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지 '즉흥 연설' 하나가 스웨덴을 바꿨다…현상으로서의 알메달렌

[세계의 공론장] 신뢰에 기반한 공론장은 어떻게 가능했나?

공론장(Public sphere)은 공적인 의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평등하게 주장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된 의견, 즉 공론(公論)이 형성되는 장이다. 공론은 대표성 있는 표본의 즉각적인 선호를 취합한 여론조사 결과와 다르며, 상호 소통 없이 개별적인 선택을 집계한 투표 결과와도 다르다.

원래 의미의 공론장은 공적 의제에 대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와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공적 의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결정하기 위해 대표성 있는 사람들, 즉 미니 공중(mini public)을 구성한 시민의회나 이벤트 성격의 숙의 프로그램을 공론장으로 더 자주 부른다. 아마도 '숙의적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를 공론조사로 번역한 효과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공론장의 원래 의미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어디일까? 저마다 내세우는 후보는 다르겠지만, 오랫동안 주목을 받아 온 곳이 있다. 무려 반세기가 훌쩍 넘게 세계의 대표적인 공론장으로 자리잡아 온 알메달렌 민주주의 주간(Almedalen week, 이하 '알메달렌')이다.

미리 밝혀두자면, 알메달렌은 특정한 공론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여러 공론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이 차이가 알메달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만든다. 매년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스웨덴의 모든 원내 정당과 4만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3000개가 넘는 이벤트에 참여하는 알메달렌은 어떻게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작에는 스웨덴이 가장 사랑한 정치인이자, 복지국가의 기틀을 놓은 올로프 팔메(Sven Olof Joachim Palme, 1927~1986)가 있다. 그는 1914년부터 단 한 번도 원내 1당의 지위를 놓친 적이 없는 사회민주노동당 소속의 인기 정치인으로, 1968년 당시에는 교육부 장관을 맡고 있었다.

팔메는 우리로 치면 제주도와 비슷한 휴양지인 코틀란드(Gotland) 섬으로 휴가를 왔다가, 비스뷔(Visby)시 해안가에 있는 알메달렌 공원에서 주민들의 요청으로 사회민주노동당과 스웨덴의 미래에 관한 즉흥적인 연설을 한다. 이 작은 연설이 이후 반세기가 넘게 스웨덴, 아니 세계의 대표적인 공론장으로 꼽혀 온 알메달렌 주간의 시작이다.

물론 시작할 때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1974년까지 알메달렌 공원에서 연설한 사람은 올로프 팔메가 거의 유일했고, 가끔 그의 사회민주노동당 동료들이 함께했을 뿐이다. 그러나 점차 이 해안가 공원의 연설에 참여하는 사람은 사회민주노동당 동료에서 다른 정당 정치인으로 확대되었고, 1991년에 이르면 스웨덴 모든 정당의 연례 행사가 되었다. 이 정당들의 연설을 중심으로 다양한 의제를 가진 단체들이 모여 들면서 거대한 민주주의 대화 페스티벌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알메달렌은 엄연히 8개 정당이 기획하고 고틀란드 주 정부가 주최하는 '관(官)' 행사다. 알메달렌 주간의 기획은 스웨덴 8개 모든 정당이 참여하는 10인 위원회(8개 정당 대표와 의장, 부의장)에서 의석수와 무관하게 모두 1인 1표를 행사해 결정한다. 물론 8개 정당이 모두 합의해 기획안을 마련했더라도, 최종 결정은 코틀란드 주 정부의 권한이다. 알메달렌 주간에 필요한 예산을 고틀란드 주 정부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돈 10억 원 정도가 드는 알메달렌 행사 비용을 주 정부가 모두 감당하는 것은 아니다. 2026년의 알메달렌 주간에서는 천여 개의 단체나 개인이 모두 3,215개의 공식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프로그램을 공식 개최하기 위해서는 등록비를 내야 한다. 일찍 신청하면 무료지만, 6월말 행사가 다가올수록 등록비는 늘어난다. 여기에 부스 등 대관료를 합치면 대략 우리돈 5~6억 원이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들이 부담하는 비용이다. 전체 행사비의 절반 이상을 공식 프로그램을 등록한 개인이나 단체가 책임지는 것이다.

