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홍근 회칼테러 30년, 군사문화는 병영으로 돌아가야

[특별좌담] 한홍구·김종대·오홍근, 아직도 청산해야만 할 군사문화

언론인 오홍근은 1968년 TBC보도국 기자(중앙매스컴 5기, 현 JTBC의 전신)로 입사한 후 TBC가 강제 통폐합되자 중앙일보로 옮겨, 사회부장, 부국장, 판매본부장(이사·상무) 등을 거쳤다. 30여 년동안 언론인으로 재직했다.

1988년 8월 6일 아침 7시 반쯤, 중앙경제 사회부장이었던 오홍근은 출근길에 일단의 괴한들로부터 회칼 테러를 당했다. 허벅지가 길이 34cm, 깊이 3~4cm 가량 찢기는 중상을 입었다. 국방부 수사 결과 이 사건은 정보사령부 예하부대 현역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오홍근 부장이 월간중앙 88년 8월호에 기고한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라는 제목의 칼럼에 불만을 품고 테러를 자행했다. 이 테러를 지시한 이규홍 준장과 권기대 참모장은 사건을 은폐했고, 당시 정보사령관이었던 이진백 육군 소장도 사건을 묵인 은폐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진백 소장은 이 사건으로 보직 해임 후 예편 조치됐다.

이진백 소장의 친형은 이진삼 전 국회의원. 역시 1985년 정보사령관으로 재직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 등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그러나 이진삼은 단죄받기는커녕 보수 정당인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까지 지낸다. 이명박 정부 시절 이야기다.

이진삼은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 지원 유세에 나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빨갱이 나라가 된다"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테러리스트가 국회의원이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 '청산'됐어야 할 '군사문화'는 아직 살아있다.

군사문화는 병영 안에 있어야 한다. 탈영한 군사문화는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난 우리의 현대사가 군사문화의 폐해를 가감 없이 보여준 사례이다. 이에 30년 전인 1988년 8월 6일, 군사문화를 비판적으로 다룬 한 언론인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던 날을 맞아 군사문화란 무엇이며, 우리 사회에서 군사문화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짚어보고자 이 특별 좌담을 기획하였다.

이 특별좌담은 메디치미디어가 펴낸 오홍근의 책 <펜의 자리, 칼의 자리>에 전문이 수록된다.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일부를 싣는다. 오는 8월 6일 오후 5시 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는 '오흥근 테러 30년, 군사 문화는 청산되었나'라는 제목으로 세미나가 열린다. 올해는 '회칼테러' 30년을 맞는 해다. 편집자

좌담자 :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김종대(정의당 의원), 오홍근(언론인, 전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1988년 9월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4가 종로성당에서 열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장 문익환 목사) 주최 '군사문화 종식과 백색테러 추방을 위한 시민 공개 토론회'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은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군사문화종식과 백색테러 추방을 위한 시민토론회를 갖고 오홍근 씨의 테러와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 군사문화 청산, 양심수의 전원석방 등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고 기록했다. ⓒ노무현사료관

기무사의 '쿠데타 계획'...아직도 군사 문화는

김종대 : 여기 오홍근 선생 테러 사건처럼 국군 정보사령부가 군사문화 청산 칼럼을 쓴 기자에게 식칼 테러를 한 사건이 있습니다. 30년이 지난 뒤에도 군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병영을 나와 민간인 세상을 넘보고 있습니다. 국군 기무사령부가 사실상의 계엄령 선포에 준하는 병력 동원 조치를 세워 놓고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사 문제만 30년 넘게 봐왔는데요. 이건 일반적인 기무사 업무가 아닙니다. 이게 기무사 업무가 되려면 계엄령 선포와 합수부 설치가 필수입니다. 그런 틀을 짜고 사실상의 쿠데타 계획을 세운 겁니다.

