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의 '품격사회', 구태의연한 수사일까, 새로운 진보 비전일까?

[기고] "품격사회"와 그 적(敵)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지난 9월 7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품격사회”를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선언했다. 그 이후 민주당에는 품격사회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민주당 TV는 물론 당 관계 행사에서 연일 품격사회를 강조하고 있다.

품격사회-정치적 공론장의 새로운 의제

이제 품격사회는 집권당이 제시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청사진으로서, 집권당이 현 정부의 국정운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품격사회는 정치적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할 시급한 의제이다. 다시 말해 품격사회란 어떤 사회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더구나 과연 품격사회가 구태의연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진보적 비전일 수 있을지, 이런 문제를 정치적 공론장에서 따져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품격사회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국민에게 “품격 있는 삶”을 보장하는 사회를 뜻하며, 이는 격차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때문에 김민석 대표는 품격사회로 가는 길을 IMF 이후 지금까지 확대일로에 있었던 사회적 격차 해소와 양극화 극복에서 찾는다. 하지만 격차나 양극화 해소는 진보 정부라면 항상 강조했던 상투적 문구 아닌가? 그렇다면 품격사회란 그저 내용물은 같고 포장지만 바꾼 것일까?

소극적 품격사회론

학문적으로 볼 때 품격사회란 개념은 이론적 뿌리가 깊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의 1996년 저서가 『품위 있는 사회』이다. 이 책의 원제목은 “The Decent Society”로서 품위나 품격이라는 표현은 번역상의 차이일 뿐 같은 말이다. 그리고 품격이라는 단어는 2021년 문재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에도 나온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서 “품격”을 지녀야 함을 강조하면서 품격 있는 대한민국은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마갈릿이 주장한 품격사회는 그 뜻이 다르다. 그에게 품격사회란 소극적으로 말해서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며,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품격사회란 결국 모든 국민이 사회적으로 존중받음으로써 자존감 있는 삶을 영위하는 자존사회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민석 대표의 품격사회 선언은 “국민 자존 시대”를 여는 서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약자를 포용하는 사회는 비록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사람을 모욕하는 사회일 수 있다. 약자를 포용한다는 것은 강자와 약자의 구분을 전제한 것으로 약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것이나, 강자에게 포용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모욕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갈릿의 품격사회론은 적극적으로 자존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욕 없는 사회라는 소극적 품격사회론에 머물러 있다. 그는 타인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모욕 행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자존감을 주는 존중 행위가 무엇인지는 쉽게 규정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모욕이라는 악을 제거하는 것이 존중을 보장하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말한다.

적극적 품격사회론

하지만 헤겔 좌파적 전통에서 출발하여 마르크스, 루카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하버마스로 이어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악셀 호네트는 마갈릿과 달리 자존감 있는 삶을 보장하는 적극적 품격사회론을 제시한다. 그는 인정과 무시라는 개념에 근거하여 무엇이 자존감을 훼손하고, 무엇이 자존감을 강화하는지를 체계적으로 해명할 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여 진보적 사회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호네트에 따르면 사람을 무시(無視)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같은 인간임에도 인간 취급하지 않거나, 개성과 차이를 근거로 사람을 폄훼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는 구체적으로 폭력 행사, 권리 차별, 집단에서 배제하는 왕따 등을 통해 표현되며, 이렇게 무시당한 사람은 자존감 훼손은 물론 열등감, 자책감, 자기비하에 빠지기 쉽다.

이에 반해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은 서로 교류하며,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개인적 차이에도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정은 사회적으로 볼 때 사회구성원 각자에게 자유권, 참정권, 사회권 등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동등하게 부여되고, 사회구성원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나 사회적 역할, 혹은 직업이 다르더라도 우리 사회에 기여한다는 연대의식을 통해 표출되며, 이렇게 인정받는 사람은 자존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품격사회는 소극적 차원에서 사회적 무시로 인한 자존감 훼손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 차원에서 사회적 인정 확대를 통해 모두가 자존감을 갖고 사는 사회를 말한다.

▲김민석 대표가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 가지 적(敵): 사회적 무시, 획일적 서열화, 무한 경쟁

그런데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은 인간이라는 보편성과 개성적 존재라는 특수성에 대한 동등한 인정이지,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인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관심 받기를 원하거나, 뭔가를 과시하는 사람을 보면 이들이 인정에 목말라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런 식의 인정 욕구는 자신이 남보다 잘났거나 더 존귀하다는 점을 타인이 긍정해주길 원하는 우월성 인정 욕구로서 호네트가 말하는 동등성 인정과는 반대된다.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한 인간이라는 생각은 타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무시 행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우월성 욕구 때문에 사회적 무시가 팽배해 있다. 사람들은 학벌을 기준으로, 더 나아가 직업과 소득,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누가 우월하고, 누가 열등한지를 따지며 사회구성원 전체를 서열화한다. 그렇기에 1등은 2등을 무시하고, 2등은 또 3등을 무시하고, 무시당한 사람은 무시당한 서러움을 타인을 무시하며 해소한다. 그렇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무시가 무한 분열하고 누구나 무시하고 무시당하며 산다.

