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오래전 연세 지긋한 어르신 한 분이 재단을 찾아오셨습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당신을 포항 구룡포에서 농사짓는 황보태조라고 소개하시더니, 책을 썼는데 인세를 기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황보태조 선생님은 수줍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책의 인세 모두를 기부하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포항 인근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빚을 많이 졌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지난해 빚을 모두 갚게 됐습니다.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다가 푸르메재단이 떠올랐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그렇게 기부한 인세는 무척 큰 금액이었습니다.
황보 선생님은 구룡포에서 서울에 올라오면 구기동 아들 집에 묵는데, 서울역에서 구기동으로 가는 버스가 늘 푸르메재단 건물 앞을 지난다고 합니다. 계속 보이는 저 건물의 정체를 궁금해하다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를 돕는 단체라는 걸 알고 기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인세 기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성사된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게 농사를 짓는 분이 평생 진 빚을 갚아서 감사하다며 기부를 하시겠다니,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어느 청년 농부의 삶
1946년생 황보 선생님은 당신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라는 뜻이지요. 어린 시절 함께 살던 할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손자와 며느리를 붙잡고 죽은 아들을 원망했습니다. "그땐 아무런 희망이 없었지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붙잡고 물어볼 곳도 없었습니다. 매를 맞아가면서 공부했지만 친척도, 선생님도 무서웠습니다. 제 어린 시절은 어두운 골목을 한없이 맴도는 기분이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를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할 정도로 마음이 여렸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해 1학년 때 자퇴를 결심할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황보 선생님은 우유 배달을 하면서 노동판에도 뛰어들었습니다. 당시 서울대는 서울 동숭동과 공릉동, 종암동 등에 흩어져 있었는데, 1975년 이를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큰 규모로 공사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황보태조 선생님은 1973년 이 공사에 일꾼으로 참여했습니다. "뙤약볕 아래 처음 하는 육체노동이 힘들었지만 '이 학교는 나중에 우리 아이들이 커서 공부할 곳이다. 무엇보다 튼튼하게 지어야지' 하고 생각하니 힘이 솟았습니다."
아무 연고가 없는 지방 청년에게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교회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었고, 작은 구멍가게(점방)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며 부부는 더욱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황보 선생님은 봉천동 산동네를 떠나 고향인 구룡포 눌태리로 내려갔습니다.
낙향을 결심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늘 점방에서 손님을 맞이해야 했기에 아이들은 방안에 갇혀 지냈습니다. 그 방은 거실이면서 아이들의 공부방이자 창고였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작은 방에서 아이들과 함께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도 겹쳐 보였습니다. 황보 선생님은 아이들을 더는 어두운 골방에 가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경제력 있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시골 아버지의 바짓바람
구룡포 외곽 비탈진 땅 500평에 마늘을 심었습니다. 다행히 작황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익성 좋다는 수박을 심었는데, 수박을 키우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가느다란 호스로 물을 산비탈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박 모종을 심고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땅에 비닐을 씌웠습니다. 여름이 되자 꿈이 영글듯 수박이 크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수박 농사는 대풍이었습니다. 마늘과 수박으로 번 돈을 모아 밭 1000평을 샀습니다. 처음 갖게 된 내 소유의 땅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돈을 벌어 땅을 샀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비록 그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지만 앞으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1000평의 땅에서 어떻게 하면 소득을 높일까 청년 농부는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한 것이 완숙 토마토 농사였습니다.
황보 선생님은 낮에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고 저녁에는 아이들과 재밌게 지낼 궁리를 했습니다. 그렇게 고안한 것이 '공부놀이'였습니다. 두 살, 네 살, 다섯 살 딸에게 종이인형을 사준 뒤 그림 속 인형과 옷, 집, 가재도구를 가위로 오리게 했습니다.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역할극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글을 익히게 했지요. 두 아이가 더 태어나자 과일카드를 만든 뒤 제대로 이름을 쓰면 온 가족이 그 과일을 함께 먹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는 배움이고 학습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 모두 쉽게 한글을 깨쳤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노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너무 잘 그렸구나, 너무 재미있게 노는구나' 하고 칭찬만 했지요. 칭찬보다 더 좋은 인생의 거름은 없습니다." 저녁마다 가족 놀이대회가 열렸습니다. 아이들은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고,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으니 앞다투어 한글과 영어를 익혔습니다.
