이 비슷하다. 주민자치위원이나 참여예산위원 명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책이 이들 지역에서는 승자독식선거의 당선자를 결정하는 사실상의 선거인단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양대 정당은 지역구 조직을 꾸리면서 이런 인사들부터 조직한다.

물론 대도시 아파트 단지나 신흥 주거지로 가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이런 곳에서는 전통적인 지역 유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뿐더러 그런 이들이 영향을 끼칠 여지도 적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역구 유권자들의 지지를 손쉽게 조직하려는 정치인들의 욕망까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낮에는 철옹성처럼 잠겨 있다 밤이 돼야 비로소 환해지는 아파트 단지 불빛을 바라보며 저 중에 도대체 내 표는 얼마나 될지 답답해하지 않을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깜깜할수록 뭔가 의지할 바를 더 찾는 법이다.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통로가 막혀 있을수록 정치인들은 그런 통로 비슷한 무엇이라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나마 주민 중 일부라도 모이는 예외적인 공간, 그러니까 교회 같은 곳에 의지하게 된다. 혹은 실제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 영 미덥지 않아도 어쨌든 아파트 주민회나 부녀회 간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기성 양대 정당이 동성애 혐오나 아파트 값 인상에 미련을 버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정치인들은 상당수 주민과 접촉할 꼭짓점 구실을 할 만한 직업군에 공을 들인다. 오래 된 주택가에서는 부동산(이라기보다는 복덕방)이나 미장원이 그런 꼭짓점들이었지만, 아파트 단지에서는 이들마저 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더욱더 소중해지는 게 큰 규모의 사립 유치원 같은 곳이다. 지역 정치인들은 이런 곳을 통해 수백 명 단위의 주민과 접촉하려 한다. 아니,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유치원 원장이 학부모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특히 촛불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원장 선생님'이 찍으라고 하여 찍을 젊은 학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장 선생님'이 실제 그런 힘이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지역구 선거에 운명을 건 정치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서 모든 시민이 평등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먼저 신경 써야 할 시민들이 있다.

그러니 이렇게 '더 평등한' 시민들이 연루된 부정이나 비리가 어떻게 정치 세계에서 의제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박용진 의원은 감히 이 직업 규칙을 깨뜨렸다. 그는 사립 교육기관 개혁을 지지하는 여론이 90%에 육박하게 만드는 쾌거를 이룩했지만, 그런 그조차 "겁이 난다"고 말한 다음 선거 결과가 어떨지는 여전히 가늠하기 힘들다.

사립 유치원 문제 역시 선거제도 개혁으로 통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번 사립 유치원 문제 역시 그 해결 방안이 결국 선거제도 개혁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믿는다. 물론 당장은 사립 유치원 재정 운영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고 누리과정 지원금 제도를 손보는 게 중요하다. 공립 유치원 확충 계획을 수립하고 하루빨리 시행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을 근본 대책 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현행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혁파다.

선거제도 개혁 방안 가운데에는 위에 지적한 기존 정치 관행과 단절하기 위해 1인 선출 지역구를 아예 없애자는 주장도 있다. 스웨덴처럼 여러 명의 당선자를 내는 대선거구를 두고 이 대선거구별로 순전히 정당명부비례대표제에 따라 의원을 선출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역구에서 최다 득표자가 되려고 모든 후보가 지역 유지나 이익단체 눈치만 보는 일은 없어질 것이다. 여전히 그런 데 골몰하는 정당도 있겠지만, 이제껏 지역사회에서 투명인간 취급 받던 이들에게 다가가고 이를 통해 당선자를 배출하는 정당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소선거구제의 뿌리가 워낙 깊다 보니 이렇게 급격히 단절하기는 힘들다는 목소리가 많다. 실은 이를 고려한 대안이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다. 이는 현행 1인 선출 지역구를 그대로 두되 비례대표 의석을 활용해 정당 지지율만큼 전체 의석을 나누는 방안이다. 현재 한국에서 선거제도 개혁을 주창하는 이들 중 대다수가 동의하는 대안이 이 연동형 비례대표제다.

이 제도 아래서는 기존의 지역 정치 관행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구 최다 득표자를 가리는 경쟁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역사회 실력자들의 눈치만 보거나 이들과 절대 척지지 않으려는 정치 행태는 지금보다 많이 약해질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설령 지역구 최다 득표자를 가리는 게임에서 승리하지 못할지라도 시민들의 대표가 될 수 있는 다른 통로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연동형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이에 더해 사립 유치원 감사 결과를 공개하는 것과 갚은 일을 하려는 의원을 정치적 부담이 아니라 오히려 자산으로 여기는 정당(들)이 있다면, 국회 구성이 지금과 확연히 달라진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규칙에 따라 지역구에서 최다 득표자가 돼 의원이 되는 이들도 있겠지만, 수많은 '박용진'들을 정치적 무기로 삼은 정당의 비례대표명부를 통해 당선되는 이들도 이에 버금갈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이번 사립 유치원 문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 하더라도 더는 "겁을 낼"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제도에서는 한 후보가 지역구 선거와 비례대표 명부에 동시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지금과는 다른 시선으로 봐야 한다. 이제껏 선거제도 개혁 논의에서 '석패율제'라 불린 이 방안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정치인을 회생시켜주는 꼼수쯤으로 취급받았다. 물론 어떤 정당에서는 그런 이들이 다수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정당에서는 이 제도가 수많은 '박용진'들을 배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더 이상 '용기'씩이나 동원하지 않고도 제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 철모르는 단체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해대고 있다. 언론에서 이를 접할 때마다 우리 입 속에서는 저들에게 돌려주고 싶은 말들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그런 대답들 중에서 우리가 반드시 빠뜨리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혁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다.


▲ 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 주최로 열린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 사립 유치원 회계부정 사례를 중심으로'에서 박 의원이 토론회 개최를 반대하는 한국유치원총연합회 회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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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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