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SRT 통합, 국가기간산업을 지켜낸 한국 사회의 저력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국가 기간' 철도 13년을 돌고 돌아, 마침내 시민 품으로

2026년 9월 1일은 개인적으로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과연 그날이 올까?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듣고도 멍하니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함성을 내질렀다는 한 어르신의 말도 생각났다. 이날 한국철도의 지극히 이상한 존재였던 SR, 수서고속철도 주식회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저녁 시간 찾은 대전역은 평소와 다름없이 열차를 이용하는 시민들로 북적였다. 군중의 평범한 일상에 이 특별한 날이 숨어 있는 듯 보였다.

2012년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였다. 정부는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개통 예정인 수서로 이어지는 고속선의 지선을 빌미로 새 민영 철도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나는 이때 민자 지하철이었던 서울 지하철 9호선의 회사 체계와 재정구조를 분석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해에 '매쿼리한국인프라'라는 회사가 지하철 9호선의 2대 주주로 부상했다. 1대 주주와의 지분 차이는 불과 0.47%였다. 운영사는 베올리아라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한국교통연구원 본부장은 KBS뉴스에 출연해 수서발 고속철도 민영화는 지하철 9호선과 같은 효율적인 회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국토부는 민간 기업들에 사업제안 설명회를 개최하면서 속전속결로 수서고속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시민들은 민영화가 가져올 결과들 – 수익은 투기자본과 기업이, 손실은 시민에게 –을 많은 민자 도로와 다리를 통해 알고 있었다. 민영화 추진에 대한 사회적 분노는 다음 해 집권한 박근혜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졍부는 수서고속철도 민영화를 철회했지만 끝난게 아니었다. 민영화를 통한 경쟁체제에서 민영화를 빼고 경쟁체제로 철도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정부는 적자를 양산하는 부실 공기업 코레일을 개혁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했다. 철도 적자의 상당 부분은 철도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시됐다.

철도노조와 시민들은 경쟁체제는 철도 민영화로 가는 우회로이며 적자 개선도 시민 편익도 달성할 수 없다며 고속철도 분리 정책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2013년 12월 10일 수서발 KTX법인 설립을 위한 코레일 임시 이사회를 개최했다.

수서발 고속철도 설립안이 통과된 다음 날 언론 매체들은 당국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114년 철도 독점 드디어 무너지다"라는 식의 헤드라인을 앞다투어 내걸었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 전후 지독한 가난과 경제개발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국민의 발이 되었던 역사는 독점이란 낙인 뒤에 가려졌다.

▲서울 강남구 수서역 SRT 역사의 모습 ⓒ연합뉴스

철도노조는 파업에 돌입했다. 정부는 불법파업으로 규정했고 지도부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6000명에 이르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직위해제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2월 22일 경찰은 파업 지도부가 경향신문 건물에 민주노총 사무실에 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체포 작전에 나섰다. 절단기와 해머를 든 경찰들이 잠겨진 경향신문 1층 로비의 유리문을 부수는 장면이 생중계되었다.

정부의 강경대응에 움찔하던 철도노조를 살린 것은 시민들이었다. 파업만 하면 온갖 욕설 전화를 받아야 했던 노동조합 사무실에 힘내라는 격려 전화가 쏟아졌다. 사무실 벽에는 연예기획사 복도에 붙은 팬클럽 게시판처럼 전국 각지에서 온 격려 편지가 붙었다.

대학가에서는 "안녕하십니까?" 열풍이 불었다. "정부가 철도를 민영화하려고 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철도노동자 6000명이 직위해제되었다고 합니다. 학우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한 장의 대자보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 행동이 전국의 대학가로 퍼져나갔다. 철도 민영화에 대한 분노는 취업 문제를 비롯해 청년들 앞에 닥친 현실 문제들을 기성 사회에 던지기 시작했다.

2013년,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 1년을 보내면서 이런 식의 세월을 4년 더 보내야 한다는 거대한 사회적 절망과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철도노조의 파업은 시민들의 심장을 깨우는 트리거가 되었다. 철도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시민들의 가슴에 담겼다.

철도파업이 끝나고 시작된 2014년 새해는 유난히 추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더 추운 봄이 왔다. 아침까지 이어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기 전, 틀어놓은 TV 화면 밑으로 "제주 수학여행 학생 태운 여객선 좌초, 전원구조"라는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부모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하며 잠을 청했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정규방송이 중단되어 있었다. 이후로는 한참 동안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2013년 12월 14일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며 서울역 광장에 모인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2013년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이 대합실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프레시안(박세열)

시간이 흘러 2016년이 되었다. 세월호 아이들의 부모들은 아직도 거리에 있었다. 여름이 지나면서 뉴스의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이 되었다. 비선실세 의혹이 커지고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이후 벌어진 일들이 하나하나 드러났다.

마침내 12월 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같은 날 수서역에서는 SRT가 축포 속에 첫 운행을 시작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기획한 프로그램이 현실화되는 날 그 상징적 당사자는 몰락했다. 이날은 기쁘면서도 슬픈 날이었다.

해가 바뀌자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2017년은 모두가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시민의 힘으로 무도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켰다는 자부심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만장일치로 박근혜를 탄핵했다. 서울역 대형 TV 앞에 모여 있던 시민들과 철도노동자들은 선고가 이뤄지자 모두 일어나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했다. 코레일과 SR이 통합되리라 생각했다. 새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고속철도 통합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국토부 수장으로 철도노조를 지지하고 민영화를 반대했던 김현미 장관이 임명되자 통합의 프로세스가 곧 진행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구축된 철도 경쟁체제는 균열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통합 논의가 미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집값에 서민들은 분노했다. 한국이 부동산 늪에 빠지고 철도 통합 이슈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와이셔츠 단추가 터질 듯 온몸으로 하늘 향해 어퍼컷을 날리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

2024년 겨울 국회에 헬기가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국민을 우습게 봤다. 정권은 무너진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위기에 빠졌던 공화국의 정신, 공공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다시 주목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고속철도 통합의 시동이 걸렸다. 고속철도 통합은 이념 문제가 아니다. 고속철도 수혜지역을 넓히고 좌석도 훨씬 더 많이 공급하며 일반철도와의 연계도 확대해 국민 편익을 높이는 일이다. 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 어째서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막혀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축제의 날이어야 할 고속철도 통합 운행 첫날인 9월 1일의 철도 현장은 조용했다. 29일 발생한 의왕역 사고로 동료를 잃은 마당에 웃고 있을 수가 없었다. KTX와 SRT의 통합은 철도 개혁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점이다. 철도에 물려있던 족쇄가 떨어져 나간 것에 불과하다.

더 이상 현장의 노동자가 죽거나 다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철도가 지역을 잇는 혈관이 되기 위해 그 기능과 역할을 더 확장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더욱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부여된 철도의 역할을 더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9월 1일 실현된 고속철도 통합은 한국 사회의 저력을 확인하고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민영화와 분절화된 경쟁체제로 큰 수렁에 빠질뻔한 국가 기간 산업을 마침내 지켜낸 것이다. 이미 진행된 분리 정책이었다. 비가역적으로 보였던 잘못된 체제를 결국에는 되돌려낸 사회적 역량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발전을 이루는 큰 자산이 될 것이다.

13년 동안 쉬지 않고 국민의 철도, 고속철도 통합을 위해 힘썼던 철도노동자들과 공공철도를 지지해 주신 시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또 흔들림 없이 철도 통합 과제를 완수해 낸 국토부와 이재명 정부에게도 감사드린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