그, 왜, 1980년에 전두환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런 무소불위의 합수부와, 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기무사를 상정한 구체적 실행 계획입니다. 이 사람들 참 큰일 낼 사람들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군대가 민간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제도화해야 합니다. 저는 이게 핵심이라고 봅니다. 현재의 대통령이 과연 그런 의지가 있는지 저는 그게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봅니다.

한홍구 : 저는 대한민국이 이미 군사 쿠데타가 가능하지 않을 만큼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전두환도 계엄 선포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실행할 수 없었죠. 계엄령이란 것은 촛불 시민들에게 탱크 몰고 돌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시민들이 강력 저항하면 1980년 광주보다 훨씬 규모가 큰 유혈 참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질 게 명약관화데, 누가 감히 그 뒷감당을 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겠노라 자신하겠습니까? 박정희, 전두환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보니 다른 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킬까 두려움이 컸고, 그것이 보안사라는 괴물 조직을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특히 전두환은 쿠데타를 막아야 할 책임자인 현직 보안사령관으로서 쿠데타를 일으킨 뒤, 보안사가 새로운 판을 짰지요. 그 잘못된 기억을 방대한 조직의 할 일 없어진 사람들이 갖고 있다가 이런 엉뚱한 짓을 하는 겁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군사 쿠데타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고, 남북관계도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데 맞추어 기무사의 임무를 새롭게 규정하고, 단순한 개편이 아니라 해체 수준으로 원점에서 재구성해야 합니다.

오홍근 : 494개 주요 시설과 광화문·여의도에 기계화사단및 특전사 등 계엄 업무 수행군을 투입한다 했습니다. 정부의 모든 기능을 군이 장악하고 촛불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겠다는 이야기입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다리를 건너오는 일사불란한 군화 발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됩니다. 주요 요지를 선제적으로 장악하고 사전 검열을 위해 언론사마다 계엄사 요원을 파견하는 계획도 나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치밀한 친위 쿠데타 계획에다 1972년 10월 17일의 유신을 보탠 소름끼치는 헌정 말살 실행 계획이라 판단합니다. 1979년 전두환 씨의 12·12 쿠데타도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가 감행한 정권 찬탈이었습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허 씨들도 보안사 처장들이었습니다. 곡해일지 모르겠지만 보안사와 기무사의 DNA를 의심하게 됩니다. 기무사의 역할과 기능은 차제에 부대 해체를 포함한 원점에서부터 검토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을 희생해야 할 '졸'로 보는 문화...'졸권'을 찾아야 한다

한홍구 : 군사문화를 이야기하면 보통 박정희 군사 정권을 원조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연원을 올려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제시대 후반기가 중요한데, 만주 침략 이후, 본격적으로는 중일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국민학교가 많이 생기죠. 국민학교가 군사문화의 진앙지였고요. 국민학교에서 키워낸 게 군국 소년이었습니다. 일제가 우리 청년들을 징병해서 데리고 갔는데, 국민학교도 다닌 적이 없으면 일본 말도 모르고 단체 생활도 한 적도 없으니 군대에서 당장 써먹을 수 없어요.

그래서 청년단을 전국에 만들었는데, 이 유산을 이어받은 일제 잔재인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청년단이 또 해방 이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1950년대 깡패 조직들을 보면 호칭이 형님이 아니라 단장님이었습니다. 청년단 문화의 기반 위에 한국전쟁을 치릅니다. 일본에서는 미군 점령 시기에 군국주의 물을 빼느라고 굉장히 노력을 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일제가 키워낸 군국 소년들이 군인이 돼서 전쟁을 치루죠. 황군 대신 국군이 되었고 이 사람들의 훈육주임이자 사령관으로 박정희가 등장한 겁니다. 박정희가 돌출적인 게 아니고 박정희가 등장할 수 있는 사회적인 기반, 박정희가 '아' 했을 때 '어' 하고 호응을 해주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김종대 : 군사문화의 경계선을 획정하는 것이 쉬운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는 근대 국민 국가를 동원체제로서 조직화하는데 근대 군사 조직, 문화가 사회적으로 확대 재생산된 형태로서 수입됩니다. 군국주의자들에게는 독특한 인간관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항상 인간은 불안정하고 나약하며 불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은 완성될 수가 없고 국가나 군대가 하나의 조직된 힘으로서 개인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해결자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형성하게 됩니다. 나의 불안한 한계를 어떤 군대나 국가라는 조직에 몸을 담음으로써 초월하고, 그 속에서 나의 불안전함과 나약함이 극복된다고 보는 것이죠.

