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정부, '시민 복지 기준'을 세우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 지자체는 생활임금 도입

최저임금 인상이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인인 것처럼 끌고 가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보수 야당은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모든 것인양 일반화하면서 정책을 폐기하라고 주장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억눌려 있던 최저임금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인상폭을 높인 것이 자영업자와 중소기업들에게 정책 리스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경제 정책의 정상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불가피하게 정부 정책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은 실태 조사 등을 통해 맞춤형 지원 방안을 개발해서 불이익을 최소화하면 될 일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정부 정책을 일일이 살펴볼 수 없는 자영업자라면 몰라도 보수 야당의 주장은 그래서 석연치 않다.

'소득주도성장론'은 "가계소득을 늘려서 소비와 투자를 높이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경제성장 이론이다. '임금주도성장론'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복지국가 모델이 확산되면서 보편적 복지 정책을 통해 가계 지출을 낮추고, 실제로는 가계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주는 개념까지 포괄하고 있다. 보수 야당과 일부 자영업단체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최저임금 인상을 문제 삼으려면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또 다른 축인 각종 복지 정책도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폭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복지 정책도 줄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 노동 정책과 복지 정책은 동전의 양면이기도 하고, 패키지로 연결된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임금을 낮추고 기업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 투자와 수출을 촉진하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이론이 '수출주도성장론'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까지 대기업과 수출기업 중심의 성장론에 맞춰 경제 성장을 해 왔다. 그 시대는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돈이 없던 시절이라 불가피하게 국가가 주도하는 수출주도성장 정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희생해야 했던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잘 알고 있는 바다. 70~80년대의 국가주도 경제성장 시기가 지나가고, 외환위기(90년대)와 금융위기(2000년대)를 넘어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에서 수출주도성장론은 이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 정부가 발표한 소득주도성장 지원 정책. ⓒ기획재정부

세계가 소득주도성장론을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추세는 어떨까? 2012년을 기점으로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통화기금(IMF),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소득주도성장론에 있어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ILO는 2012년에 "저성장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소득주도성장을 주목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성장론을 확대하자"는 것이 골자다. OECD와 IMF도 거들고 나섰다. OECD는 2014년에 "소득불평등 해소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소득불평등이 심각할수록 그렇지 않은 나라보다 성장률이 떨어진다"면서 "소득불평등이 단일 변수로는 성장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고 강조했다. 같은 해 IMF도 "부유층에 소득이 집중되는 현상은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 성장도 가로 막고 있다"면서 "정부의 재분배 정책이 성장 잠재력을 훼손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서 "불평등 축소를 위한 재분배 정책은 고성장과 더 긴 성장 지속력을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모두가 소득주도성장론으로 귀결된다.

이제 우리나라 상황을 들여다보자. 한국은 국가 투자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올해 발표한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5308억 달러로 세계 12위를 차지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만8380달러로 순위가 무려 14계단이나 상승했다(세계 31위). 국민소득은 곧 3만 달러를 넘어서고, 2030년에는 5대 경제 강국이 된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그런데 왜?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는 나아지지 않는 걸까? 2000~2017년까지 우리나라 경제는 89.6% 성장했다. 그러나 평균 가계 소득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31.8% 증가에 그쳤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를 통과하면서 가계로 분배되는 몫이 더 줄었기 때문이다. 소득불평등과 사회양극화가 더욱 심각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 카드를 꺼낸 이유는 수출주도성장 정책에 비해서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직접 예산을 투입하면 빠른 시간 안에 경기를 부양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수출주도성장 정책은 민간 기업이 투자를 결정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인력을 채용하고, 이윤을 만들고, 이를 다시 분배하는 과정에 있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나마 제대로 분배한다는 보장도 없다. 경기가 좋을 때는 몰라도 성장률이 둔화될 때는 국가가 개입하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시민 복지 기준의 등장, 지역에 맞는 복지 정책을 수립하는 도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문제가 있다.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통해 가계에 보탬을 준다 하더라도 '어느 지역에 거주하는가'에 따라서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 지역별 물가 차이와 생계비 수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부 정책은 농어촌을 포함해서 대도시까지 전국 평균을 기준으로 지원한다. 지역별 경제조건이나 주민들의 상황을 일일이 반영할 수 없다. 지역마다 소득 수준도, 주택 가격도, 아이들 교육에 필요한 비용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가 먼저 나섰다. 박원순 시장이 '서울시민 복지 기준(2012)'을 발표했다. 소득과 돌봄, 주거, 건강, 교육 등 5개 분야를 중심으로 정부 정책의 한계를 보완하고 지역 경제 규모에 적합한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를 시작으로 비슷한 고민을 해오던 부산과 대구, 대전, 광주, 세종 등 다른 도시들도 잇따라 시민 복지 기준을 도입했다.

▲ 울산시청에서 울산시민복지기준 마련 제1차 시민공청회를 진행하고 있다. ⓒ울산시민연대

필자가 활동하는 울산도 수출주도성장 정책이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경제위기와 마주서야 했다. 울산은 조선과 자동차, 석유화학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공업도시다. 하지만 2016년에 나타난 조선산업 위기 이후 시민들은 혼란 속에 빠졌고, 실업률과 실업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공단 지역 주택가는 사람들이 빠져 나가고 있다. 노동자 가계 지출이 줄면서 자영업자들도 잠재적 빈곤층이 되었다. 지역 상황에 맞는 사회안전망 구축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필자가 활동하는 울산시민연대는 이와 같은 상황을 조사·분석하면서 울산도 '복지정책의 지방자치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기업과 지자체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나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울산 시민 복지 기준의 시너지

울산시민연대는 분야별로 교수, 정책연구원, 보건의료전문가, 교사, 사회복지사 등 21명을 사업단으로 구성해서 앞서 시민 복지 기준을 수립한 도시들의 연구 보고서를 분석했다. 대개는 지역 특성과 시민들의 욕구를 고려한 맞춤형 지역복지 정책을 연구하고, 생애 과정과 생활 환경에 적합한 사회보장 시스템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어서 울산지역 통계자료를 분석하고 필요한 정책과 사업들을 모색해 토론회를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울산시가 이러한 정책 제안을 받아 울산 시민 복지준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울산도 대기업이 사회·경제 전반을 책임지는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중앙 정부 정책으로 부족하다면, 지방 정부가 보완하면 된다. 예를 들어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해도 울산에서 거주하기에 부족하다면, 울산 시민 복지 기준을 통해 공공 분야부터 생활 임금을 도입하고 민간으로 확대해 나가자. 소득주도성장 정책과 울산 시민 복지 기준의 시너지를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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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복지국가 만들기에 직접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복지 주체 형성'을 목표로 2012년에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기초연금 강화, 부양의무제 폐지, 지역 복지공동체 형성, 복지국가 촛불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은 열린 시각에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복지 논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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