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냉전 '안전핀' 뽑으려는 트럼프, 왜?

[정욱식 칼럼] INF 조약마저 사라지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 시각) '중단거리 핵미사일 폐기 조약(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NF treaty)' 파기 카드를 던졌다. 그는 "러시아 정부가 합의를 위반했다"며, "우리는 협정을 파기하고 탈퇴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이번 주에 러시아를 방문해 미국의 INF 파기 계획을 통보할 것으로 보인다고 미국 언론들이 전하고 있다. 볼턴은 미국 내에서 대표적인 INF 조약 탈퇴론자였다. 이번 트럼프의 발표에 그가 깊숙이 관여했다고 미국 언론들이 전하는 까닭이다.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INF 조약은 사거리 500~5500km의 지상 발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의 보유·실험·배치를 금지하고 있다. (공중 및 해상 발사 미사일은 허용). INF 조약은 미소간의 신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에 체결됨으로써 신데탕트 시대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특정 무기의 완전한 폐기를 명시함으로써 평화로운 냉전 종식을 가능케 한 이정표로 평가받아왔다.

이에 따라 이 조약마저 사라지면 냉전 부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공산이 크다. 다만 트럼프의 발표로 이 조약의 파기가 공식화된 것은 아니다. 조약문 15조 2항에 따르면, "당사국은 특수한 상황 발생으로 자국의 최고의 이익이 위태롭다"고 판단되면, "특수한 상황이 자국의 최고 이익을 침해하는 사유를 적시한 입장을 상대국에게 통보해야" 한다. 6개월 전에 이러한 조치가 이뤄져야 하며 조약의 공식적인 파기는 통보 후 6개월 후부터 적용된다.

따라서 볼턴의 이번 방러 때 공식적인 파기 통보가 이뤄질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만약 볼턴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다면, INF 조약은 내년 4월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 20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네바다주 유세를 마치고 엘코 공항에서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왜 탈퇴 선언을?

트럼프가 밝힌 탈퇴 선언 사유는 "러시아는 여러 해 동안 조약을 위반해 왔다"는 인식에 있다. 실제로 미국은 2011년부터 러시아가 순항 미사일을 개발하는 등 이 조약을 위반해왔다고 주장해왔다. 오바마 행정부는 여러 차례 러시아에 경고를 보냈지만, 오히려 러시아는 미국도 위반하고 있다며 맞불을 놓았다.

러시아의 논리는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제(MD) 실험에 요격 대상 미사일을 동원했는데, 이 미사일이 INF 조약이 금지한 미사일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의 주장이 물타기에 불과하다며 일축했지만, 미국 주도의 MD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의 공세는 계속되었다.

그 이후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전에 개입하고 크림반도마저 병합하자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강공책으로 일관했다. 경제제재를 주도하는 한편, 2015년 이란 핵협정 타결에도 불구하고 유럽 MD를 강화해나간 것이다. 그러자 러시아는 유럽 MD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중단거리 미사일 개발·배치 경고로 맞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을 쌓고 싶다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미러 관계는 새로운 조정기로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이 미국 정계를 강타하고 트럼프를 제외한 미국 고위직이 '미국의 주적은 러시아'라고 주장하면서 미러관계는 회복되지 못했다.

더구나 트럼프는 러시아와 중국을 향해 "군비경쟁을 해볼 테면 해보자. 우리가 이길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이 와중에 지난해 말에 발표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가리켜 국제질서의 변경을 추구하는 "수정주의 세력"으로 못 박았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의 INF 조약 탈퇴 발표의 배경에는 중국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크다는 데에 있다. 일단 중국은 이 조약의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지상 발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의 개발·배치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일각에선 이 조약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측면이 강하다는 불만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작년 4월 상원 청문회에서 당시 태평양 사령부 사령관 해리 해리스(현 주한미국대사)는 "중국이 INF 조약의 당사국이었다면 중국 미사일 전력의 약 95%는 이 조약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고 주장하면서 "미국은 러시아와의 INF 조약에 의해 (중국과) 상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중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역시 탈퇴 의사를 밝히면서 중국을 거론했다. "러시아가 (INF 조약이 금지한 무기를) 만들고 중국도 만들고 있는데 우리만 조약을 준수한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중국도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면 미국도 지상 발사 중단거리 탄도 및 순항 미사일을 본격적으로 개발·배치하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신냉전이 현실로?

하지만 러시아가 INF를 대체할 조약 체결에 동의할지는 극히 불확실하다. 기실 INF 조약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경고는 러시아 쪽에서 먼저 나왔었다. 미국에 비해 재래식 군사력이 크게 뒤지고 미국이 MD에 박차를 가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중단거리 미사일을 이러한 열세를 만회해줄 '이퀄라이저'로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은 어떨까? 태평양과 대서양을 양쪽에 끼고 있고 주변에 군사적 위협을 가할 나라가 거의 없는, 그래서 지리적으로 요새화된 미국과 달리, 중국은 인근 지역에 적대적, 경쟁적 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한 미국에 비해 해상 및 공중 공격 능력과 전략 미사일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중단거리 미사일 폐기 조약에 동의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면, 이미 불붙은 미·중·러의 군비경쟁은 더욱 첨예해질 공산이 크다. 미국의 전략무기 신봉자들이 중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조약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들 나라의 위협을 MD 보고서에 명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미·소 간의 데탕트는 1972년 탄도미사일 방어(ABM) 조약 체결에서 비롯됐다. '방어용'인 MD 구축을 자제키로 함으로써 '공격용' 무기도 제한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신데탕트 및 냉전 종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INF 조약과 그 이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은 그 대표적인 성과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2001년 12월에 ABM 조약에서 탈퇴를 선언했고 이듬해 6월에 "국제 평화와 안정의 초석"이라고 불렸던 이 조약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그리고 미국이 이번에는 INF 조약 탈퇴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심지어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의 운명도 불안해지고 있다. 2021년 2월로 만료 시한이 다가오고 있는데 미러간에 협상 시도 자체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체로도 큰 문제이지만, 우리에겐 그 위험성이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분단과 함께 시작된 한반도의 운명은 냉전과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탈냉전과 강대국들 사이의 냉전 부활이 교차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말이 있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문재인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한 말이 아닐까 한다.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두려워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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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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