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 돌봄, 녹색>은 복합위기 시대, 국민주권시대의 개헌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 책이다. "새 공화국과 헌법의 기본 가치에 관하여"라는 책의 부제가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란사태로 드러난 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개헌의 키워드로 공화, 돌봄, 녹색을 제안하고 있다. 들어가는 글과 보론을 제외하고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은 공화, 2장은 돌봄, 3장은 녹색이다. 여기서는 들어가는 글과 1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3공화국 같은 6공화국? 해답은 2공화국에!
'들어가는 글'의 저자 장석준은 "12.3 친위 쿠데타 이후 뒤늦게 발견된 현 헌법 내의 공백이나 모순에 대한 답이 제2공화국 헌법 안에 이미 담겨 있었다"라며 흥미로운 점을 지적한다(p.15). 그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대통령 궐위 시 권한대행으로 국회의장이 국무총리보다 앞 순위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이 문제 때문에 시민들은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지금보다 60년 전 헌법 조항에 이미 해답이 있었다니. 그뿐 아니라 헌법재판소도 이미 2공화국 때 처음 등장했고, 헌법재판관도 대통령, 국회, 대법원이 3인씩 선임하면 추가 임명 절차 없이 이걸로 끝이었단다.
게다가 이때 헌법은 경제체제 역시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계속 야기하는) 순수 자본주의보다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체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제헌헌법(제84조)의 내용을 이어받고 있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박정희 쿠데타로 모조리 삭제되고 말았다.
또한 장석준은 우리 시대의 진짜 이름은 '장기 제3공화국 시대'라고 명명하며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가 바로 3공화국 때 시작되었다고 분석한다. 심지어 윤석열의 비상계엄 포고령 1호는 박정희의 포고령 6호를 쏙 빼닮았다고 하면서 '정치', '국회'라는 것을 무능하고 혐오스럽게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이때라고 진단한다.
즉, 한편으로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띄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를 방해하는 '국회'는 쓸모없는 정치꾼들이 싸움터라는 상식을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무능, 낭비와 동일시하고, '국회'를 불신하며, 오로지 '대통령' 선출 방식만이 민주주의의 기준점이 되는 한국사회의 독특한 관념이 이때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p.20). 우리 정치사의 뼈아픈 변곡점이다.
'민주'보다는 '공화'를
한편 책의 1장(저자 장은주)은 지금껏 우리가 '민주'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공화'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못했음을 상기시킨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진단이다. 이에 따라 저자 장은주는 '민주적 공화주의'를 대안으로 내놓으며 '제7공화국'을 위한 개헌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민주적 공화주의의 세 가지 핵심 원리를 공동선의 정치, 존엄의 평등에 대한 지향, 시민 참여의 확대라고 말하며 논의를 이어간다.
먼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87년 체제'의 문제점으로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비판한다. 우린 형식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형식에 대해 여전히 매우 편협한 인식에 머물러 있다는 진단이다. 대표적으로 행정부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를 '행정권력 인격주의'라고 표현하면서, 심지어 일종의 '대체 군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대통령제 국가들에서 정당들은 '대통령(제)화' 되고, 단순다수결주의와 소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양당제를 낳는다는 '뒤베르제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이런 양당제는 필연적으로 두 당이 서로 적대적 대결 정치를 펼치는 '비토크라시'를 낳고 있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12.3 내란에 대해서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단순한 우연이나 윤석열이라는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6공화국 헌정 질서가 내장하고 있던 민주주의의 자기파괴 가능성이 발현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p.43)
이런 체제에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주변으로 밀려난 광범위한 대중들은 경제적 곤궁 상태에 빠지게 되고, 심각한 사회적 무시와 정치적 무력감, 심각한 박탈감과 인간적 존엄성 상실과 모욕을 경험하게 되어 결국 극우 포퓰리즘과 파시즘이라는 정치적 탈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최근 들어 확인한 극우화 흐름이 이해가 된다.
