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체제 전환'을 바라는 이란 민중의 목소리

[장석준 칼럼] 미국·이스라엘의 전쟁이 무너뜨리는 것은 '레짐'이 아니라 민중혁명의 가능성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이 6주차에 접어들었다. 이란 국민을 비롯해 세계인은 지금이라도 트럼프가 공격 중단 명령을 내리길 학수고대하지만, 미국 정부는 오히려 '이란을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어쩌면 미 지상군 투입이라는 끔찍한 제2막이 열릴지 모르며, 미국-이스라엘 측의 전술핵 사용 가능성까지 입에 오르내리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대다수 세계인의 마음이 미국과 이스라엘보다는 이란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이게 인지상정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미쳐 날뛰는 폭력배를 미워하고 불의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응원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 미국 정부는 이런 이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해보려는 생각조차 없다. 이런 '제국'이 오래 버틸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안다. 지금, 호르무즈 해협에서 붉게 타오른 거대한 낙조가 지구 위를 덮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란 '정부'를 영웅처럼 떠받들 수도 없다. 현 상황에서는 미국, 이스라엘 정부에 비해 이란 정부가 인류사의 정도(正道)에서 조금은 덜 벗어나 있다고 평가할만하지만, 그래도 이 정부는 미국-이스라엘이 공격해오기 직전까지 자국민 수천 명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전시'라는 이유로 평소보다 더 빈번히 정치범들을 사형대로 보내고 있다. 이것은 결코 적들의 더 큰 죄악을 이유로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 있는 죄악이 아니다. 포화가 일단 잦아들고 나면, 이 죄악에 대한 추궁은 반드시 재개되어야 한다.

사실 전쟁 한 복판에서 이렇게 전선의 양쪽 모두에 거리를 두며 사태를 바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좌든 우든 가릴 것 없이 많은 이들이 '진영론(campism)'에서 안식을 찾는 형편이다. 푸틴 독재에 반대한다면 무조건 우크라이나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가 만악의 근원임을 안다면 러시아 군을 편들 수밖에 없다는 식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더욱 만연하게 된 이런 태도가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을 둘러싸고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의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본 적이 있다면 누구도 이런 '진영론'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20세기는 '진영론'식 이분법에 갇혀서는 몸도 마음도 남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다행히 나는 광장이나 화두같은 작품을 통해 지난 세기의 뼈저린 교훈을 모국어로 전해준 최인훈 선생 같은 스승들(더 열거하자면, 김학철, 함석헌 등등) 덕분에 이런 종살이를 용케 피할 수 있었다. 또한 다행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 양쪽에서도 '진영론'을 넘어서는 시각으로 현지 상황을 전하는 자유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러시아 안에서는, 한때 푸틴 정부에 기대를 걸기도 했지만 침략 전쟁이 시작되자 단호히 반전의 깃발을 들어 투옥된 고참 사회주의자 보리스 카갈리츠키(Boris Kagarlitsky)나, 보다 젊은 세대로서 러시아 바깥에 현대 러시아 좌파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리야 부드라이츠키스(Ilya Budraitskis)가 그런 이들이다. 우크라이나 쪽에도 이런 이들이 있다. 친러파도 친서방파도 아닌 우크라이나 좌파의 입장을 전달하는 볼로디미르 이쉬첸코(Volodymyr Ishchenko)가 대표적인 예이고, 사회주의자이면서 전장에 직접 뛰어들어 우크라이나를 지키고 있는 타라스 빌로우스(Taras Bilous)의 존재와 그 독특한 입장을 알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미국-이스라엘의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는, 현재 그리스에 망명 중인 이란 좌파 지식인 시야바쉬 샤하비(Siyâvash Shahabi)에게서 바로 이런 반-진영론적 목소리를 발견했다. 역설적이게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이스북 덕분이었다. 페이스북이 쉴 새 없이 추천하는 '디지털 크리에이터'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샤하비를 통해 듣는 소식과 해석은 1월의 학살을 직시하는 데에도, 3월의 전쟁을 쫓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샤하비 덕분에 다시, 이란 내의 좌파 웹사이트 <비판(Naghd)>(naghd.com)을 알게 되었고, 거기에서 현재 이란 시민사회 지형을 전하는 야샤르 다롤샤파(Yashar Darolshafa)의 생생한 글 '혁명, 레짐 체인지 그리고 전쟁에 직면한 네 부류의 사람들'과 만났다.

▲ 지난 3월 7일 오후 이란 테헤란의 석유 저장 시설이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인 모습. ⓒAFP=연합뉴스

이란 좌파가 전하는 이란 사회의 네 가지 흐름

다롤샤파는 샤하비처럼 좌파 성향 운동가다. 그러나 1970년대-80년대 이란혁명 와중에 활동한 페다인이나 인민 무자헤딘, 투데당 등과 연결되는 구좌파 세대는 아니다. 이슬람공화국이 자리잡은 지 한참 지난 2000년대부터 주기적으로 터져나온 학생운동,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을 통해 새롭게 좌파 이념을 받아들인 세대에 속한다. 샤하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랫동안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고 한다.

