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의 사연을 기록하는 반올림 기록팀을 모집했었다. 먼발치에서 반올림 활동을 응원하고 있던 나는 반올림 활동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 싶어 참여했었다. 그러나 산재 피해자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의 말과 삶과 꿈을 실은 책 <회로를 이탈하다>를 만났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김우, 심지안, 유지영, 이하늬, 임다윤, 차성덕 여섯 분의 기록자가 열다섯 분의 구술자를 만나 '말하는 소리가 작으면 듣는 귀가 커야 한다'라는 명언을 실천해 낸 귀한 책이다.
열아홉 살 어린 딸이 삼성에 입사했다고 기뻐하셨던 부모님들은 일 년 만에 딸의 손 마디 마디에 박힌 굳은살과 변형된 손가락을 보고는 눈물을 보이셨다. (278쪽) 2011년 삼성 기흥공장에 입사한 우하경 씨의 손가락도 다른 삼성반도체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손가락처럼 무사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런 정도만 되어도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그닥 심각한 축에 끼지 않는다. 손가락이 휘어졌다고 일 못 할 지경도 아니었다. 손가락이 휘어진 걸 이상하다고 의심하게 된 건 더 큰 병이 찾아왔을 때였다.
<회로를 이탈하다>에 등장하는 조성애 씨는 1995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해 3년도 안되어 몸이 서서히 마비되었다. 다발신경병증이었다. 김규림 씨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김지우 씨의 자녀가 산재 피해를 입었다.
현재 기흥공장에서 일하는 우하경 씨는 2024년 5월, 일하던 바로 옆 라인에서 작업하던 노동자 2명이 고선량의 방사선에 피폭되는 사고가 발생해 큰 충격을 받았다. 우하경 씨는 현재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이선주 씨도 기흥공장 3라인 LED 공정에서 근무하다 뇌종양 진단을 받았고 같은 공정에서 일했던 최형인 씨는 림프종을 진단받았다.
이들은 자신 또는 자기 자녀가 아픈 이유에 대해 숱한 밤을 지새우며 생각했다. 자신이 공장에서 노동했던 과정을 복기해 아픈 원인을 찾았다.
"삼성 기흥공장 3라인 LED 공정은 매뉴얼(수동) 라인이어서 불합리한 게 많았어요. 교대근무가 기본이고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했어요. 모듈 할 때는 엑스레이 장비 옆에서 일했고, 자동배합기가 있긴 해도 바빠서 손으로 직접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배합할 때 형광체, 경화제 같은 걸 섞거든요. 그거 다 유해한 거잖아요. 장갑에 구멍이 날 때도 있었고, 손에 물질이 묻을 때도 많았어요. 솔더크림도 사용했어요."(17쪽 이선주)
"공기 순환 시스템이 안 갖춰져 있고, 에폭시나 형광물질, 암모니아 케미컬(화학물질)을 진짜 많이 썼어요." (30쪽 김지우)
"케미칼이 몸에 나쁘다는 걸 몰랐으니까, 맨손으로 막 닦기도 하고" (31쪽 김지우)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6, 7, 8라인도 1, 2, 3, 4, 5라인 못지않게 백혈병, 유방암, 악성 뇌종양 등 그야말로 특수질환 발병의 신실인데(247쪽), 정향숙 씨는 기흥공장 6, 7, 8라인에서 21년 일해 얻은 건 100만 명 중의 한 명 나타난다는 거대세포증이라는 희귀질환이다.
임휘준 씨는 삼성에서 설비 정비 업무를 도맡아 하다 뇌종양 진단받고 투병중 이다. 삼성디스플레이 기흥연구소에서 17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했던 故 최진경 씨는 유방암 3기 진단받고 산재 신청했지만 4년 만에 불승인 판정받았다.
하이닉스에 다녔던 언니들이 김혜수 씨에게 '하이닉스 가지 말고 삼성가라'고 조언해 삼성에 입사했다. 하이닉스를 다녔던 큰언니와 삼성 하청업체를 다녔던 남동생을 잃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직업병 피해자들은 삼성반도체에만 있지 않았다. 박만수 씨는 삼성코닝 정규직으로 출발했지만, 삼성반도체 사내하청업체에서 폐암에 걸렸다. 일과 학습 병행제도에 매력을 느껴 삼성전자 하청업체 케이엠텍에 입사한 이승환 씨는 급성백혈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김선우 씨는 마이스터고 현장실습으로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취업해 1년 만에 간이식을 할 정도로 생사를 넘나드는 큰 병을 앓게 된다.
서울반도체에서 근무했던 이가영 씨는 림프종을 앓다 사망했고, SK하이닉스 이천공장 기술연구소 분석실에서 28년 근무한 최상미 씨도 뇌종양이 발병해 사망했다.
이승환 씨의 부모님은 아들이 현장실습 나간 케이엠텍에서 계속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했을 때, 케이엠텍 뒷배경에 삼성이 있었기에 아들의 미래가 밝다고 낙관했다. 그래도 한국에서 제일 기업은 삼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이 급성백혈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 때 아버지는 케이엠텍 공장을 상대로 책임을 물었다.
이승환 씨의 아버지가 구미 케이엠텍 공장을 둘러보고 "내부 공기 순환하는 시스템이 거의 없었다"라고 말하며 "아들이 아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했다. (116쪽) 삼성 기흥공장을 다녔던 김지우 씨도 똑같은 증언을 했었다.