이것이 절대주의입니다. 개인의 양심의 문제까지 국가가 대신 판단을 해주니까 양심의 문제로 고민하지 아니하고 나의 양심을 대리해주는 상징적 표상인 국가나 어떤 권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데에서 군사문화가 1차 완성되죠. 소위 '까라면 까는 문화'입니다. 이 나라가 해방이 되고 민주주의 체제를 잡아가는 중에 박정희가 반 헌법적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군사문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홍근 : 군대와 군사문화가 100% 나쁜 것은 아니죠. 5·16 쿠데타 이후만 해도 민간은 많이 놀랐습니다. 처음에 ABC쇼크가 있었습니다. Army, Briefing, Chart. 브리핑, 차트를 하니까 잘 돌아가는 것 같고 근사해 보이거든요. 그렇게 쇼크를 줬는데, 과유불급인 것이 처음에 폭력배들에게 현수막 들고 종로통 행진을 시켰습니다. 이정재니 임화수니 하는 깡패들을 다 잡아 넣었죠. 그 즈음 어떤 지방도시에서는 길거리에 안내판을 만들어 놓고 술에 강한 자 소주 2홉, 보통인 자 소주 1홉, 그 다음에 술에 약한 자 반 홉 이렇게 획일적으로 음주량까지 정해줬죠. 5·16 쿠데타 직후 이야기입니다.

한홍구 : 그런 문제는 군대가 단지 탱크만 밀고 나갔기 때문은 아니거든요. 군대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단순, 무식, 과격하다는 게 있죠. 그런데 결코 무식하진 않았어요. 1950-60년대 한국사회에서는 군대가 가장 선진문물을 수용한 집단이었습니다. 교육과 물자가 집중됐고요.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민간에서 외국으로 나간 유학생 숫자가 6000명이었는데, 그중에서 10분의 1이 돌아왔어요. 군대는 물론 민간보다는 유학 기간이 짧았겠지만 9000명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 돌아왔으니까 해외체험이라던가 미국과의 접촉이 민간에 비해 월등히 풍부했죠. 재벌 기업에서 재교육 기관 혹은 직원연수 기관이 70년대 중반쯤에야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군대에는 육군사관학교 뿐만 아니라 육군대학, 국방대학원에 각종 병과별 학교가 있었죠. 통신학교를 포함해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선진적인 통로가 군대였어요. 우리나라의 경영학, 행정학은 군대에서 처음 받아들였습니다.

저도 정말 싫어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말이지만 '군대 다녀와야 사람 된다.'는 말이 통용되었던 이유가 나름대로 있었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군대 가서 처음 전깃불이나 전화를 썼죠. 육군병장 마치고 돌아오면 리더십도 생기고요. 군대에 비해 민간 쪽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낮았어요. 민주화는 학생들이 열심히 싸워가지고 전두환한테서 정권을 빼앗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 각 분야에 축적된 역량이 군대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는, 그래서 군대가 더 이상 사회에 대해서 지도적이거나 헤게모니를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은 같이 상승작용을 했고요. 저는 그 교체시기가 오홍근 선생님이 칼 맞은 1988년 즈음이라고 봅니다. 군대가 이 사회에 대해서 말빨이 안 먹히게 됐죠. 그런 위기감이 처음 생기면서 오홍근 기자에게 식칼테러라는 극단적인 일이 일어난 거죠.