다롤샤파가 3월 27일자로 <비판> 사이트에 올린 글 '혁명, 레짐 체인지 그리고 전쟁에 직면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이 사이트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어로 씌어 있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침략자 미국의 빅테크 '구글' 덕분에 우리말로 자동번역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전히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대목들이 있었으나 대의를 파악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확실히 테크놀로지는 전쟁도 바꿔 놓았지만, 전쟁에 맞서는 국제연대의 잠재력 역시 바꿔 놓았다.

다롤샤파의 글은, 시위와 학살, 전쟁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지금 이란인들이 '생존', '자유', '변화'를 절박한 현안으로 고민해야 하는 전례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지적하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간 이란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뭉뚱그려지던 사람들 사이에 세계관과 이해관계의 차이와 충돌이 선명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미 서방 언론들은 하메네이의 순교에 절규하는 군중과 팔레비 왕가의 귀환을 외치는 군중을 대비시키며 이런 분열과 대립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롤샤파가 보기에 이란인들은 단지 이 두 흐름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적어도 네 가지 흐름이 있다.

다롤샤파가 말하는 네 가지 흐름 중에서 우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 흐름부터 살펴보자. 다롤샤파는 쿠드스의 날(예루살렘의 날, 라마단의 마지막 금요일)에 하메네이를 비롯한 이슬람공화국 지도부 내 '순교자'들을 기리며 운집한 사람들부터 짚는다. 바로 미국, 이스라엘 정부가 '레짐 체인지'의 대상으로 선포한 이슬람공화국 체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란인들이다. 다롤샤파는 이들을 '이맘 후세인(무함마드의 외손자이자 시아파의 제3대 이맘, 순교자)의 사람들'이라 부른다.

서방 언론은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을 시아파 광신도 혹은 신정 체제의 떡고물에 길들여진 낙후한 집단쯤으로 취급한다. 다롤샤파도 이슬람공화국을 비판하는 좌파이므로 비슷한 시각이겠거니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롤샤파의 시선은 다르다. 연초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이 총격에 굴하지 않고 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 역시 미국-이스라엘의 포화에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광장에 모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월 학살의 희생자들처럼 이들도 '정의'에 대한 나름의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다만 이들에게 '정의'의 기둥이 미국-이스라엘에 맞서는 현 정부란 점이 반정부 시위대와 다를 뿐이다.

이것은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이 군사적 위협이나 전쟁의 결과 따위에 굴하지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오히려 적국의 공격이 강해질수록 이 대오는 강해질 것이다. 더구나 다롤샤파가 보기에 이들의 대다수는 신정 체제의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즉 기층 민중이다. 이란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이 이 흐름에 속한다. 그래서 다롤샤파는 현 체제는 공격하되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과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란 사회 내의 두 번째 흐름은 아마도 트럼프 머릿 속에 들어 있을 '이란인'의 전형일 것이다. 다롤샤파는 이들을 '사자와 태양(혁명 전 이란 국기에 사용된 상징)의 사람들'이라 칭한다. 이 칭호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은 시위에서 '팔레비 왕가 복귀'를 외쳤던 이들과 상당히 겹친다. 1월 시위가 학살로 끝난 뒤에 이들은 신정 체제 타도를 위해서라면 적국의 침략이라도 반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다롤퍄사에 따르면, 이처럼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군대를 '해방군'으로 반길 이들이 현재 이란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

정치혁명-사회혁명을 바라는 이란인들이 있다

그러나 다롤샤파는 이란인들이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과 '사자와 태양의 사람들'로 양분된다는 이란 바깥의 시각은 이란 사회의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또 다른 흐름들, 세 번째와 네 번째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란 사회에 '제3세력'이라 할만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서방 언론도 모르지 않는다. 녹색운동, 히잡 반대운동 같은 대중적 저항운동이 폭발할 때마다 이슬람공화국 체제 내부의 개혁파뿐만 아니라 이들의 요구를 뛰어넘는 시민사회 내 세력들이 있음이 알려졌다. 이란은 확실히 북한과는 다르며, 중국이나 베트남보다 훨씬 더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뿌리 내린 사회다. 비록 신정 체제의 탄압이 지속되기는 하지만, 이슬람공화국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사상들, 운동들이 어떻게든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란의 뛰어난 영화들이 정권의 일상적 탄압과 시민사회의 끈질긴 지속이라는, 모순된 현실의 살아 있는 증거다.

