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한국 카르텔', 약자를 위한 정치는 어디 있나?

[최창렬 칼럼] 개혁 동력 약화와 정치개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필연적 귀결인 사회적 양극화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득 불평등이나 고령화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 문제를 보편적인 지구적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미래에 도래할 수 있는 위험이 너무 크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고령화 속도, 저출산, 상대적 격차의 증대 등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그늘이라고 방치될 수 없는 부분이다.

공동체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논의의 동력 자체가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게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시민의 자율성에 기반하면서도 공동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적 원칙이 작동될 수 있다면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적 능력과 제도화의 수준으로 볼 때 이는 공허한 기대다.

지난 정권의 집권세력이었던 자유한국당은 아직도 국정농단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하지 않은 채 수구세력의 결집을 위한 반격의 기회만 노리고 있다. 경제·문화 등 다른 영역은 물론이고 정치도 늘 보아왔던 프레임에 갇혀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인 한반도 안보지형 변화와 평화체제 구축도 냉전적 사고에 젖어있는 한국당 등 수구세력에게는 자신들의 입지를 좁히는 이벤트로 비칠 뿐이다.

시민적 조직화도 박근혜 탄핵 때와 같은 동력을 찾기 어렵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변하지 않았듯이 문재인 정부 집권 이후의 사회의 구조적 변동 역시 찾을 수 없다. 한국사회의 모순이 구조적이므로 새 정권 출범 1년 남짓 기간 동안 변화를 감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시민들의 촛불이 요구했던 성장 만능 시대가 결과한 사회적 부조리 혁파의 모멘텀을 발견하기에는 그리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본질적 문제는 집권세력과 수구적 야당 모두 기득권이거나 기득권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정치의 골격은 집권세력 측과 제1야당의 극단적 대립이 상호 대척적 세력의 안위를 보장하는 '적대적 공존'의 구조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이 여야의 고질적 대립 구조의 혁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 역시 헛된 기대였다.

경제지표의 악화가 개혁의 명분을 약화시키고 개발독재 시절 배태되었던 사회적 게임의 불공정과 불평등도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사회가 지향할 가치와 의제들을 구성하고 이에 대한 시민의 공론화 과정이 정치과정에 투영되는 정치과정이 작동되지 않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특정 이슈가 제기되면, 여야는 사활적 정쟁에 몰입하고 언론은 이에 대한 자극적 보도로 상황은 비등점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내 다른 이슈가 등장하면서 이전의 상황의 결말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슈가 이슈를 덮는 블랙홀의 정치가 한국정치를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 주권자인 국민은 국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누가 더 기득권에 집착하고 덜 정파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고 믿는다. 자유한국당의 냉전적 사고와 수구적 사회관의 변화를 바라는 것은 연목구어다. 한국당의 정치행태는 21대 총선에서 민의의 심판에 맡길 일이다.

정치가 사회적 의제를 고민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결국은 선거제도의 개혁이다. 사회적 소수와 시민들의 개혁적 의제를 대표하고 이를 반영하여 실질적 민주주의로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구조를 가능케 하는 정치개혁이 사회개혁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촛불정부라는 문재인 정권의 집권여당과 자유한국당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다. 겉으로는 명분상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공감한다고 하지만 관철시킬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선거제도, 즉 단순다수제와 소선구제가 여야 거대정당의 카르텔 구조를 가능케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대적 공존은 그들의 오랜 기득권을 공고히 해 오지 않았는가. 보수적 지향의 한국당은 보수정당답게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고자 한다고 치부해도 더불어민주당의 이러한 태도는 촛불민심에 반하는 것이다.

촛불민심이 선거제도의 개혁이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으나 사회적 하위계층이 과소대표 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를 가능케 하는 제도화가 필수다. 입법을 통하지 않고는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시민들의 조직화를 통한 변화를 기대했으나 동력이 떨어진 현 단계에서 다시 국회의 개혁 성향을 추동하는 길은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새로운 세력의 진입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의 이해는 대표되지 않는다. 양당제냐 다당제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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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렬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다양한 방송 활동과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 정치를 날카롭게 비판해왔습니다. 한국 정치의 이론과 현실을 두루 섭렵한 검증된 시사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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