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어원 사전>이다. 국어학계의 태두인 고(故)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의 유작. 돌아가신지 5주기를 지나 세상에 나왔다.
사전은 총 3380여 개의 표제어를 수록했다. 기존의 사전들이 보통 1000~1500개 수준의 어휘를 다룬 것에 비하면 2배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하마터면 이 책을 놓칠 뻔했다. 그러다 우연히 제자인 황선엽 서울대 국어국문과 교수의 언론 인터뷰를 읽게 됐다.
평생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던 노학자는 퇴임 이후에도 모든 원고를 원고지에 꾹꾹 육필로 눌러썼다. 황 교수를 비롯한 후학들이 디지털화 작업을 도왔고, 아들인 서울대 수리과학부 이인석 명예교수가 편집해 완성했다.
아들과 제자, 두 분의 정성과 은혜로움이 참으로 놀랍다. 세상은 이런 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래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결코 다 읽을 수 없는, 그래서 제대로 읽지도 않았으면서도 책을 소개할 수 있는 만용의 근거다.
머리말 자체도 편집의 산물이다. 하지만 몇 번을 읽어봐도 놀라운 자료이다. 인용한다.
"한국어의 경우에 어원(語源)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어색함을 느낀다. 이번에 추린 단어들의 논의 속에 어원이라는 말에 합당한 것이 몇이나 있는지 망설여진다. 나는 오래전부터 '단어사(單語史 word histories)'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왔으나 관용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2012년 12월)"
"어원 연구에 손을 댄 것도 국어의 역사를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가녀린 소망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아직 한 권의 어원 사전도 없는 현실이 저자의 마음을 이리로 끌리게 하였다.(1991년2월)"
"국어 어휘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차용어를 찾아내는 데서 싹 텄다고 할 수 있다. 지난 50년대에 만주어와 여진어를 공부하면서 국어에 남은 그 흔적들을 찾아보았고, 몽고어를 공부함에 있어 미처 그 차용어에 대해서 각별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1991년 2월)"
"국어의 역사적 연구는 고대 또는 그 이전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고대의 언어 자료가 푼더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향수를 더욱 애틋하게 한다.(1991년 2월)"
이 글을 쓰고 나서도 저자에게는 어휘사는 그저 끝없는 광야 같이만 느껴진다. 갑골문 사전만 쫓아다니던 내게 모국어의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정말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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