행사비의 상당 부분을 공식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단체나 개인이 부담하는 것은 알메달렌의 지속가능성을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주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 민간 차원의 재원만으로 이런 행사를 계속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주 정부는 알메달렌의 프로그램에 얼마나 개입할까? 알메달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3천 개가 넘는 프로그램 중 주 정부가 기획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조직위원회는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하고, 알메달렌의 메인 이벤트인 정당 연설을 지원한다. 그러나 그 외에 모든 프로그램은 여섯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누구나 개최할 수 있다.

여섯 가지 조건이란 이렇다. 우선 주제는 '현재의 사회문제에 대한 대화', 즉 공적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 둘째, 모든 프로그램은 무료로 진행하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행사는 비스뷔시 도심 내 실제 장소에서 진행해야 한다. 넷째, 주최자는 스웨덴의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 다섯째, 민주주의를 해치거나 폭력, 혐오를 조장하는 프로그램은 허용하지 않는다. 여섯째, 영리적 목적으로 제품을 홍보, 판매하거나 자신의 사업을 소개하는 행사도 허용하지 않는다.

ⓒ필자 제공

앞에서 살펴본 6가지 기준을 충족하면 어떤 프로그램도 열 수 있다는 점은 알메달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알메달렌이 반세기가 넘게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기획하지 않는 기획'이라는 특징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우리의 경우와 비교해 보자.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체로 불확실성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가지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행사를 어떤 지자체가 기획한다고 가정하면, 가장 먼저 TF를 꾸리고 이 행사를 개최해야만 하는 여러 정치·사회적 상황을 분석해 행사의 핵심 목표와 기조를 도출할 것이다. 여기에 몇몇 자문위원이나 홍보 대행사의 도움을 받아 올해의 핵심 기조와 방향을 설정하고, 멋진 슬로건을 정한다. 때로는 몇 개의 슬로건 후보를 온라인 투표에 붙이는 이벤트를 열 수도 있다.

이렇게 결정된 슬로건은 많은 예산을 투입해 홍보되며, 기조에 맞게 설계된 대토론회나 이벤트 공론장은 저명한 전문가들과 단체 명단을 곁들여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홍보 전략 수행에 돌입한다. 사전에 잘 설계된 성과지표에 맞춰,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거치며 문제점을 파악하는 과정도 필수적이다. 행사 장소로 낙점된 공간에 몇 개의 부스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파악한 후, 부스를 채울 단체도 동원한다.

공무원들은 '여긴 왜 이렇게 허전한가?'라는 상급자나 선출직 공무원들의 지적을 피하기 위해 빈틈을 꼼꼼하게 살피고, 나란히 설치된 부스에서는 각종 경품을 내세운 이벤트를 열거나, 평소의 활동이 담긴 리플릿을 전시한다. 저녁에는 보통 유명 가수를 초대한 메인 이벤트를 열고, 줄 간격을 잘 맞추어 깔아 놓은 좌석을 꽉 채우면 매우 훌륭하게 치러진 행사로 인정받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공개 입찰을 따낸 행사 전문 이벤트사가 전담한다.

반면에 알메달렌은 반세기가 넘게 진행되어 오는 동안 조직위원회 차원에서 어떤 기조나 슬로건도 잡지 않았다. 행사가 끝난 후 가장 멋진 프로그램에 상을 주거나 '올해에는 이 문제에 주목해 보자'는 지침을 내려 보내지도 않았다. 알메달렌 조직위가 주관하는 정당 행사조차, 정당끼리 정한 순번에 따라 오전 11시나 오후 7시에 독점적 연설 시간이 배정되고, 순번에 해당하는 정당이 알아서 진행할 뿐이다.

물론 조직위가 노는 것은 아니다. 알메달렌은 이 행사만 담당하는 고틀란드 주 정부 소속의 공무원 3명이 일년 내내 준비하며, 행사가 다가오면 대략 150명 정도의 인력이 합류해 행사를 치른다. 이들은 부스 신청을 관리하고 공간을 배치하며, 개막식을 열고 정당 연설회를 주관한다. 2022년 알메달렌 주간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는 안전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또한 청년들의 참여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반복되자, 청년 정치 리더들을 중심으로 특별 세션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메달렌에서 열리는 수천 개의 프로그램들은 조직위가 아니라 알메달렌에 참여하는, 그것도 매년 동일하지 않은 단체들이 여섯가지 기준에 맞춰 준비한 것이다.

그래서 매년 알메달렌이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단지 모든 행사가 끝나면, 올해는 이런 저런 주제가 많았다거나, 이런 저런 주제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정도의 평가가 가능할 뿐이다. 조직위의 근본적 역할은 현대 사회문제에 대한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고 정치인, 시민과 만나 대화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지,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알메달렌은 '빈 기표'(empty signifier)다. 주 정부가 기획해 치밀하게 설계해 스웨덴 국민이 모두 합의할 내용을 만들어 내는 꽉 찬 기표가 아니다.