오홍근 : 군사문화는 그 자체로서도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하지만 문제는 군사문화가 병영에서 탈영한다는 겁니다. 울타리를 넘으면서 다양한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문화와 충돌을 한단 말이에요. 군사문화는 기본적으로 승리하는 문화, 능률을 추구하는 문화입니다. 일사불란을 추구하고요. 공정이나 정당함은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것이죠. 또 하나 중요한 건 '졸'을 사람으로 안보는 것이죠.

양승태 대법원 사태 또한 졸의 기본권을 무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KTX나 쌍용차 문제도 전부 졸을 졸로 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이게 군사문화의 특성입니다. 그리고 군 내부에서 졸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 사회에서 졸인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게 비극이 된 겁니다. 헌법 제1조도 이 나라의 모든 권리는 졸로부터 나온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군사문화는 그 졸인 국민 무서워하지 않는 문화라고 봅니다. 대표적인 국가 공권력 살인 사건인 인혁당 살해 사건이나 광주 학살 같은 것도 그래서 생긴 졸의 참극일 것입니다.
▲ '식칼테러'를 당한 직후의 모습 ⓒ오홍근

군사문화는 '대통령'도 어쩌지 못했다

김종대 : 저는 좀 다른 측면에서 군대와 남자의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병역법에 '대한민국 남자는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대목이 군대에서 탈영한 이데올로기라고 봅니다. 과거 시행령에 보면 무정자증 같은 경우는 군대 안 보냈습니다. 4급 판정을 했죠. 그러다 최근에 병역 자원이 부족해지니까 요즘은 3급 현역으로 보냅니다.

오홍근 : 그 무정자증이 생식능력을 말하는 건가요?

김종대 : 그렇습니다. 이건 병역법 초기 설계자들의 작품입니다. 법에 대한민국 남자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무정자증은 남성이 아닌 것이죠. 남자로서의 결격사유가 있기 때문에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본 겁니다. 지금은 군대를 가지만 3급이고요. 낙인을 찍는 거예요. 제가 이 문제를 병무청장하고 토론했어요. 옛날에야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서 오히려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진단서를 냈죠. 그런데 도대체 왜 아직도 무정자증 같이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병역법에 남아있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그 쪽에서 의사 5명을 소집해서 무정자증이 왜 3급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토론했는데, 5명이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해 답을 못 내렸다고 해요. 이유가 없는 거예요. 병역법의 초기 설계자들이 징병제도를 국가가 국민에게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일종의 면허를 발급하는 제도처럼 이해한 것이죠. 이런 잔재가 남아있어요.

한홍구 : 아까 말씀하셨지만 사실 징병제가 만들어지는 게 시민의 권리가 확립되는 과정과 동전의 앞뒷면같은 관계입니다. 우리는 징병제가 사람들을 이민족 지배자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처음 도입했기 때문에 민주적 권리 부분이 하나도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탈영한 군사문화를 사회가 억제하지 못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종대 : 혼혈도 안 보냈고 고아도 안 보냈습니다. 주로 서구형 혼혈처럼 외관상 혼혈이 뚜렷한 경우에는 지금도 군대 안 갑니다. 우리같이 제노포비아, 인종주의가 발전한 나라에서는 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한꺼번에 없애기 힘들죠. 탈북자들은 희망자만 갑니다. 다문화 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민족적 순혈주의 내지는 국가가 국민에 대한 권위부여라는 측면에서 이런 제도들이 남아있습니다.

오홍근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첨언할 것은 군사문화는 명령의 합법성은 논할 수 있으나, 명령의 정당성은 논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이게 군대의 문제입니다. 상관의 부당한 지시도 복종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고 단지 상관이 전쟁법이나 어떤 군법이나 또는 어떤 지휘체계 상에서 중요한 규범에 위배되었을 때 합법성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는데, 그 정당성의 문제는 제기할 수 없습니다.

