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파괴와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소식으로 얼룩졌다. 트럼프 대통령 재선 이후, 미국 정부는 '세계 최강국' 지위를 활용해 이주민을 탄압하고 이스라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을 위해 타국에 대한 군사적 개입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에 더해 미국은 2025년에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선언하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저소득 국가들에 대한 자금 지원마저 중단했다. 이같은 거대한 폭력과 퇴행 앞에서 우리는 쉽게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미국 워싱턴대 위예 연구팀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미국 대통령의 에이즈 구호 비상계획(이하 PEPFAR)' 자금 지원이 2025년 갑작스럽게 중단된 사태를 전례 없는 위기로 규정하면서도 이것이 오히려 아프리카 공중보건 및 글로벌 헬스 거버넌스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논문 바로가기: 글로벌 헬스의 중대한 분기점: 역사적 제도주의를 통해 본 '미국 대통령의 에이즈 구호 비상계획' 의존성과 자립적 공중보건 체계의 발전).
PEPFAR는 2003년 출범 이후 전 세계 HIV/AIDS 대응에 중대한 기여를 해왔다. 전 세계 국가의 약 4분의 1이 PEPFAR의 지원을 받아 왔으며, 이 가운데 아프리카 국가는 전체 55개 지원국 중 27개국(49%)을 차지한다. 지금까지 1200억 달러 이상이 투자되었고,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HIV 감염을 예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21년에 걸친 장기 지원과 막대한 재정 투입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PEPFAR 수혜 국가는 외부 원조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속 가능한 국가 주도 HIV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연구진은 이러한 '의존성'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제도가 식민주의 역사에 의해 형성된 구조적 제약과 PEPFAR의 운영 방식이 결합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식민지 시기 아프리카의 정치·경제·보건·교육 제도는 '본국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설계되었고,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제도적 궤도는 쉽게 수정되지 않았다. 그 결과, 외부 자원에 의존하는 방식의 제도 운영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PEPFAR의 운영 방식이 이러한 의존 구조를 오히려 심화시켰다. 첫째, PEPFAR 자금은 HIV/AIDS 분야 종사자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급여를 제공함으로써 의료 인력이 모성보건이나 비전염성 질환과 같은 다른 필수 분야에서 이탈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1차 의료 시스템 전반의 약화로 이어졌다. 둘째, HIV/AIDS처럼 특정 질환을 별도의 재정·인력·관리 체계로 운영하는 수직적 접근 방식이 보건 서비스를 파편화했다. 이는 단기 성과는 빠를 수 있으나 해당 프로그램을 국가 보건 시스템 전반과 통합하기는 어렵다. 셋째, 외국산 의약품 수입에 의존하는 중앙집중식 조달 구조는 수혜국의 자체 의약품 생산 및 공급망 개발을 가로막았다. 넷째, 일부 국가에서는 HIV 관련 비용의 95% 이상을 PEPFAR가 부담하면서, 정부가 해당 분야에 대한 자체 예산 투입을 축소하는 '재정적 대체 효과'가 발생했다.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은 2025년 현실이 되었다. 2025년 1월 24일 미국 국무부는 기존 교부금과 계약을 포함한 모든 PEPFAR 자금에 대해 '작업 중단 명령'을 발표했다. 2월 1일 일부 예외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5년 전체 지원 규모는 기존의 절반 수준에 그쳤으며, 장기적 지속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자금 동결 직후 27개국 153개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 기관의 70%가 HIV 서비스를 취소했으며, 90% 이상은 환자 추적 관리, HIV 검사 및 치료, 성폭력 생존자 지원 등을 중단하거나 대폭 축소했다고 보고했다. PEPFAR 없이 한 달 이상 운영이 가능하다고 응답한 기관은 14%에 불과했다. 또 다른 모델링 분석에 따르면, PEPFAR 지원이 50%로 축소되거나 완전히 중단될 경우 향후 10년 간 각각 약 28만 6000명과 56만 5000명의 추가 HIV 감염이 발생하고, 기대수명은 최대 3.7년 감소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럼에도 연구진은 이 위기가 단순한 파국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보건 주권을 강화하고, 글로벌 헬스가 특정 강대국에 의존하는 수직적 원조 체계를 넘어 보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거버넌스로 재편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2017~2020년 사이 HIV 대응 자금의 69~77%를 국내 재원으로 충당하며 의약품 구매를 자립화했다. 보츠와나 역시 'HIV 지속가능성 및 전환 로드맵'을 통해 국내 재원 확대, 보건 시스템 강화, 민간 부문과의 협력을 추진하며 PEPFAR 의존도를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논문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PEPFAR 중단과 미국의 WHO 탈퇴 선언은 글로벌 헬스를 지정학적 도구로 취급해온 미국 외교의 귀결이다. 강대국이 설계한 낡은 원조 의존 시스템은 언제든 붕괴할 수 있으며, 그 붕괴는 가장 취약한 이들의 삶을 먼저 위협한다. 미국이 스스로를 '글로벌 리더'로 자임하며 구축해온 보건 원조 체계는 위기 앞에서 책임 있는 전환이 아닌 일방적 철수로 응답했다. 이는 원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글로벌 헬스가 얼마나 특정 국가의 정치적 계산에 종속되어 있었는지 드러낸 사건이다.
그럼에도 이 위기가 단지 파국으로만 남을 필요는 없다. 미국 중심의 수직적 원조 체계가 흔들리는 지금, 글로벌 헬스는 비로소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다. 문제는 이 공백을 또 다른 강대국이나 새로운 의존 구조로 채울 것인지, 아니면 보건 주권과 다원적 거버넌스의 방향으로 재구성할 것인지다. 위예 연구팀이 말하는 '중대한 분기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분기점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다시 한 번 강대국의 변덕에 생명을 맡기는 세계가 아니라, 그 질서 자체를 바꾸는 상상력이다.
*서지정보
Wiyeh, A., Komba, P., Ojong, S. A., Wiysonge, C. S., Moki-Suh, B., Sadate-Ngatchou, P., & Mukumbang, F. C. (2025). A Critical juncture in global health: Leveraging historical institutionalism to examine PEPFAR dependency and inform the development of self-reliant public health systems. PLOS Global Public Health, 5(4), e000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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