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이후 한 집안의 제사상에는 늘 젯밥이 두 그릇 올랐다. 하나는 할아버지를 위한 몫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조차 꺼내기 금기시되었던 종조부 김병철을 위한 것이었다.
1865년생으로 백산 부근 동진면 안성리에 살았던 김병철은 1894년 3월 25일경 수천 명의 농민군이 집결한 백산대회를 직접 목격하고 혈기왕성한 마음에 혁명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고, 남은 가족들은 멸문지화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관군의 색출과 가혹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그의 이름은 족보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으며, 그의 형은 고향을 등지고 황해도 벽성군까지 도주하는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세상을 구하겠다며 창을 들었던 스무 살 청년의 투혼은 한 세기가 훌쩍 지나 후손들의 조심스러운 구술 증언을 통해서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2026년 열린 부안동학농민혁명 학술대회에서 성강현 동의대 교수는 '인물로 보는 부안 동학농민혁명' 발표를 통해, 오랜 시간 기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부안 지역 동학 영웅들의 삶과 투쟁을 세밀하게 복원했다.
성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부안의 동학농민혁명은 단일한 성격의 하층민 무장 항쟁이 아니라 지식인과 부호층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한 다층적인 사상·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부안 최초의 접주 김영조와 동학에 입도한 천석꾼 양반 지주 김낙철·김낙봉 형제다. 특히 대접주 김낙철은 전봉준, 손화중이 이끄는 급진적인 무장 봉기 노선과는 명확한 시각차를 보였다.
그는 일방적인 파괴와 무력 충돌을 극도로 경계하며 관민상화(官民相和)의 길을 모색했다. 동학농민군이 부안 관아를 점령했을 때, 김낙철은 손화중과 담판을 벌여 참형 위기에 놓였던 부안군수 이철화의 목숨을 구했다. 또한 군수의 요청을 수용해 부안 서도 송정리에 도소(집강소)를 설치하고, 동생 김낙봉과 신소능을 통해 상업적 요충지인 줄포에도 도소를 세워 지역 내 치안 유지와 백성들의 구휼에 매진했다.
그러나 평화와 질서를 우선시했던 온건파 지도부 역시 참혹한 탄압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낙철 형제는 부안의 안정을 도모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나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목숨을 잃을 뻔한 끔찍한 고초를 겪었다.
부안 동학 확산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최초의 접주 김영조와 줄포 도소를 이끌었던 신소능은 1895년 관군에 체포되어 안타깝게 처형당했다. 사발통문에 서명하고 고부 기포에서 중군(中軍)을 맡았던 황홍모 역시 고부에서 체포되어 나주에서 처형당한 뒤, 훗날 후손들에 의해 부안군 주산면으로 묘소가 이장되며 부안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
관변 기록이나 공적인 문서에서 누락된 부안 동학군의 치열한 무장 투쟁사는 후손들의 생생한 기억을 통해 비로소 발굴되었다.
상서면 내동마을 출신의 김기병은 환갑을 넘긴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품으로 동학농민군 대장을 맡았다. 그는 부안 변산 해창의 군기고를 장악해 무기를 확보하고 5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며 부안 읍성 무혈입성에 앞장섰다. 우금티 전투의 뼈아픈 패배 이후에도 그는 무기를 버리지 않고 부안으로 잠입해 끝까지 지하 투쟁을 이어갔으나, 이웃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부하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고창 출신으로 부안 백산면에 정착해 백마를 타고 부안과 고창 일대를 누볐던 송성구 접주 역시 개암산 토굴에 은신하다 발각되어 끝내 희생되었다.
조성운 전 역사와교육학회 회장은 발표에 이은 토론에서 족보에서조차 삭제되고 관변 기록에서 '거괴', '비도'로 폄하되었던 부안 민중들의 역사적 명예 회복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조 전 회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정당성을 무력 항쟁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김낙철 형제가 보여준 평화적 자치 활동과 질서 유지 노력 또한 혁명의 매우 유의미한 축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고부 봉기와 백산대회라는 거대한 사건 중심의 서술에 가려져 있던 김영조, 신소능, 김기병 등 부안 고유의 인물들을 조명함으로써 철저히 독립적이고 입체적인 부안 동학 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혁명은 미완으로 끝났고 살아남은 자들은 기나긴 침묵을 강요받았다. 멸문지화의 공포 속에서 제삿밥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가혹한 세월 속에서도, 부안의 동학 영웅들은 구전되는 기억을 통해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다.
비도(匪徒)라는 반역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고 보국안민의 숭고한 대의를 실천했던 그들이, 긴 시간을 지나 백산의 흙바람을 뚫고 찬란한 역사의 무대 위로 다시금 부활하고 있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