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안전기본법은 유가족과 시민의 바람입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유가족과 시민들은 생명과 안전이 지켜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많은 재난참사의 교훈과 경험을 토대로 생명안전기본법이 발의됐고,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논의 중입니다. 안전권이 보장되고, 피해자의 권리가 보호되며, 안전영향 평가를 통해 위험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독립적인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법입니다. 안전에 대한 국가의 책무, 안전 약자에 대한 특별한 보호와 생명안전종합계획 등에 대해서도 담고 있습니다. 이 법의 통과를 바라며 재난참사 유가족과, 유가족을 지원하는 법률가들이 생명안전기본법에 대한 연속기고를 합니다. -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을 위한 시민동행
"잘 다녀올게요." 3년 전 아침, 아이가 건넨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17살 아이를 잃은 부모가 되었고, 재난 참사 유가족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삶은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었습니다. 충격과 슬픔이 일상을 집어삼켰지만, 한 가지만은 흐려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상은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특별수사본부를 만들고 국회는 국정조사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보다는 책임 회피가, 진실보다는 은폐의 움직임만 보였습니다. 그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려면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진상조사기구가 필요합니다. 특별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유가족들의 특별법 제정을 향한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552일, 특별법을 만들기까지
정부는 "수사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습니다. 159명의 생명이 스러진 참사였지만, 제대로 사과한 사람도, 책임지고 물러난 사람도 없었습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우리의 절규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552일의 투쟁 끝에 겨우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권한은 약화되었고, 활동 기한은 짧아졌습니다. 온오프라인에서는 유가족을 향한 악의적인 공격이 이어졌지만, 우리는 오직 진실을 밝히겠다는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며 견뎌야 했습니다. 피해자의 권리로서 정당하게 보장받아야 하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습니다.
2025년 4월 피해 지원 신청 접수가 시작되었고, 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인 진상조사는 그보다 두 달 더 늦은 참사 발생 32개월이 지나서야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문제가 보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구성된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발표해도, 그 권고를 이행하도록 강제할 법적 구속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태원 특별법이 보여준 여섯 가지 한계
첫째, 정치적 타협으로 조사권한이 약화되었습니다. 법 제정을 위한 여야 합의 과정에서 대통령의 거부권에 대한 우려로 특별검사 요청권, 공소시효 정지 조항 등이 삭제되었습니다. 출석요구 및 자료제출 요구 불응 처벌도 징역형에서 3천만 원 이하 과태료로 약화되었습니다. 참사 때마다 이런 정치적 협상을 거쳐야 한다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가능할까요?
둘째, 너무 늦게 시작해서 너무 빨리 끝나는 조사입니다. 특별법은 2024년 5월 제정되었지만, 본격적인 조사는 2025년 6월에야 시작되었습니다. 그사이 증거는 훼손되고 공소시효 징계시효는 흘러갔습니다. 조사기한은 최대 1년 3개월에 불과합니다. 기한이 끝나면 특조위는 해체되고, 권고사항 이행을 점검할 주체도 사라집니다.
셋째, 사고가 난 뒤에만 움직이는 시스템이 문제입니다. 이태원 특별법은 이미 발생한 특정 사건에 대한 한시적인 법안입니다. 다른 유형의 재난이 발생하면 또다시 새로운 특별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면 모든 유형의 재난에 대해 예방-대비-대응-복구의 전 과정을 평상시부터 관리하는 상설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넷째, 2차 가해 우려 속에 피해자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온오프라인 모욕과 비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피해자 보호가 절실했습니다. 우리는 모욕 처벌 조항, 트라우마 센터 설치 등을 법안에 담고자 했지만, 정치적 협상 과정에서 포기해야 했습니다. 배보상 권리는 명시만 되었을 뿐 구체적 절차는 없어 국가 책임을 스스로 소송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피해자들은 체계적 지원 없이 고립되었고, 참사 3년째 유가족은 서로에게 기대어 버티고 있습니다.
다섯째, 안전 취약계층에 대한 고려가 부족합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외국인 피해자들은 물리적 거리와 언어 장벽으로 인해 신속한 지원과 정보 접근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피해 지원 절차조차 제대로 안내받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특별법에는 외국인, 장애인, 어린이 등 안전 취약계층을 위한 구체적인 보호 조항이 미흡합니다. 재난 앞에서 더 취약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여섯째, 안전권의 법적 지위 불명확합니다. 현행 헌법은 "안전권"을 명시적 기본권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태원 특별법도 한시법이라 안전권의 법적 지위를 확립하지 못합니다. 안전이 모든 사람의 권리라는 것을 법으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이 필요한 이유
생명안전기본법은 이러한 한계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상설 독립조사기구를 설치하여 예산과 인사의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하면, 참사 때마다 정치적 협상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평상시에 존재하는 조직이기에 사고 발생 즉시 조사에 착수할 수 있고, 활동 기한 제한 없이 충분한 진상규명이 가능합니다. 해체되지 않기에 권고사항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할 수 있습니다.
모든 중대 안전사고를 조사 대상으로 하기에, 참사 발생 시 특별법 제정 없이 즉시 조사가 시작됩니다. 예방-대비-대응-복구의 전 과정을 아우르는 종합 체계를 구축하고, 5년마다 생명안전종합계획을 수립하며, 안전영향평가제도를 통해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의사결정 체계를 만듭니다.
피해자에 대한 모욕 처벌 조항을 신설하고, 피해자 정보 누설을 금지하며, 전 과정에서 피해자의 실질적 참여권을 보장합니다. 추모 시설 건립과 현장 보존도 법으로 보장합니다. 안전약자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특별 보호 의무를 명시하여, 모든 안전 정책에서 이들을 우선 고려하도록 합니다.
무엇보다 안전권을 명시적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안전권 보장 책무를 구체화합니다. 모든 안전 관련 법령과 계획에 우선하는 기본법 지위를 부여하여, 안전이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권리임을 법으로 명확히 합니다.
이제는 특별법이 아닌 기본법이 필요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이태원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을 맞게 되었습니다.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위해 거리로 나서고, 정치권을 설득하고, 출범까지 수년을 기다려야 하는 이 상황은 잘못되었습니다. 생명안전기본법 제정은 정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안전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그 시작입니다. 사고 예방부터 피해자 보호까지 모든 과정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안전을 모든 사람의 기본권으로 확립합니다.
세월호로 이태원으로 이미 우리는 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상규명 방식의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유가족이 또다시 552일을 길 위에서 투쟁하기 전에, 생명안전기본법은 제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안전 사회를 향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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