그런데 무시는 다양한 이유로 일어나는 것 같지만, 점차 하나의 기준으로 수렴되고 있다. 한때는 학벌이 성공과 출세의 지름길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부모의 막대한 교육 투자가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게 되면서 돈이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고 서열화하는 획일적 기준이 되었다. 돈만 있으면 학벌은 물론 성공과 출세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기 쉽지만, 돈이 없으면 성공과 출세는 둘째치고 학벌도, 취업도, 소득도, 건강도, 결혼도, 출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금전만능 풍조가 확산되면 오직 돈을 기준으로 사람으로 평가하게 되고, 그 결과 삶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사회구성원들은 오직 돈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무한 경쟁의 수렁에 빠지고 만다. 돈만 있으면 자신이 마치 귀족인 양 우월성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무시하고 추앙받으며 살지만,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돈 많은 사람 앞에서 열등감은 물론 수치심마저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 적성, 선호와 무관하게 오직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무한 경쟁에 빠질 수밖에 없고, 사회 전체적으로는 다양한 사회적 영역 간의 균형은 깨지고, 돈과 관련된 영리 부문은 비대해지고, 그렇지 않은 비영리 부문은 축소되거나 영리 부문으로 변질된다.

품격사회로 가는 길

과연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자존감 있는 삶을 영위하는 품격사회가 가능할까? 사람들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것은 사회적 무시이며, 사회적 무시는 돈이라는 획일적 기준으로 사람들의 우열을 평가하는 서열화에 기인하다. 그리고 획일화된 서열화는 오직 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무한 경쟁을 통해 강화된다. 따라서 사회적 무시, 획일적 서열화, 무한 경쟁은 품격사회의 적(敵)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품격사회는 불가능하다.

먼저 사회적 무시가 돈을 기준으로 한 획일적 서열화 때문에 발생하고, 이런 서열화가 돈이면 다 되는 금전만능 풍조에 기인한다면, 정책적으로 돈과 여타의 사회적 재화 간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 자녀의 학벌이 교육 투자에 기인한다면 돈이 없어도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공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돈이 있어야 결혼하고, 자식 낳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돈이 없어도 결혼하고, 자식 낳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돈과 결혼, 출산, 건강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

더구나 획일화된 서열화 때문에 삶의 다양성이 파괴된다면, 누구나 무엇을 하며, 어떤 직업을 갖든 생계유지는 물론 사회에 기여한다는 사회적 인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업종이나 직종 간 임금 격차, 더 나아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해소가 필요한 것은 삶의 다양성 보장은 물론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돈을 기준으로 한 획일적 서열화가 무한 경쟁을 통해 강화된다면, 사회적으로 경쟁을 축소하고 협력을 확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교육영역에서 대학이 평준화되고 독일처럼 대학 입학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어느 대학이든 입학할 수 있다면, 대학 입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만 남과 경쟁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현재의 경쟁 교육 체제를 탈 경쟁화할 뿐만 아니라, 협력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도입할 수 있다면, 한국 사회에서 경쟁과 이로 인한 사회적 무시는 극적으로 축소될 것이다.

또한 경제영역에서 무한 경쟁과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가 확대된다면 그만큼 사회적 협력은 확대될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영역에서 승자독식의 선거제도가 아니라 득표율에 기초한 비례대표제가 확대되고, 정치적 공론장이 활성화되어 대화와 토론을 통한 공론 형성이 중요해진다면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협력적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분명 다양한 삶을 보장하는 것과 돈을 위한 무한 경쟁을 축소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나 선호하는 직업이 다양해지면 그만큼 경쟁은 분산되고 서열화는 약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이라는 획일적 기준을 통한 서열화와 이로 인한 경쟁이 완화되면, 사람들은 돈이 아닌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

이렇게 삶의 다양성이 증대되고 사회 전체적으로 경쟁이 축소할 뿐 아니라, 협력이 확대되면 자존감 있는 삶이 가능하다. 경쟁이 서열화를 낳고 사회적 무시로 이어진다면, 협력은 서로를 동등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 유지를 위해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상보적 동반자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품격사회는 진보적인가?

그렇다면 이렇게 사회적 무시, 획일적 서열화, 무한 경쟁을 넘어서 협력 관계 확대를 필요로 하는 품격사회는 과연 진보적일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나라이다. 그러나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에서 개인의 자유란 외적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선호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이런 자유는 항상 경쟁 관계에서 실현되는 자유이기 때문에 경쟁의 승자는 자유를 실현하지만, 경쟁의 패자는 부자유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에 반해 협력 관계에서 개인의 자유가 실현된다면, 나의 자유 실현이 타인의 자유 실현을 촉진하게 됨으로써 자유의 불평등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김대중 정부부터 진보 정부 역시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유주의 전통에 서 있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이들이 표방한 자유주의는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로 명명된 대안적 자유주의 전통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자와 약자의 힘의 불균등은 물론 강자는 자유롭고 약자는 부자유스러운 자유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강자의 권한을 제한하고 약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기업 활동을 규제하고 노동자 권리를 강화하는 것, 부자 증세를 통해 사회복지를 확대하는 것, 경제민주화를 추진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문성훈 서울여대 교수(현대철학)ⓒ 필자 제공

그러나 이런 식의 진보적 자유주의는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약자의 자유를 위해 강자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항상 역차별이란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한 강자의 저항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격사회는 이와 다르다. 품격사회는 경쟁을 전제로 단지 약자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 훼손의 원인이 되는 경쟁 관계 자체를 축소하고 협력 관계를 확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협력 관계를 확대하면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개별적으로 비교하면 능력이 다르고 역할이 다른 사람이라도 협력 관계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보완하는 동등한 존재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품격사회는 강자와 약자 사이의 격차 해소만이 아니라, 격차의 근본적 원인인 경쟁을 축소할 때 가능하다. 김민석 대표가 격차사회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품격사회는 여전히 경쟁을 전제한 진보적 자유주의에 머물러 있을까? 아니면 이를 넘어선 새로운 진보 비전일까?

참고문헌

문성훈, 『새로운 사회적 자유주의』

아비샤이 마갈릿, 『품위 있는 사회』

악셀 호네트, 『인정 투쟁』

----------, 『노동하는 주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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