이런 알메달렌의 특유한 형식과 문화적 분위기는 스웨덴 전역과 인근 국가로 확산하면서 하나의 현상(phenomenon)이 되었다. 우선 스웨덴에는 알메달렌 주간과 비슷한 성격의 행사가 두 개 더 만들어졌다. 알메달렌은 정치행사이자, 민주주의 주간이라는 성격이 강하지만, 6월 초 스톡홀름에서는 사회통합을 목표로 한 야르바 위크(Järvaveckan)가 진행된다. 알메달렌이 끝난 후인 9월에는 괴텐버그에서 시민사회와 정치, 기업, 학계, 주민이 서로 연결점을 찾는 비영리 페스티벌인 프리함넨 데이즈(Frihamnsdagarna)가 열린다.

현상으로서의 알메달렌은 북유럽과 발트해 국가로도 뻗어 나갔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 8개 나라에서는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토론과 대화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 알메달렌 현상은 이처럼 흡인력만이 아니라 확산력도 갖추고 있다.

알메달렌 모델이 세계적 유명세를 타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정치인과 학자들도 수없이 이곳을 방문했고, 여러 지자체나 기관에서 벤치마킹해 정책 박람회, 정책 페스티벌, 정책 축제 등의 이름으로 비슷한 행사가 시도된 바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일회성 행사로 끝났을 뿐, 알메달렌처럼 지속적이고 정례적인 공론장으로 자리 잡는 데 실패했다. 왜일까?

형식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진행된 여러 행사들이 알메달렌보다 훨씬 재미있고 도파민을 뿜어낸다. 흥의 민족 아닌가? 반면, 알메달렌은 소박하며 심지어 지루하기까지 하다. 개막식조차 스웨덴과 고틀란드 주 정부나 의회 관계자의 연설로만 채워지고 그 흔한 초청 가수 공연조차 없다. 간혹 공원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긴 하지만 메인 이벤트는 아니다. 부스에서 키다리 옷을 입고 풍선인형을 만들어 주거나 깜짝 마술쇼를 펼치는 공연자도 없다.

대신 각종 부스나 카페, 알메달렌 공원 근처에 있는 웁살라 대학, 대형 선박, 박물관 등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에서는 하루 종일, 정말 계속해서 토론과 발표가 이어지며, 거리에서는 간혹 주요 사회 이슈를 소박하게 연출한 퍼포먼스가 목격될 뿐이다. 주제도 특정하기 어렵다. 인공지능(AI), 토론 문화, 기후 위기, 노동권, 아동 인권, 이민자, 종교, 재택근무, 사냥권과 동물권, 건강과 복지, 패션산업, 부동산, 게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전방위적이다.

출발은 정당 연설이었지만, 그렇다고 정치색이 강한 것도 아니다. 스웨덴 8개 정당은 순번에 따른 정당 연설회를 가장 열심히 준비하지만, 평상시에는 알메달렌 공원 귀퉁이에 색만 다르고 모두 동일한 크기와 모양을 갖춘 천막 부스를 옹기종기 설치해 놓고 자신의 정책을 홍보한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기 정당의 정책이 담긴 팜플렛을 나눠주거나, 조금 관심이 보이면 선크림이나 밴드가 담긴 기념품을 슬쩍 건네 주면서 말을 걸어올 뿐이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정당 연설은 통상 당대표나 대표에 버금가는 영향력과 인지도를 가진 정치인이 하며, 총리가 속한 당은 총리가 직접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알메달렌에 참가한 후에 여름 휴가를 떠나는 게 관례다. 알메달렌에 오는 정치인들은 전체 프로그램의 1/3 정도에는 직접 참여하며, 30% 정도의 프로그램은 정당이나 정당 관련 단체가 주최한 것이다.

이런 성격 때문에 정치인들을 만나거나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알메달렌에 오는 노동조합이나 비영리단체, 영리 기업 관계자들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알메달렌에서는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제를 정치인들과 만나 토론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물론 정치인만이 아니라 이런 저런 공적 의제에 관심을 가진 적극적인 시민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고, 휴가철 쉼과 충전에 더 무게를 두고 온 사람들도 있다. 비스뷔 시는 대충 찍어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풍경의 동네다.