오홍근 : 제 사건의 경우에는 지시였습니다. 끝내라고 지시가 떨어져서 결재를 올립니다. 밑에서 1안 “오홍근 일가 몰살해라.” 2안 “얘가 기잔데 저녁에 반드시 소주 한잔씩 하고 들어가더라. 술집에 가서 시비 걸어서 얘만 죽여라.” 3안 “이놈 혼자만 가서 호되게 혼을 내라.” 이 친구들이 얼마나 인체공학에 대해 해박하냐면 혼내라고 하니까 정말 혼낸 겁니다. 허벅지 바깥쪽으로 다리를 34cm를 찢었거든요. 다리를. 한 3~4cm 되게 했는데, 안쪽을 그었으면 죽었어요. 동맥을 건드려서. 당시 정보사령관이던 이진백 소장은 부인하고 있는데 3안에다가 결재를 했어요. 동그라미를 쳤어요. 그런 식이니까 부당한 명령이라고 안 하죠.

제가 테러를 당한 게 1988년 8월입니다. 그 몇 달 뒤에 민정당 중진들이 노태우 대통령하고 다른 일로 만나는 자리에서 '오 아무개 테러사건은 안 일어났어야 우리에게 좋은 사건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노태우 씨가 거기서 “제가 대통령으로서도 어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대통령도 어쩌지 못했던 문화가 군사문화예요.

▲정보사 식칼 테러를 당한 당시 오홍근. 허벅지에 흉터가 선명하다 ⓒ오홍근

김종대 :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제기하면 안 되는 것, 불합리한 것을 참는 버릇, 그리고 권력관계에 의한 지시와 복종을 군사문화라고 보면 우리는 상당히 정체되거나 지체된 후발주자에 가깝습니다. 선진국의 군대 같은 경우에는 이미 웬만한 부당한 지시는 불법적인 지시로 인식이 되고 제도화되어 있어서 지휘관에게 재량권을 무소불위로 그렇게 폭넓게 주지 않거든요. 그럼으로써 문제점들이 개선되고 있는데 우리 군대의 경우에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법의, 법치의 영역 밖에 존재합니다. 제가 전 세계 징병제 국가를 다 가봤거든요. 스웨덴, 대만, 이스라엘 등 다녀온 결과 한국 군사문화의 유달리 특이한 점의 하나가 간부식당입니다. 지휘관하고 병사가 밥을 같이 안 먹는 나라는 동서양 불문하고 여기밖에 없어요.

한홍구 : 군사문화는 군대 막사 바깥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포철 같은 곳은 완전 군대 아닙니까. 그런데 포철에서 군대 갔다 온 사람 박태준하고 몇 명 안 됩니다. 박태준도 포철 4~50년 했고 군 생활은 10년 조금 더 했죠. 처음에 같이 데리고 있던 몇 명이 박태준 회장이 군대에서 연대장 할 때 대대장, 중대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철 전체가 군대화되었고, 현대도 비슷합니다. 경비들이 문앞에 서서 두발단속하고 복장위반하면 대가리 박게 시키고, 학교에서 복장검사하고 선도부 있었던 그 문화가 그대로였어요.

1987년 7, 8, 9월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을 때 현대노동자들의 구호 1번이 두발자유화였습니다. 민간회사 직원들, 성인들이 두발자유화를 첫 번째로 요구하는 웃기는 일이 불과 30년 전 일입니다.

김종대 :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전문성은 통제받아야 하거든요. 의사가 법안 정책을 수립하는 게 아닙니다. 교사가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게 아니고, 검사가 사법정책을 수립하는 게 아니죠.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큰일이죠. 같은 이치로 군인이 국방정책을 수립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도 군사문화가 막사를 탈영해서 정부 부처 중의 하나인 국방부로 탈영해 있습니다.

