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대응 논의에서 '유연안정성'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업에는 변화에 대응할 유연성을, 노동자에게는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는 기존 노동법이 낡고 경직되어 기술 변화를 가로막는다는 진단이 중심이 되는 것 같다. 해고 규제를 완화하고, 그로 인한 불안정에는 재취업 지원과 사회안전망으로 보완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표면적으로 유연성과 안정성의 조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논의의 무게가 해고의 용이성에 실리는 경우가 많다.
유연안정성은 2000년대 유럽에서 노동시장 정책의 대안으로 부상했다. 이전까지 대립한다고 여겼던 고용의 유연성과 노동자의 안정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는 발상이 인기를 얻은 것이다. 유연안정성 논의의 핵심은 유연성과 안정성을 여러 차원으로 구분하고 양립할 수 있는 조합을 찾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해고 규제 완화로 한 직장을 계속 유지하는 '직장안정성'이 낮아지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고용안정성'이 높고, 일자리를 옮기는 동안의 '소득안정성'이 보완된다면 노동자의 삶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비교적 유연한 해고제도와 관대한 실업급여, 재취업을 지원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결합한 덴마크의 '황금삼각형 모델'이다. 네덜란드도 또 다른 유연안정성 국가로 유명하지만, 시간제 등 비표준적 고용을 활용하면서도 일정한 보호를 제공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구체적 모델에는 차이가 있다. 유연안정성은 처음부터 하나의 모델이나 단일한 개혁 경로를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2007년 유럽연합(EU)은 유연안정성을 공동 정책 원칙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그 개념이 모호하여 서로 다른 정책을 같은 이름으로 포괄하는 '동상이몽'이 나타난다는 비판은 초기부터 존재했다. 오랜 노사관계와 복지제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덴마크의 모델을 다른 나라에 옮길 수 있는지도 논쟁거리였다. 유럽의 노동조합들은 안정성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은 채 해고의 유연성만 확대되는 '위장된 유연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경계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이러한 논쟁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독일 등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고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흡수한 국가들은 위기 초기에 상대적으로 좋은 고용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특정 모델의 우열을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기존 일자리를 지키는 정책이 경제의 적응을 방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해고 이후의 재취업만큼 고용관계 안에서의 조정도 유연성의 중요한 차원이다(유연안정성 모델에서는 이를 '내부적 유연성'이라고 한다).
해고 규제 완화의 효과 역시 생각만큼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규제를 낮추면 채용이 늘어날 수 있지만 해고도 함께 늘어난다. 이는 노동이동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일자리의 순증을 뜻하지는 않는다. 노동자가 경험하는 불안도 재취업 가능성만으로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느끼더라도 현재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불안이 삶의 만족과 정신건강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남기 때문이다. 직장안정성을 고용안정성으로 보완할 수 있겠지만 해고의 충격을 완전히 보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AI 시대의 유연안정성이 '해고를 쉽게 하는 대신 재취업을 돕자'는 데 머문다면, 우리는 2000년대의 논쟁을 반복하게 된다. 물론 AI는 노동자가 수행하는 업무와 필요한 숙련을 바꾸며, 이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업무가 변한다는 것이 언제나 노동자가 일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존 일자리에서 새로운 숙련을 익히고, 업무를 재구성하여 더 생산적으로 일할 가능성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AI가 일반목적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로서 특정 산업의 일부 노동자를 넘어 노동자 일반의 직무(tasks)와 숙련(skills)에 영향을 미친다면, 노동자를 무작정 교체하기 전에 기존 일자리에서 변화에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 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업무를 배우는 재숙련(reskilling)과 기존 숙련을 높이는 숙련향상(upskilling), 기업 안에서의 직무전환을 지원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교육훈련에 참여할 시간과 그동안의 소득을 보장하고, 기업도 기존 인력의 경험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직무를 어떻게 바꾸고 어떤 교육훈련을 받을 것인지 결정하는 과정에도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일자리를 떠나야 하는 경우는 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다시 취업하는가만이 아니다. 새 일자리에서 임금과 고용조건이 크게 나빠지거나, 기존 숙련을 활용하지 못한 채 다시 불안정한 고용을 반복한다면 재취업 자체를 성공으로 보기 어렵다. 소득과 경력을 지키면서 새로운 숙련을 쌓고, 더 나은 일자리 기회로 이동하는 '좋은 이행'이 정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유연안정성의 기본 토대부터 충실히 갖춰야 한다. 한국에서도 덴마크나 네덜란드의 유연안정성 모델을 거론해 왔지만, 실업자의 생활을 보장하고 재취업을 실질적으로 돕는 제도는 이들 국가만큼 발전했다고 보기 어렵다. 고용보험의 보호에서 빠진 노동자를 포괄하고, 실업급여와 고용서비스·직업훈련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 충분한 소득보장은 실업이 빈곤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동시에, 생계 때문에 아무 일자리나 서둘러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경력을 살릴 기회를 찾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노동시장 정책의 성과를 평가할 때도 단기적 취업률을 넘어 재취업 이후의 임금과 고용 유지, 숙련 활용을 함께 살펴야 한다.
교육훈련 역시 실업자에게 단기 과정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야 한다. 평생학습은 애초 유연안정성의 중요한 구성요소였지만, AI 시대에는 이를 노동생애 전반에서 실제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학령기 교육에 집중된 투자를 성인기의 학습으로 확장하고, 재직·실업 여부와 관계없이 필요한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기업 자체의 훈련 여력이 작은 중소기업 노동자나 불안정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노동자가 이동할 만한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정책이다. 교육훈련이 아무리 충실해도 새로 익힌 숙련을 활용할 일자리가 부족하면 좋은 이행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기업이 알아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여러 차례 배신당해 왔다. 정부가 기업의 기술 도입이나 연구개발 등을 지원할 때 고용과 일자리의 질에 관한 목표를 함께 설정하고, 노동자의 역량을 보완하는 기술 활용을 유도해야 한다. 공공재원이 투입되는 돌봄·교육·복지서비스의 인력을 확충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도 정부가 직접 추진할 수 있는 일이다.
AI 시대의 유연안정성을 논의하려면 노동자의 적응과 이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에 얼마나 투자할 것인지, 기업의 기술혁신이 더 나은 일자리로 이어지도록 무엇을 할 것인지부터 구체화해야 한다. 해고 규제를 바꾸는 것만으로 노동자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는 않는다. 노동자가 기존 일자리에서 변화에 적응하고, 필요한 경우 더 나은 일자리로 옮길 수 있는지가 유연안정성 정책의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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