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수련회나 수학여행 등을 가거나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평소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새벽쯤엔 비밀 고백의 모먼트가 생겼다.
그럴 때 가족에게 당한 성폭력 피해자임을 어렵게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가해자는 형제, 친척, 부모, 조부모까지 다양했다. 나는 피해자인 친구들에게 조력자가 되기를 자처하며 함께 경찰에 신고하자고 여러 번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해자와 어떤 형태로든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친구들은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 사회 성인지 수준은 사법제도 역시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또래의 친구에게 피해자임을 말하는 것보다 이를 사법제도에 알리는 것이 더 힘든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늦었지만 환영
지난 3일 '아동·청소년 대상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법안'이 통과됐다. 만 19세 미만의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많은 피해자들이 성폭력을 당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피해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간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었다. 이에 여성단체들은 친족 성폭력 피해 이후 상담까지 10년 이상이 경과 되는 경우가 55.2%에 달한다고 밝히며,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투쟁을 이어왔다.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에 대해 밝히는 시기가 평균 시기가 52세라는 미국의 비영리 연구기관인 ChildUSA 조사 결과도 있다. 성폭력 가해자가 친족일 때 왜 피해자는 그것에 대해 밝히는 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당연하게도 가해자가 친족이라는 점 때문이다.
'분명한 위계' 안에서 일어나는 친족 성폭력
사회제도의 근간인 가족은 제도다. 자연발생적인 구획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이 제도로 다양한 '정상성'의 기준이 발생한다. 구태의연한 자기소개서에 '엄격하신 아버지와 다정하신 어머니'라는 문장이 단골로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가족의 형태, 문화, 역할, 위치의 전형성이 존재하고 이것이 곧 정상성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부장적 구조가 정상성으로 인지되는 사회에서 아동·청소년 친족 내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피해자 스스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축소하여 해석하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깨닫게 되곤 한다.
설령 피해가 일어난 순간부터 피해자임을 자각했다고 해도 이를 곧바로 신고로 이어가기에는 난감함과 어려움이 따른다. 고발 과정에서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가해자와 공간 분리가 어려운 경우도 많고 가족·친족이라는 사적 관계에서 경제적, 정서적 지지를 받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 내에서 2차 가해를 가하는 경우도 많다.
다양한 이유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피해, 피해를 밝힐 용기가 생긴다. 가해자와의 온전한 공간적 분리가 가능해졌을 때, 경제적 독립을 통해 친족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때 등등. 그리고 피해 사실에 대해 온전히 말할 수 있는 정서적 힘이 생기는 시기는 모두 다르다.
법 개정으로 성인이 되고 중년, 장년이 되어도 아동·청소년 시기에 친족으로부터 입은 피해에 대해 말하고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친족관계 안에서 사법제도의 작동은 가부장제도의 관점으로 이루어졌다. 위계가 작동되는 친족 내 폭력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관습, 문화, 제도가 그것이다. 이는 사회 공동체의 역할인 관계적 책임, 돌봄 등을 모두 가부장제도 안의 가족에 떠넘기는 일이다.
제도와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늘 인지해야 한다. 제도와 정치는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가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시기가 언제라도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는 그 용기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 시행해야
'아동·청소년 대상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법안이 통과돼 성평등 사회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됐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을 의미한다. '아동·청소년'에 국한하지 않고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를 시행해야 한다. 성인들도 친족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형사사건 뉴스와 통계를 통해 성폭력 가해자의 대부분이 면식범이며, 그중 친족이 가해자인 경우도 상당하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성폭력 범죄는 성별, 연령, 나이 등의 위계의 맥락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성별, 연령, 나이의 맥락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가족·친족'의 세계다. 그러니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는 모든 나이에 걸쳐 전면 폐지돼야 한다.
가족·친족이라는 구획은 언젠가 완전히 해체되고 재구성돼야 하겠지만, 그 전에 먼저 가족·친족이라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만들 의무가 우리 사회제도에 있어야 한다.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 연령에 걸친 전면 폐지가 그 시작이다. 머지않은 시기에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전면 폐지'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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