국방부로 가면 안 되는 겁니다. 현역 최고로 갈 수 있는 자리는 합참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국방부의 주류가 전부 양복 입은 군인들입니다. 지금 문민통제가 가장 안되는 데가 법무부하고 국방부거든요. 이런 집단은 반드시 탈이 납니다. '군사문화가 병영을 넘어가면, 탈영을 세게 하면 반드시 소리가 난다'. 이렇습니다.

한홍구 :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민주화를 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름 자체가 문민정부이지만 과연 얼마나 문민화되었나 혹은 문민 통제가 과연 되고 있는지가 의문입니다. 민간이 군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너희는 반란만 일으키지 말고, 쿠데타 일으키지 말고 대신 이거 갖고 놀아라'하며 비싼 장난감 잔뜩 사주며 달래고 있는 것 같아요.

오홍근 : 우리 사회를 지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역할을 한 게 군사문화죠. 문제는 핵이 되는 깃발 든 놈은 얼마 안 되는데 바람잡이들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그게 이제 카르텔을 일으켜서 주변에서 계속 동조해주고 그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어서 이권을 위해서 세력을 형성하지 않습니까? 군사문화가 적폐에 이르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게 보수 정당과 정치검찰도 있지만 언론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른바 언론'이라고 그럽니다.

이른바 언론들의 공이 혁혁합니다. 그들이 군사문화하고 어깨동무하고, 정치권력하고 야합하고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단물 빨아먹었거든요. 한 선생께서 고생 많이 했냐고 저한테 물어보셨죠. 사실 아픈 것은 몸보다도 마음입니다. 칼을 맞고, 오십몇 바늘을 꿰메고, 입원하고 지팡이 짚고 다니고 이런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딱 터지고 한 달쯤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하니까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삼성 비서실에서 오홍근 때문에 삼성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요. 그때가 한창 방산 수주할 때에요. 1988년의 일입니다.

김종대 : 당시 F-16을 도입하는 한국형 전투기 사업, 즉 KFP 사업입니다.

오홍근 : 그러니까, 삼성 비서실에서 볼 때는 이놈이 그냥 고춧가루를 뿌린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 중앙일보 사장이 서울 시내에 수도권에 있는 장군들을 5~6명씩 그룹핑해서 매일 저녁 냉면그릇에다 맥주 소주 붓고 술대접을 하면서 돕니다. 그리고 그 뒤에 얘기를 들어보면 '저희가 가해잡니다. 이해해주세요.' 이랬다는 거죠?

한홍구 : 아, 거기까지 갔어요? 저는 중앙일보, 삼성 쪽에서 굉장히 곤혹스러워서 오 국장님을 한직으론 돌렸다는 얘기까지는 들었지만.

오홍근 : 그 분이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이 양반이 그러고 나서는, 신문사 사장이 얼마나 속이 불편했겠어요. 수행직원이 만취한 이 양반 어깨를 끼고 차를 태워요. 그러면 차를 타면서 “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하면서 운다는 거지.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가슴이 아프던지.

한홍구 :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대학에서 선배가 후배 얼차레 주고 군기잡는 군사문화가 널리 퍼져 있어요. 오히려 군사독재 시절보다 심해져는데, 촛불만 들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군사문화를 없애 민주주의를 심화시켜야겠지요.

오홍근 : 청산되지 않은채 군사문화가 적폐가 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4·13지방선거 때 적폐로 굳어져가던 그 군사문화가 해체될 가능성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4·13지방선거는 국민들이 민주당을 지지한 선거가 아니라 적폐로 남은 군사문화를 응징한 사건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김종대 : 한국에서 군대란 남성에게 깊은 상실로 트라우마라는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그러나 밝은 쪽으로 개선이 된다면 군사문화는 도전과 성취의 덕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근대 민주화, 군개혁의 핵심인 것입니다.

▲평민당 조사단 의원들이 입원 중인 오홍근 부장을 찾아 사건 경위에 대해 듣고 있다. ⓒ오홍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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