때때로 아이들과 함께 들판으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벌이 날아와 수박꽃에 수정하는 모습을 관찰한 뒤 붓으로 직접 꽃가루를 묻혀 인공수정을 해보게 했습니다. 황보 선생님은 이처럼 배움을 재밌는 놀이로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교육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들판에 나가 자연을 공부하면서 몸과 마음이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구룡포중학교와 포항제철고의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자식 농사의 비법
선생님에게 자녀교육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물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입니다. 부모가 먼저 책을 좋아해야 아이가 책을 사랑하게 됩니다. 아이의 성향을 잘 파악해 아이에게 맞는 교육 소재와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아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야단치기보다 칭찬해주고 부모가 함께 재미있어하면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되지요. 제가 공부와 가난에 한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책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습니다."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공사에 참여했던 황보 선생님의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딸과 막내인 아들이 의대에 입학한 것입니다. 둘째와 셋째 딸도 의사가 되었고 넷째 딸은 약사가 됐습니다. 유치원은 물론이고 학원이나 과외 수업 한 번 받지 않고서 말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행복해하는지 질문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셋째 딸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다니다가 스물여덟 살에 뒤늦게 의대에 들어갔습니다. 해외 출장을 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원했습니다. 의사인 언니들의 영향도 받았겠지요. 아이들 모두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사는 만큼 만족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농사가 자식 농사라는데 황보 선생님은 토마토 농사뿐 아니라 자식 농사에서도 성공한 셈입니다.
푸르메재단 고액기부자 모임 '더미라클스' 조찬회에 정호승 시인님을 연사로 모신 적이 있습니다. 이날 황보태조 선생님도 참석했습니다. 정호승 선생님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수선화에게',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등의 시를 쓰게 된 배경과 시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등을 설명했습니다. 어린 시절 대구 외곽이었던 범어천에서 학교까지 걸으며 보았던 풍광이 나중에 시를 쓰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명사들을 초청해 듣는 강연이 참 좋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황보 선생님이 정호승 선생님께 다가가 '혹시 대구 계성중학교 출신 아닌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조금 시차는 나지만 두 분은 따뜻한 추억을 남겨준 중학교의 동문이었습니다. 특히 두 분이 다녔던 계성중학교는 1906년 미국 선교사가 영남 지방에서 가장 먼저 설립한 학교로, 1919년 3.1운동 때는 교사와 전교생은 물론 전직 교사까지 참가해 만세를 부른 독립운동의 진원지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있는 학교라 졸업생들이 가지는 긍지도 있어서 더 반가운 것 같았습니다.
배움을 즐기고 실천하는 가족
그럼 책은 어떻게 쓰게 된 걸까요? 황보 선생님은 아이들과의 놀이교육을 소개한 <꿩 새끼를 몰며 크는 아이들>을 2001년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이 책을 보완한 <가슴높이로 공을 던져라>를 출간하면서 받은 인세를 푸르메재단에 기부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교육철학처럼 아이들이 받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로 공을 던져주는 것, 너무 낮거나 높지 않고 능력껏 최선을 다하면 받아낼 정도의 수준으로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책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여든이 된 부인 김화순 님은 늦깎이로 공부해 서강대에서 심리학 학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배움을 즐기고 실천하는 가족입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두 가지 유산은 뿌리와 날개라고 말했습니다. 자녀들에게 뿌리를 기억하게 하면서, 세상으로 나가도록 날개를 달아주라는 뜻입니다. 아마 그런 점에서 황보 선생님은 정말 뛰어난 교육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넉넉한 웃음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배우기를 즐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얼마나 기쁨이 있는 삶일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수십 년 농사를 짓다 남은 빚을 이제 겨우 갚은 것에 감사할 수 있고, 부족하지만 나눌 수 있는 부자가 바로 황보태조 선생님입니다. (끝)
연재를 마치며…
2005년 푸르메재단이 세워지자 함께 꿈꾸는 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푸르메재단을 믿고 뜻과 정성을 모아주신 수많은 기부자와 시민입니다. 장애인을 위해 일할 수 있게 해준 은인들이시지요. 덕분에 지하사무실에서 책상 두 개로 출발한 푸르메재단이 어린이재활병원과 발달재활센터, 복지관, 푸르메소셜팜, 카페 무이숲을 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프레시안의 도움으로 2024년 7월 고 박완서 선생님을 시작으로 푸르메재단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어주신 분들의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님과 강지원 변호사, 고 김정주 대표, 이철재 대표, 이지선 교수, 가수 션 씨, 박점식 회장에 이어 스무 번째 황보 태조 선생님이 기적을 만들어주신 주인공입니다. 이분들을 소개할 기회를 주신 프레시안에 감사드립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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