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진 1명과 진보교육감 14명 시대

[기자의 눈] 유치원 비리, 부끄러워하는 교육감을 기다린다

"우리 학교는 '무늬만 강남'이에요."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이 재직 시절 자주 들었다는 이야기다. 강남 지역 교장들이 교육감을 만날 때면, 으레 하는 말이었단다. 학교 위치만 강남 지역일 뿐, 여건은 열악하다는 호소다.

그때마다 곽 전 교육감은 숫자를 확인했다. 해당 학교의 중식 지원 비율이다. 당시는 무상급식 실시 이전이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학교가 중식 비용(점심 급식 값)을 지원했다. 강남 3구는 중식 지원 비율이 '0%'였다. 반면, 서울의 한 학교는 그 숫자가 '73%'였다.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의 비율이 100명 가운데 73명꼴이었다. (<징검다리 교육감>(곽노현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참조.)

"부끄러움의 문제"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의 처지가 이렇게 달랐다. '요즘 급식비 못 내는 애들이 얼마나 된다고'라며,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이들이 있었다. 반면, 서울의 어떤 학교에선 급식비 내는 아이들이 '소수자'였다.

어렵다고 호소하는 교장에게 중식 지원 비율 현황을 보여주면, 대부분 잠잠해졌다고 한다. '무늬만 강남'이라던 학교는, 대개 '역시 강남'이었다.

'역시 강남' 학교인들, 어려움이 없을 리는 없다. 누구에게나 제 손톱 밑 가시가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다. 다만, 심장이 뜯겨 나간 이들 앞에선, 그런 내색을 하면 안 된다. 이런 문장 뒤에 따라올 말. <미스터 션샤인> 시청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건, 부끄러움의 문제거든."

'무늬만 강남'인데, '진짜 강남' 취급 받아 억울했다는 교장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움을 느꼈으리라고 믿는다. 중식 지원 비율이 '0%'인 학교가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그 비율이 '73%'인 학교는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작은 부끄러움들이 쌓여,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 보수 쪽에서도 복지 확대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조차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고 이야기 했었다. 이런 흐름을 가로막았던 정치인들은 자리에서 내려왔다.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전 교육부 장관),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등 초기 진보 교육감들의 큰 공로다.

진보 교육감 14명 시대, 왜 이토록 조용한가?

그리고 이젠, 교육행정만큼은 진보가 주류다. 무상급식 논쟁으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물러난 뒤 치러진 지난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의 약진은 눈부셨다. 17명 가운데 13명이 넓은 의미의 진보 성향이었다. 올해 지방선거에선 그 수가 더 늘어서, 17명 가운데 14명이 진보 성향이다.

진보 교육감이 압도적 다수가 된 지, 8년째. 새로운 의제로 무엇이 나왔나? 무상급식, 혁신학교, 학생인권 등은 모두 최초의 진보 교육감이 지난 2009년에 내놨던 것들이다. 진보교육감이 한 명이던 시절 나왔던 의제들이 한국 사회와 정치를 뒤흔들었다.

그런데 17명 가운데 14명이 진보 교육감인 지금은 오히려 조용하다. 교육감이 교육 내부에만 집중해야 한다면, 굳이 주민 직선으로 뽑을 필요가 없다. 좋은 교육은 좋은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좋은 사회를 열망하는 시민이 교육감도 뽑는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직후 시민의 분노와 열망을 등에 업고 당선된 다수 진보 교육감들은 그저 교육행정 안에만 갇혀 있다. 진보 교육감 14명 시대가 1명 시대보다 조용하다.

심지어 교육행정 안에서도 진보 색채는 희미했다. 교육에서 공공성을 확대하는 게 진보의 신념인데, 사립 유치원 비리에 대해선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 이 문제를 공론화한 건, 교육위원회에 처음 배치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었다. 진보 교육감 입장에선 참담한 일이다.

사립 운영의 투명성과 민주성, 진보 교육의 오랜 화두였는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육운동 진영의 오랜 화두가 사립학교 운영의 투명성과 민주성 확보였다. 이 문제로 긴 싸움을 했고, 큰 희생을 치렀다. 요컨대 사립 기관의 비리는 진보 교육 진영에겐 아주 익숙한 문제였다. 이런 활동을 했던 이들이 대거 포진한 교육청에서 사립 유치원 비리를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유착 의혹까지 불거졌다.

맑은 물도 고이면 썩는다. 너무 조용한 진보 교육감 14명, 지금이 기회다. 박용진 의원의 말처럼, 사립 유치원을 향한 분노는 곧 진보 교육감들을 향할 수 있다. 그 전에 교육감들이 움직여야 한다.

아울러 교육 밖으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무상급식은 그저 교육 내부 문제가 아니었다. '보편적 복지'라는 큰 기획의 일부였다. 무상급식은, 교육 의제가 사회를 바꾼 사례였다. '제2의 무상급식' 역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사립 유치원 비리는 공공성, 민주성, 투명성 등 진보 교육 진영이 오랫동안 내세웠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웠다. 이는 진보적 가치에 바탕한 새로운 교육 의제가 다시 학교 밖 사회를 움직일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마침,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학교 밖 청소년에게 '교육기본수당'을 지급한다는 계획을 17일 내놨다. 교육청의 관심사가 학교 안 교육에만 갇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부끄러워하는 진보가 늘어야 세상이 바뀐다


100명 가운데 73명이 급식비를 못 내는 학교가 서울에 있었다는 걸, 몰랐던 이들이 많았다.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래서 세상이 조금 달라졌다.

공공성, 민주성, 투명성 등 진보적 가치가 보육 현장에선 이토록 짓밟혔다는 걸, 뒤늦게 안 이들이 많다. 부끄러워하는 진보 인사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나마 바뀐다.

▲ 지난 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열린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토론회 개최를 반대하는 한국유치원총연합회 회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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