이승환 씨의 어머니는 아픈 아들 곁을 지키며 생각했다. "그냥 휴대폰 회사이고 조립만 하는 단순업무다 보니까 그건 별개라고 생각했는데 애(이승환)일이 터지고부터 생각한 게 '이쪽 일은 정말 다 위험한 일이구나.'휴대폰도 겉에 플라스틱을 만지는 게 아니고 내부에 있는 그걸 다 손을 대는 거니까 거기에 모든 화학물질이 다 있는거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116쪽)
이들이 산재를 신청하면 해당 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시간을 끌었다. 공단의 '부실한 역학조사와 역학조사 장기화'로 피해자들은 몸이 아픈 것 이상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했다. 정부 기관의 괴롭힘이었다. 그래서 산재가 아니라는 불승인을 당해도 승복할 수가 없었다. 대기업 삼성과 SK하이닉스를 상대로 바위에 달걀 치기가 될지라도 달걀 자국을 남기기 위해 행정소송이라는 길고 긴 행진 행렬에 동참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반도체 노동자들이 아픈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만 덮어버렸다면 삼성, SK하이닉스, 반도체, 전자산업, 유해 물질, 위험의 외주화, 현장실습 등의 키워드와 연결 짓지 못했을 거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소감에서 밝혔던 "과거가 현재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제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도 돌려주고 싶다. 삼성 반도체에서 백혈병 또는 뇌종양, 혈액암, 림프종, 거대세포종 등 이름도 어려워 외우지 못했던 수만 가지의 병을 앓다 죽어간 노동자들이 이미 존재했었다. 그들은 故 황유미 씨이고 故 황민웅 씨가 그랬다. 이 억울함을 풀기 위해 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영정을 가슴에 품고 11년을 싸웠다. 싸우는 유가족과 당사자의 곁에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있었기에 이 책에 등장한 인물들은 자신의 병이 삼성 또는 반도체 산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었다.
또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깨고 나온 박만수 같은 인물이 삼성코닝에서 노조를 만들려고 시도했듯 책에는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삼성에는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가 숱하게 있었다. 그렇게 알을 깨고 나온 노동자들이 바로 임휘준 씨와 같은 조합원이다. 책에서 정향숙 씨의 남편도 노동조합 대의원 활동을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를 깨고 나온 이들은 더 있다.
사실 나는 몇 달 전부터 반도체 노동문제를 다루는 책 읽기 모임을 시작했다. 책 모임을 하게 된 이유는 반올림 기록팀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반올림 기록팀을 나온 얼마 뒤 삼성에서 거대한 노동조합이 출범했었다. 임단협 교섭이 타결될 즈음에 내부 민주주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였다. 삼성 자본이 노조를 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이간질하고 분열을 조장하는지 멀리 있는 내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집행부는 눈앞에 떡이 더 커 보였나 보다. 문제를 건강하게 제기한 조합원을 오히려 징계했다. (물론 징계는 무효 판결을 받았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을 지원했던 금속노조도 사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부당한 징계에 조언해 준 금속법률원 변호사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과연 삼성에서 노동조합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지 내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절정의 순간은 노동자 대중이 문제를 제기한 올바른 조합원 임원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순간이었다. 사필귀정이란 사자성어가 현실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우하경 씨가 노조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때 나는 언젠가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담대해지는 순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지금 반올림 책읽기 모임을 하며 반도체 전자산업에 관한 책을 읽고 공부하고 있다.
"저희는 알아야 된다고요. 알고 나서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최소한 내가 왜 아픈지는 알아야 되지 않겠어?"라고 우하경 씨가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잠재적인 직업병을 의식한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하며 들으면 우하경 씨의 말은 가슴 아프지만 한편 절망하지 말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동조합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노동조합이 있어 희망도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생산하는 전자칩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전자칩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는 인간은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구술기록집 <회로를 이탈하다> 책이 그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나는 책을 덮고 한참 동안 상념에 젖어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이야기인데 왜 이스라엘로부터 하루가 멀다고 폭격당해 죽어가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들이 생각났을까? 어느 날은 이스라엘 지배 세력이 인공지능을 장착한 드론으로 적군의 얼굴을 인식해서 맞춤형 폭격이 가능하다며 건물을 마구 폭격해 대는 모습을 인터넷에서 본 적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군사기술로 우리는 지금 일상에서 편리하게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다. 군사기술의 발전이 이룩한 꿈이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듯, 파이브지(5G)가 필요했던 것은 인간의 편리한 삶을 위한 게 아니었다. 자본가가 더 큰 자본을 축적하는 데 필요한 개척지인 우주를 군사화해 세계를 장악하겠다는 제국의 욕망이 합쳐져 군사기술이 발전했다. 그렇게 위험한 전쟁 무기로 힘없고 가난한 민중을 지배하고 학살하듯이 반도체 전자칩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목숨도 위협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질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반도체 공장도 총성 없는 전쟁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그렇게 계속 병들고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회로를 이탈하다.'라는 문장의 주어가 노동자였으면 좋겠다. 아니 노동조합이어야 하지 않을까?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노동자를 병들고 죽게 만든다면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정해진 회로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반올림 기록팀이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옮겨 <회로를 이탈하다>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에서 드러난 피해자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야 할까? 나는 정치가 선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도체 노동환경과 직업병 문제의 원인을 밝혀내는 게 정치이다. 자본을 규제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해 노동자가 일터에서 병들고 죽지 않게 만드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정치 말이다. 그래서 <회로를 이탈하다>는 그런 정치를 돕는지도 모른다. 이 책이 대중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직업병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이들이 반도체 노동환경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내주면 좋겠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개선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반도체 공장으로 일하러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반도체 특별법 같은 재벌만 살찌우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결정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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