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신해박해, 조상의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적 제례 대신 신앙을 택한 대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칼날 아래 스러진 청년들이 있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다.
그로부터 230년이 흐른 지난 2021년 3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바우배기'의 무연고 분묘를 정리하던 중 기적처럼 흙더미 속에서 두 순교자의 유해와 함께 작은 백자사발 2점이 빛을 보았다.
순백의 사발 안쪽 바닥과 측면에는 붓과 먹으로 눌러쓴 단정한 해서체(楷書體) 글씨가 선명했다. 윤지충의 생몰년과 본관, 세례명, 그리고 "권공의 묘는 왼쪽에 있다(權公墓在左)"라는 은밀하고도 애절한 묵서(墨書)였다.
발굴 직후, 학계와 교계는 이 단정한 필치를 두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윤지충의 외사촌이자 남인계 서학 네트워크의 핵심이었던 ‘다산(茶山) 정약용’이 순교 1주기를 맞아 비밀리에 사발에 글을 써 내려보냈다는 이른바 ‘다산 친필설’이 강력하게 제기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묵서는 다산의 붓끝에서 나온 것일까?
15일 국립완주문화유산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열린 ‘초남이성지 학술대회’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법과학적 감정 결과와 서예사학계의 날카로운 반론이 맞부딪치며 숨 막히는 진실 공방이 펼쳐졌다.
주제발표에 나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강태이 연구관은 2021년 발굴된 백자사발 지석 묵서를 법과학적 필적 감정 기법으로 정밀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국과수는 필적의 고유한 습관을 나타내는 '항상성'과 '희소성'을 검증하기 위해 두 갈래의 대조군을 세웠다.
1790년대 당시 사대부와 관인층에서 널리 쓰이던 일반적인 해서 서풍을 보기 위해 1790년대 호구단자와 준호구 등 공문서 6건을 대조군으로 삼았고, 정약용의 친필 대조자료로는 1792년(감정 대상 시기)과 가장 근접한 1796년 수택본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에 다산이 붉은 먹(주묵)으로 쓴 친필을 택했다.
분석 결과는 ‘다산 친필설’에 찬물을 끼얹는 쪽에 가까웠다.
강 연구관은 "백자사발 지석 묵서는 1790년대 일반 해서체 공문서들과 자획의 방향, 각도, 문자 구성 등 형태학적 특성에서 보편적 유사성을 보였다"면서도 "하지만 1796년 정약용의 친필과 직접 비교했을 때는 글자의 구성, 자획의 간격과 위치, 필순(筆順), 그리고 고유한 운필 습성 전반에서 뚜렷한 상대적 차이점이 관찰됐다"고 밝혔다.
특히 "字(글자 자)", "之(갈 지)", "在(있을 재)" 등 동일한 한자 및 부수 비교에서 다산 특유의 필세와 획의 결합 방식이 사발 글씨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됐다.
강 연구관은 “인척 관계나 사상적 배경에 기대어 제기된 ‘정약용 친필설’은 서체적 형태학적 근거로 뒷받침하기 어렵다”며 객관적 필적상 다산의 친필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같은 국과수의 결론에 대해 지정 토론자로 나선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결론에는 동의하지만 방법론은 위험하다’며 매서운 반론을 제기했다.
박 소장은 "지석 묵서가 다산의 글씨가 아니라는 결론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규명했다는 과정에는 근본적인 무리가 있다"고 직격했다.
첫 번째 쟁점은 ‘매체의 물성(物性)’이었다. 오목한 도자기 표면, 특히 손목의 스냅을 제대로 쓸 수 없는 사발 바닥과 곡면에 붓으로 쓴 글씨와, 평평한 한지 위에 앉아 쓴 다산의 일상적 주묵 글씨를 직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이다.
도자기 유약 표면은 먹을 흡수하지 않고 미끄러지기 때문에 필자의 본래 필세와 리듬이 극도로 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조군 선정의 오류’였다. 박 소장은 "국과수가 일반 대조군으로 삼은 호구단자 6건은 사대부 문인의 글씨가 아니라 관청 행정 실무자인 ‘아전(衙前)’들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필서"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편차가 크고 격이 다른 아전의 글씨를 사대부 지석 글씨의 비교 기준으로 삼은 것은 문헌학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이어 "사발 지석의 글씨는 정약용 같은 당대 일류 문인의 유려하고 리듬감 있는 필세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매체의 물리적 한계 속에서 필자의 개성이 철저히 숨겨진 매우 경직된 관념적 해서"라며, 과학적 수치 비교 이전에 서예사적·문헌학적 맥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과수의 냉철한 형태학적 분석과 인문학계의 날카로운 고증 비판이 맞부딪치면서, ‘바우배기 사발 지석을 쓴 주인공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만약 다산의 글씨가 아니라면, 박해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목숨을 걸고 한밤중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사발 밑바닥에 정갈하게 먹을 갈아 넣었던 ‘제3의 인물’은 누구였을까.
호남의 사도로 불리며 이 일대 공동체를 이끌었던 유항검의 사람들일까, 아니면 이름 없이 스러져간 지방의 또 다른 지식인 신자였을까.
비록 ‘정약용 친필설’은 과학적 검증과 학술적 검토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물음표로 남게 되었지만, 230년 전 차가운 흙 속에 묻혀 있던 사발 지석은 여전히 조선 후기 신앙과 역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품은 채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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