다롤샤파는 곳곳에서 포성이 울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포화에 희생되는 지금도 이란 사회 안에 이 '제3세력'이 끈덕지게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이들은 학살에 굴하지 않고 기존 체제를 바꾸는(미국인들이 '레짐 체인지'이라고 졸속 번역한) 운동을 이어가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국-이스라엘의 침략을 그런 변화에 도움을 줄 계기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이란의 진정한 체제 전환은 이란인들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외세의 개입은 오히려 이를 방해, 교란한다고 확신한다. 이란 바깥에서 바라보는 우리는 이슬람공화국의 반대편에 '사자와 태양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런 또 다른 강력한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롤샤파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3세력'이 실은 다시 두 흐름, 즉 세 번째와 네 번째 흐름으로 나뉜다고 지적한다. 체제 전환을 정치혁명으로 한정하는 흐름이 있는가 하면 정치혁명에서 더 나아가 사회혁명을 지향하는 흐름도 있다는 것이다. 후자는 물론 다롤샤파가 속한 좌파-사회운동 세력이다. 다롤샤파의 주장을 들어보자.

“세 번째 흐름과 네 번째 흐름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 지점은 체제 전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만약 이슬람공화국 정부가 추진하는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정책들이 내용은 그대로인 채 오직 형태만 '세속적'으로 바뀐다면, 애초에 변화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이란 사회에서 거듭돼온 민중 봉기의 주요 쟁점은 임금과 가계 생계비의 격차를 줄이고, 사회보험 가입자와 연금 수급자들이 직접 보험 기금을 관리하게 하며, 계약직 폐지를 통해 고용 안정을 확보하고, 생산 · 서비스 · 교육 기관을 노동자와 훈련생들이 운영하도록 하며, 이란 내의 억압받는 소수 민족에게 자결권을 보장하고, 노동계급과 하층계급의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위해 차별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제거하며, 이윤과 지대 논리로부터 지구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요구들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떤 형태의 정권 교체든 결국 [1978-79년의 혁명처럼] 반혁명으로 귀결될 뿐이다.”

다롤샤파가 제시하는 요구들은 자본주의 중심부, 주변부 가릴 것 없이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내용이다. 즉, 이란 민중이 이슬람공화국 체제를 넘어 실현하길 바라는 세상은 다른 많은 나라의 민중이 추구하는 목표와 다르지 않다.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 대 '사자와 태양의 사람들' 구도에 익숙한 이들(친서방파든 반서방파든)에게는 이란 사회에'도' 이런 목소리가 있다는 게 낯설지 모른다. 그러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 같은 영화를 본 이들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과 동지들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다 신정 체제의 공안기관에게 고문을 당한 인물들이다.

다롤샤파가 전하는 '네 번째 흐름'은 다름 아닌 <그저 사고였을 뿐> 속 등장인물들과 같은 현실의 이란인들이다. 그들은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공격 명령을 내리기 전에도 진정한 체제 전환을 위해 싸워왔고, 저들의 공격이 멈춘 뒤에도 늘 그랬듯이 투쟁을 이어갈 사람들이다.

공습은 민중을 학살할 뿐만 아니라 민중혁명을 말살한다

다롤샤파의 전망은 냉정하다. 미국-이스라엘의 공격이 계속될수록 이란 안에서는 '이맘 후세인의 사람들'의 단결과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다. 반면 '사자와 태양의 사람들'의 환상은 깨질테고, 이란 사회에서 설 곳이 더욱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다롤샤파가 세 번째, 네 번째 흐름이라 분류한 이들의 투쟁 역시 힘들어질 것이다. 다만 다롤샤파는 정치혁명만을 추구하는 세 번째 흐름보다는 민중운동에 토대를 둔 네 번째 흐름 쪽이 더욱 강인하게 투쟁을 이어가지 않겠냐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아무튼 이것은 전반적으로, 트럼프가 전쟁의 목표라고 처음에 내놓았던 '레짐 체인지'와는 정반대되는 결과다. '레짐'은 바뀌기는커녕 단기적으로나마 더욱 강화됐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국과 이스라엘, 적어도 이스라엘이 애초에 의도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란인들 자신에 의한 변화의 시작을 막는 것 말이다.

공습이라는 전쟁 형태가 이런 결과를 낳기 쉽다는 것 역시 실은 20세기의 처절한 교훈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모습을 드러낸 현대전은 교전국 내부의 사회적 총동원을 수반했고, 이는 다시 대중의 전례 없는 진출, 즉 대중혁명(1917년 러시아)이나 인민전쟁(제2차 세계대전 중의 중국,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의 가능성을 열었다. 지배 세력 입장에서는 이를 상쇄할 또 다른 현대전의 논리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양차 대전 중에 급속히 진화한 공격 형태인 공습이다.

실제로 공습은 전쟁에서 대중의 수동성을 최대화하고 그 능동성을 최소화한다. '석기 시대로 되돌린다'는 미군 지휘부의 상투어구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등의 공습이 다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쟁 논리의 완결판이 곧 핵무기의 등장이다.

즉, 트럼프의 허풍과 달리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레짐'이 아니라 이란 민중에 대한 무차별 공격이다. 아니, 공습은 민중을 학살할 뿐만 아니라, '레짐'을 진짜로 바꿀 유일한 계기인 민중혁명의 가능성을 말살한다. 이것이 미국-이스라엘의 공격이 당장 중단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다.

▲이란의 한 초등학교를 공습한 미사일로 인해 숨진 아이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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