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태어난 존", 권력자들을 향해 끝없이 소송을 걸다

[인물로 본 세계사] 왕도 의회도 크롬웰도 두려워한 남자, 존 릴번

감옥이 안방이었던 남자

역사에는 유독 감옥에서 더 유명해진 인물들이 있다. 존 릴번(John Lilburne, 1614~1657)이 바로 그런 경우다. 잉글랜드 북부 더럼 지방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런던으로 상경해 포목상 견습생 노릇을 하다가, 청교도 서적 밀반입이라는 다소 소박한 죄목으로 인생 첫 감옥살이를 시작한다. 1638년, 그는 채찍질과 칼 씌우기 형벌을 당하면서도 재판정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을 이유가 없다"고 당당히 외쳤다. 오늘날로 치면 진술거부권을 스스로 발명해 즉석에서 써먹은 셈이다. 이 사건 하나로 그는 "자유롭게 태어난 존(Freeborn John)"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 별명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슬로건이 된다.

왕도 싫고 의회도 싫고 크롬웰도 싫다

릴번을 감옥에서 꺼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그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될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이었다. 1640년 장기의회(Long Parliament)가 그를 석방했고, 1642년 내전이 터지자 릴번은 의회군 대위로 참전한다. 장기의회는 1640년 11월 3일에 소집되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비용을 마련하려고 소집했다가 해산시키지 못하고 무려 1660년까지 이어졌다고 해서 "장기(long)"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릴번의 특기는 아군도 못 알아보고 들이받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는 왕당파와 싸우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의회와 군 지휘부의 부패와 특권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병사들은 피 흘리며 싸우는데 지휘관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린다는 것이 그의 단골 비판소재였다. 결과는 뻔했다. 1645년부터 그는 또다시 감옥, 그리고 또 감옥, 그리고 또 감옥에 들어간다. 릴번의 인생 그래프를 그리면 감옥 입출입 표에 가깝다.

수평파, "재산은 몰라도 권리는 평등하게"

이 감옥살이 와중에 릴번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형성되는데, 이들이 바로 수평파(Levellers)다. 흥미로운 점은 릴번 자신은 이 명칭을 싫어했다는 것이다. "수평파"라는 이름 때문에 사람들이 재산까지 똑같이 나누자는 얘기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재산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한 쪽은 제라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 1609~1676)가 이끈 "진짜 수평파(True Levellers)", 즉 "디거스(Diggers)"였다. 원래 디거스 스스로는 "진짜 수평파“라 자칭했고, "디거스"는 주변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1649년 4월 1일, 윈스탠리가 앞장서서 서리 지방 세인트 조지스 힐(St George's Hill)의 공유지를 점거하고 경작을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디거스, 즉 "진짜 수평파"라 자칭한 무리였다. 하지만 이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역 지주들이 디거스의 활동에 위협을 느껴 1650년 무장한 사람들을 고용해 디거스를 구타하고 그들의 정착지를 파괴했다.

릴번이 원한 것은 단순했다. 선거권 확대, 법 앞의 평등, 종교의 자유. 그는 이것을 "자유민의 권리"라 불렀고, 이는 국가나 군주가 하사하는 특권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권리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기본권 개념의 원형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배심원단, 권력의 손을 뿌리치다

릴번의 진가는 법정에서 드러난다. 1649년 반역죄로 기소되었을 때, 그는 판사가 아니라 배심원단을 향해 직접 호소했다. "법이 부당하다면 그 법을 적용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 자체가 불의"라는 논리였다. 놀랍게도 런던 배심원단은 권력의 압박을 뿌리치고 무죄를 평결했다. 1653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런던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환호했고, 이는 크롬웰 정권을 긴장시킬 만큼 큰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판사의 지시가 아니라 시민 배심원의 양심이 최종판단을 내린다는 원칙, 이것이 릴번 재판이 남긴 유산이다.

말년의 반전, 퀘이커가 되다

평생을 싸움닭처럼 살았던 릴번은 뜻밖에도 말년에 퀘이커로 개종한다. 도버 성에 갇혀 있던 시절 조용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퀘이커교도들을 만나면서였다. 그렇게 끝없는 소송과 저항으로 점철된 인생의 마지막 장을 그는 내면의 평화를 찾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1657년, 아내가 열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그를 찾아온 여름, 릴번은 켄트 지방 엘섬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에 던지는 질문

릴번의 일생을 읽다 보면 자연히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비상계엄 선포가 떠오른다. 윤석열이 국민의 기본권을 하룻밤 사이에 정지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순간, 정작 그 권력을 제어한 것은 무엇이었나. 국회의 신속한 표결이었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이었고, 이후 이어진 사법절차 속에서 진술거부권을 비롯한 절차적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릴번이 380년 전 감옥 안에서 외쳤던 "나는 나 자신을 고발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는 그 한마디는, 오늘날 내란혐의를 다투는 법정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원칙이다. 권력자의 편의가 아니라 시민배심원과 독립된 사법부의 양심이 최종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 또한 마찬가지다.

릴번은 결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동료들과도 자주 다퉜고 자기 확신이 지나쳐 고집불통이라는 평도 받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명확하다. 권리는 위에서 내려주는 선물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것이며, 그것을 지키는 일은 감옥살이를 몇 번을 반복해서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계엄이라는 이름의 밤이 다시 찾아오지 않도록 하는 힘은, 결국 릴번처럼 끝까지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말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고집에서 나온다.

▲존 릴번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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