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은 '그날'이 아니라 '그때'를 묻는다

[오찬호의 틈새] 1974년은 그런 해였다

1974년 1월,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한다. 헌법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본인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유신헌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라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이유였다.

이를 위반한 장준하와 백기완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고, 39년 후에나 무죄가 된다. 장준하는 이듬해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의문 가득한 채로.

그러니까, 1974년은 그런 해였다. 대한민국은 57세 박정희의 나라였다. 말 한마디 했다가, 죽도록 두들겨 맞고 그러다 죽는 나라였다.

1974년 2월, 서울지검 공안부는 한 문인 간첩단이 검거됐다는 소식을 발표한다. 재일 동포를 대상으로 발행되는 문학잡지 <한양>이 조총련과 연관되어 있으니 문인들이 받은 원고료가 간첩 자금이라는 이유였다. 이 억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고문이 있었겠는가. 누명을 벗는 데 44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1974년은 그런 해였다. 진실이란 말이 너무나도 무색한 나라였다.

1974년 3월, 중앙정보부는 울릉도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간첩을 일망타진했음을 알린다. 간첩이라던 사람들은 울릉도 주민들과 일본에 농업 연수를 다녀온 사람들이었다. 정보부는 47명을 끌고 가,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 간첩이 될 때까지 고문했다. 3명이 사형 당했다. 2015년에야 무죄가 확정된다. 그러니까, 1974년은 그런 해였다. 북한과 연결되면 무조건 빨갱이인 거고, 빨갱이는 무조건 죽여야 하는 존재였다.

1974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발표된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이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아 혁명을 꾀한다는 내용이었고 같은 날 긴급조치 4호가 나온다. 민청학련에 조금이라도 연루되면 체포되어 죽도록 맞는다는 협박이 가득했다. 분위기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사형이란 단어가 정확하게 적시돼 있다.

같은 달 말, 중앙정보부장은 학생들 배후를 지목한다. 인민혁명당, 바로 인혁당의 등장이었다. 다음 해 여덟 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법사상 암흑의 날의 희생자들은 2007년에야 무죄 선고를 받는다. 억울하게 죽고 32년 후다. 그러니까, 1974년은 그런 해였다. 수사란 게, 법이란 게, 재판이란 게 의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1974년 5월, 한 가족이 고정간첩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으로 밝혀졌고 47년 후 무죄 선고를 받았다(송형섭 가족). 1974년 6월, 한 대학생이 학원 침투 간첩이라며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44년 후 무죄 선고를 받았다(재일동포 유학생 김승효). 1974년 7월, 한 종교인이 정부 전복 자금줄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46년 후 무죄 선고를 받았다(지학순 주교).

그러니까, 1974년은 그런 해였다. 북한, 조총련, 지령, 지하조직, 불순세력, 배후조종, 반정부, 반국가, 혁명, 전복 같은 단어만 대충 연결되어 공산주의, 사회주의 어쩌고라는 문장이 나열되면 간첩이 뚝딱 등장하고 있지도 않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거짓이 진실이 되는 시대였다. 간첩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간첩이 아닌 자들도 간첩이 되었다는 말이다.

1974년 이전이었던 1973년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다. 최종길 교수가 간첩협의로 중정에 끌려가 고문 도중 숨졌다. 이를 중정은 자살로 위장했다. 1974년 이후인 1975년엔 재일 동포 유학생들이 간첩으로 몰려 체포된 학원 침투 간첩단 조작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례는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월 단위로 찾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잡아갔지? 왜 고문했지? 왜 간첩이라고 하지? 그리고 왜 죽였지? 이런 의혹의 시대 한가운데가 1974년이다. 1961년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44세의 사람이 62년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63년, 67년, 그리고 법을 바꿔 71년에 또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영구집권이 가능한 법을 만들어 72년에 또 대통령이 되어 2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 1974년 8월에, 육영수 여사는 총알이 관통해 사망한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는 가운데 28일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표현의 자유로 정당화될 수 없는 역사 왜곡"이라며 가세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노무현 대통령을 건드리면 줄줄이 고소·고발 당한다. 박정희 대통령 모욕은 '표현의 자유'다"라며 비판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의 한 영화관에 걸린 '암살자' 홍보물. ⓒ연합뉴스

질문이 막히면 억측이 난무한다

영화 <암살자(들)>은 묻는다. 국가를 믿을 수 없던 시대에, 그토록 신속한 수사와 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기관원이 기자를 두들겨 패는 시대에, 국가가 발표하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믿기란 불가능한 현실을 조망한다. 8월 15일에 총을 쏜 저격범의 정체와 심지어 배후 추정이 다음 날 조간 1면을 장식하고 그 기세로 고작 127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으니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기자들 몇 명 있는 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냐고 영화는 말한다.

신박한 질문도 아니다. 이미 수차례 반복된 거다. 의혹은 일관되게 있었다. 경호원의 총에 관람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죽을 정도로 현장이 아수라장이었고, 총알 수거는 엉망이고, 수거했다면서 감식도 진행되지 않았으니 따져 묻는 건 당연하다. 설마, 좌파라서 그러겠는가. 그저, 의혹이 해소되지 않아서다. 게다가, 시대가 그러지 않았는가. 그나마 민주화의 물결이 등장한 다음인 1989년에 당시 감식계장이 문세광의 총알이 아닐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아주 간단한 이유였을 거다. 찝찝하니까.

물론 이 찝찝함은 성급한 상상력을 돌출시키기도 한다. 문세광 총에 맞은 게 확실하지 않다는 의혹은 자연스레 다른 희생자처럼 육영수 여사 역시 경호원의 오발로 사망했다고 볼 수 있지 않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몇 단계 더 나아가면 고의로 맞춘 건 아닐까, 그때 국가라면 충분히 그러지 않았을까 등등의 논란의 물음이 연결된다.

그리고 이를 누군가는 '박정희가 아내를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말이냐'면서 반응한다. 그러니 영화를 안 봤다면서도 영화 이야기를 한다. 패륜이란 추임새를 등장하고 아버지가 썼다는 편지가 공개된다. 노무현도 누가 밀어서 죽은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고 우긴다. 말이 되는가. 이를 주장하려면 진실의 틈이 있어야 한다. 1974년이 어떤 시대의 한 가운데인지를 알기에, 영화는 그 틈에서 출발했을 뿐이다.

영화는 그 시절의 진실과 상식을 말한다. 기관원은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왜 이런 단어를 쓰냐면서 기자를 겁박한다. 말 안 듣고 기사를 내면, 말을 들을 때까지 때린다. 국가를 의심한다는 기자에게 기업 회장은 제발 크게 보라고 꾸짖는다. 대통령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며 연설한다. 정부 발표에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전부 빨갱이 소리를 듣는다.

의혹투성이 시대라는 건 의혹이 많아서가 아니다. 질문을 막아서다. 질문이 막히면 억측이 난무한다. 질문이 막히니 진실은 모호하고, 억측이 난무하니 권력은 더 강하게 질문을 막는다. 이 끔찍한 세상이 싫어서, 2024년 12월 3일 밤 사람들이 국회로 달려간 거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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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

오찬호 작가는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2년 간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바탕으로 일상 속 평범한 사례에 어떤 사회구조가 얽혀있는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있다. 자기계발 강박이 능력주의로 연결되어 공동체를 어그러트리는 모습을 추적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한 <진격의 대학교>(2015), 경쟁사회의 내면을 파헤친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2018)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최근작으로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2024), <납작한 말들>(202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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