한국의 민주적 공화주의
'공화'라는 단어는 영어로 republic(리퍼블릭), 라틴어로 respublica(레스퍼블리카, 공적인 일), 한자로 共和(공화, 함께 조화롭다)라고 쓰이는데, 여기서 "공화(국)라는 말은 다양한 세력이나 사람들이 함께, 그러니까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나 그러한 상태에 있는 국가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p.43)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가 강조하는 '민주적 공화주의'는 서구 공화주의와도 그 결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오늘날 대두되는 '신(로마)공화주의'를 소개한다. 이는 '비-지배 자유'에 대한 지향을 핵심으로 하며, 단순한 '불간섭'을 의미한 자유주의와 달리 노예적 피지배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언뜻 '아나키즘'을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정치적 지향이 우리 현대사에서도 발전해왔고, 민주적 공화주의는 바로 여기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철학적 기초를 닦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이고, 이는 유교 전통과 단군 신화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나라 안으로는 모든 구성원의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추구했고, 좀 더 일반적 수준에서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균등을 추구했다"는 설명이다.(p.55)
삼균주의는 제헌헌법 이래 현행 헌법에도 녹아들어 "억압적 정치체제를 극복하고 모든 시민이 평등한 존엄성을 누릴 수 있는" 민주적 공화주의의 정치철학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비-지배 자유의 이상에 초점을 둔 오늘날의 신공화주의를 포함한 서구 공화주의 전통의 핵심 지향과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시민들의 자유와 존엄의 실질적 토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나름의 고유한 시각을 보유하고 있다"면서 삼균주의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p.55)
한국의 독립이나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조소앙의 삼균주의가 이 맥락에서 등장하니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장석준이 '제2공화국'의 헌법에 현재 문제의 해답이 있음을 보이고, 장은주가 오래전 '삼균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보며, 동시대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는 과거에 그 해답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대안은 한국형 양원제 도입
그럼에도 삼균주의라는 사상이 구체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저자는 '한국형 양원제' 도입을 제안한다. 핵심 아이디어는 '선거 방식과 역할을 달리하여 구성하는' 양원제에 있다. 국회를 두 트랙으로 분리하여 구성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의회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현재의 국회를 하원(민주원)으로 하되, 선거제도는 '순수 단순다수결제', 즉 현행 선거제도에서 비례대표제만 빼는 방식으로 하여 구성한다. 상원(공화원)은 '비례대표제'로 하는데, 현행 선거제도에서 비례대표제 몫을 분리하고 좀 더 확장해 권역별로 선출하여 구성한다. "하원은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총리 추천·불신임 권한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대신 상원은 하원에서 제출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진다."(p.69)
앞으로 한국 정치를 바꿀 나름의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근원적 문제가 '민주'가 아니라 '공화'라 해서 과연 '민주적 공화주의'가 무엇이고, 현실 정치에서는 그것이 어떤 대안으로 나타날지 내심 기대했는데, 저자의 결론은 이미 여러 곳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대결적 양당제 문제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에서 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해야 한다는 얘기는 민주적 공화주의론 없이도 꽤 오래된 논의이기 때문이다.
양원제 논의도 개헌 담론에서 이미 오래 논의가 된 사안이다. 게다가 양당제의 상원은 분권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광역시도의 대표가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고, 최근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자연의 권리, 신유물론, 사물의 의회 등이 알려지며, 상원 구성을 후견인을 통한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상원의 구성과 역할을 다당제와 하원에 대한 견제 정도로 제안한 부분은 아쉽다.
물론 저자가 밝히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권력구조와 정치 제도를 도입하는 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온 구체적인 정치 현실에서 출발하되 그 현실이 마주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바람직한 방안을 차근차근 도출하는 '현실주의적 이상주의'로 접근하자는 생각은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민주' 보다 '공화'로 큰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그 대안이 과거의 논의 수준에 그친 점은 못내 아쉽다. 오히려 다음의 대안이었다면 어땠을까?
시민의회, 민주적 공화주의의 새로운 대안?
1장의 저자는 서두에서 민주적 공화주의의 세 가지 핵심 원리를 공동선의 정치, 존엄의 평등에 대한 지향, 시민 참여의 확대라고 했다. 이 가운데 '시민 참여의 확대'와 관련해 헌법 1조에 명시된 주권자 시민의 참여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지 않은 점은, 오늘날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대로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과거 역사를 볼 때 민주주의의 위기 같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시민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졌기에 위기가 극복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렇게 광장에서의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시민들의 주권이 상시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헌을 통해 시민들이 헌법과 법률을 직접 발안하는 발안제를 도입하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하지만 숙의되지 않은 결정은 다른 폐해를 낳을 수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시민의회' 도입도 적극적으로 도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시민의회란, 무작위 추첨된 일반 시민들이 공공 정책을 숙의하고 결정하는 기구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현대적 적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특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아닌, 사회를 대표하는 다양한 시민들이 공론장을 통해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시민의회는 일정 기간 동안 운영되며(약 1년 내외), 참여자들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고, 토론하며, 일반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수렴하고 반영하여,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시민의회의 장점 중 하나는, 토론과 협치라는 것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현재 국회로 말미암아 기후위기 같은 사안에 대한 중장기적 정책이 제대로 도입되지 못하고 있을 때, 주권자 시민들이 직접 이를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꽉 막힌 정국을 돌파하면서도 국회를 견제하는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선거로 뽑힌 대의기구 국회를 인정하면서도, 시민들이 그 부족함을 보완하고 방향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중요한 기후위기 대응을 '기후시민회의'라는 공론기구를 구성하여 시민들의 의견을 듣겠다고 한다. 또한 국회는 작년 헌법재판소의 탄소중립기본법 헌법불합치 판결로 인한 법 개정의 과업을 시민들의 공론을 반영해 정하겠다며 관련 공론 과정을 준비하고 있다. 관련해 프랑스나 영국 등 해외에서는 이미 '기후시민의회'라는 틀 안에서 시민들의 숙의를 거쳐 제안된 정책들이 국정에 반영된 바 있다.
우리도 민주적 공화주의의 정신으로 시민의회를 적극 반영하여 중요한 기후위기 대응 관련 정책들을 국회와 시민의 협업을 통해 풀어가면 어떨까? 물론, 저자 장은주가 제안한 하원에서 제출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는 한국형 양원제와 독일식 연동형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도 중요하다. 필자가 제안하는 발안제, 시민의회와 모순되거나 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제도들이 통합적으로 적용되고 시너지를 낼 때 민주적 공화주의의 실현은 더 가까워질 것이다.
저자 장은주가 지금의 문제를 '공화'라는 키워드로 잡은 것은, '민주'에 익숙한 많은 시민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것이고, 우리 정치를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민주적 공화주의가 많은 정치적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대안의 씨앗을 남기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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