이처럼 알메달렌은 하나의 목적과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의도와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기대가 각자의 방식대로 충족되는 곳이다. 반복하지만, 애초 알메달렌은 비어 있는 공간이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와 요구, 지향과 의도가 이 빈 공간을 채워 왔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잘 기획된 프로그램과 멋진 공연, 솔깃한 기념품 따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되어온 대화의 문화다.

ⓒ필자 제공

물론 알메달렌에도 한계는 있다. 대충 봐도 알메달렌에 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40대 이상의 중산층 백인이다. 이것은 알메달렌 공원이 있는 비스뷔 시가 지브리의 유명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1989)에 모티브를 줄 정도로 아름답고 유명한 휴양지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휴가철 성수기에 이곳으로 오는 것 자체가 적지 않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5일 동안 알메달렌 주간에 참여하기 위한 숙박비와 식비도 무시 못한다. 스톡홀름만 해도 이민자들이 넘쳐나지만, 고틀란드 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알메달렌의 기원을 생각하면 부득이한 측면이 있다. 알메달렌은 의도적으로 기획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서의 우연한 계기가 오랜 시간 다양한 방식으로 축적된 문화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알메달렌의 빈틈을 찾기보다, 알메달렌의 장점을 취하고 한계는 넘어서는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편이 더 낫다.

그렇다면 알메달렌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최소한의 신뢰적 기반이다. 스웨덴에는 살트세바덴 협약(Saltsjöbadsavtalet)처럼 갈등과 대립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해 온 역사와 문화가 있다. 알메달렌에서도 최소한의 합의 기준에 따라 프로그램을 열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대화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적대성에 기반한 정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생각이 다른 정당과는 같은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함께 시도한다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문화적 퇴행을 경험하고 있다. 대화와 토론은커녕, 조롱과 비아냥, 깐죽거림이 정치 능력으로 인정받는 문화로는 어떤 공론장도 살아남기 어렵다.

이런 불신과 적대의 정치문화는 공론조사나 시민의회가 한국에서 자리 잡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의 대표성에 기대는 이런 방식은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내일 앉아 있을 수도 있는 자리에 오늘 앉아 있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신뢰의 문화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신뢰가 없는 곳에서는 내 생각과 다른 결론이 수용될 수 없다. 우리가 최소한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한 신뢰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민주적 공론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는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생각을 가진 단체와 개인을 하나의 공간에 연결시키는 기술이다. 알메달렌처럼 지속가능하고 정례적인 공통의 공간, 공적 의제를 자유롭게 토론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공론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동등한 가치, 즉 등가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느껴야 한다. 이것이 기획하지 않는 기획의 의미다.

형식적 모양새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한국 특유의 일하는 방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다. 또한, 알메달렌처럼 '비워 놓은 기획'은 내용을 채울 이들이 모이고, 신뢰가 쌓일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임기 4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지방정부에서 이런 장기적인 계획을 추진하는 것도 쉽지 않으며, 기반을 다질 초기에 '성과가 무엇이냐'는 압박을 이기기도 어렵다.

다만, 민간에서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이어진 한국사회포럼이 있었고, 최근에는 공익재단들의 협력으로 노동운동과 시민사회 등 다양한 영역의 공익활동간 공통 공간을 만들려는 솔라시(SOLLACI, Solidarity of Labor and Civic society, 노동-시민사회연대포럼) 포럼도 4년째 시도되고 있다. 솔라시 포럼은 특정한 의제와 내용, 목표와 방향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던 한국사회포럼과 달리, '기획하지 않는 기획'을 통해 누구나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프로그램을 개설할 수 있고, 사후적으로 전체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을 시도 중이다.

이것은 특정한 목표를 실현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양한 의도와 목표를 가진 여러 개의 프로젝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한 공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다. 즉, 솔라시라는 공통 기반을 활용해 다양하고 이질적인 목표를 가진 기획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시도되고, 그것이 서로 얽히고 설켜 운동 생태계를 지속가능하게 확장하려는 기획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운동이 모든 것을 특정 방향으로만 관철하려는 '주도권' 갈등으로 공통 기반을 허물어 왔던 지난 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자, 알메달렌 모델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물론 알메달렌은 훌륭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흉내 낼 필요는 전혀 없다. 역사와 문화, 맥락이 다른데 형식만 수입하면 이벤트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러나 단 하나 알메달렌에서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조롱과 비아냥이 아니라 진지한 대화가 힘을 발휘하는, 공동의 문화적 기반 아닐까?

ⓒ필자 제공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