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뺑뺑이, 지역의료 불평등은 왜 해결되지 않을까

[시민건강논평] 지역의료 불평등 지식 생산체계의 문제점과 대안

오늘은 4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다. 그러나 아직 그 역사를 마땅히 기리지 못하고 있다. 헌법 전문에 5.18 민주화운동과 부마항쟁을 명시하고, 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한 강화를 추가하는 개헌 국민투표를 6.3지방선거에서 동시 실시하려던 시도가 국민의힘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것은 선거 국면에서 입법 권력 간의 대결 그 이상이다. 법치국가에서 헌법과 법률, 제도와 행정사무의 기준이 되는 한 문장, 한 단어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미셸 푸코는 진실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진리와 법적 형태들>, 1974). 진실을 생산하는 절차(누가 측정하고, 무엇을 측정하며, 누가 그 결과를 인증하는가)는 곧 무엇이 현실로 존재하는가를 판가름한다.

작은 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병원이 있는 큰 섬에서도 육지에서라면 응급 치료와 수술로 살 수 있었을 사람들이 후송에만 몇 시간씩 걸리는 배 안에서, 길 위에서 죽는다. 아니, 육지라고 안전하지도 않다. 얼마 전 청주에 살던 산모는 전국 41개 병원에 연락을 하고도 응급 분만병원을 찾지 못해 아이를 잃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정치공동체란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그 본질이다. 그런데 왜 이 일들은 세상을 바꾸는 지식이 되지 못하는가. 왜 정치를 움직이는 진실의 힘을 갖지 못하는가.

한국의 지역 보건의료 불평등을 둘러싼 지식과 진실은 누가 생산하는가. 공식적으로 보건복지부의 의료자원통계,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진료비 데이터를 통해 주민들이 보장받는 의료서비스의 실체가 구성된다.

그렇다면 몇 시간씩 배를 타고 온 섬 주민의 진료와 집 앞 10분 거리에 병원이 있는 도시 주민의 진료는 같은 이용량이 될 수 있는가? 진료할 의사가 없는 무늬만 병원일 뿐인 섬 병원은 지하철 역 앞에 줄지어 늘어선 도시의 병원과 같은 1개의 시설로 수치화해도 되는가? 50세만 되면 두 팔을 들어 옷을 입을 수 없다는 농촌 여성의 근골격계 질환은 도시 여성의 그것과 같은 병인가?

브래드쇼(<A taxonomy of social need>, 1972)는 사회적 서비스와 관련된 필요는 측정방식과 행위 주체에 따라 상이하게 구성된다고 말한 바 있다. 섬과 농촌 주민들이 절실히 감각하는 필요는, 전문가나 제도에 의해 정의되는 규범적 필요나 의료이용량을 바탕으로 사후적으로 측정되는 표현된 필요와 달라서 공식 보건의료체계 안에서 정책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진실 생산 절차의 권력은 측정이 된다고 하더라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데서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난다. 진료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접근성의 문제들은 참고사항일 뿐이고,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같은 증상은 해결해야 할 지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국제비교에서 유독 최저 수준인 공공병원 병상 비율은 2002년 18.5%에서 2023년 9.5%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OECD 평균(71.6%)과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동안, 이 수치는 정책 의제가 되지 못했다. 데이터가 없어서가 아니다. '열악한 공공병원'이라는 사실이 권력을 갖지 못한, 부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한 '심문'의 권력은 여기서 작동한다. 심문은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무엇을 사실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 행사이며 정치 행태다. 가령 예비타당성조사는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을 평가항목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지역 공공병원 설립에는 경제적 파급 효과를 따지며 접근성이 박탈된 주민들의 고통을 묻지 않는다. 이런 선택 자체가 예타가 중립적 조사가 아니라 진실을 확정하는 권력임을 보여준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아예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어 진료를 포기한 사람은 통계에 등장하지 않는다. 미충족 의료는 측정되지 않고, 이용되지 않은 의료는 수요가 없는 것으로 처리된다. 병원이 없으니 수요도 없고, 수요가 없으니 병원도 필요 없다는 자기완결적 논리가 순환한다.

비가시화는 또 다른 방식으로도 작동한다. 공식 통계가 불평등을 포착할 때도, 그것을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다. 농촌 주민들의 건강검진 수검률이 낮다는 사실은 검진 인프라의 부재나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건강관리의식의 부족으로 연결된다. 하루에 두 번 뜨는 배를 타고 반나절이 걸리는 진료를 포기하는 것은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시험'의 논리가 작동한 결과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지역보건의료 불평등을 개선하지 못하는 현재의 진실 생산 절차와 진실을 확정하는 권력을 문제 삼아야 한다.

첫째, 주민의 관점에 의거한 측정 틀로 바꾼다. 사회적 서비스의 필요 기준이 제공자가 아니라 이용자를 중심으로 달라져야 한다. 화폐 수익을 보장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섬과 농촌 주민의 의료공백을 '없음'으로 처리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다. 주민들이 포기한 진료, 이동에 걸리는 시간, 해결되지 못한 응급상황을 측정하고 가시화해야 한다.

둘째, 진술 자격을 확장해야 한다. 지역보건의료 정책의 결정권은 중앙정부와 전문가에 집중되어 있다. 오랫동안 섬에서 살아온 주민의 경험, 고령자들만 남은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보건진료소 간호사의 현장 지식은 에피소드가 아니라 생생한 데이터이다. 전문가 지식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주민들의 축적된 지식들이 의사결정의 공식 절차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야 한다.

셋째, 정부의 표리부동함을 문제화해야 한다. 정부는 공공병상을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울산처럼 공공병원을 설립하자는 수십만 지역주민들의 서명과 지자체의 자체 용역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중앙정부의 조사와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불허했다. 그렇게 결정한 근거를 해명해야 한다.

섬과 농촌의 보건의료 불평등은 어떤 현실이 진실로 확정되는가, 누구의 고통이 측정되는가, 누구의 목소리가 정책 언어로 번역되는가의 문제다. 진리가 권력의 산물이라면, 역사적 주체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힘을 가질 수 있다. 선거는 권력관계의 불평등과 지식의 정치성을 공론화하는 시간이다. "몫 없는 자들"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할 때, 진실 생산의 권력관계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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