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의 거리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웠다. 술에 취한 노동자들이 거리를 비틀거리고, 아동들은 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했으며, 부유층은 그저 자기 재산 불리기에만 여념이 없었다. 계몽주의는 지식인들의 살롱에서나 떠드는 말장난이었고, 실질적인 사회변화는 요원했다. 그런데 이 혼돈의 시대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의사 출신으로 초콜릿과 활자를 팔던 괴짜 사업가, 바로 조셉 프라이(Joseph Fry, 1728-1787)다.
의사가 초콜릿을 팔면 얼마나 팔까
프라이는 원래 의사였으나 곧 사업으로 전환했다. 1753년 약제사로 출발한 그는 1761년 동업자 존 본(John Vaughan)과 함께 월터 처치먼(Walter Churchman)의 초콜릿 사업을 인수했다. 당시 초콜릿은 귀족들이나 마시는 사치품이었다. 프라이는 이를 대중화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술 대신 초콜릿을 마시면 사람들이 덜 취하고 더 건강해질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순진한 발상이다. 술꾼들에게 초콜릿을 권하는 것은 마치 오늘날 흡연자에게 채소 주스를 마시라고 설득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전략은 어느 정도 먹혔다. 1764년까지 프라이의 회사는 53개 도시에 대리점을 두었다. 초콜릿이 건강에 좋다는 믿음은 당시 퀘이커 교도들 사이에서 특히 강했다.
정직이 돈이 된다
프라이는 독실한 퀘이커 교도였다. 퀘이커는 17세기 영국에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가 창시한 기독교 분파로,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고 믿었다. 이들은 화려한 예식을 거부하고, 평화주의를 지향했으며,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에서 퀘이커는 사회적으로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비국교도(성공회를 제외한 다른 기독교파)에 대한 정치참여 금지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퀘이커들은 공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장사를 했다. 거래처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 물건의 무게를 속이지 않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퀘이커가 파는 물건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정직과 성실은 나중에 로이드 은행, 바클레이 은행, 캐드버리 같은 세계적 기업의 기반이 되었다. 프라이의 초콜릿 사업 역시 이 신뢰 위에 세워졌다. 그는 물이나 촛농을 탄 가짜 초콜릿을 팔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정말 혁명적인 일이었다.
활자와 초콜릿, 지식과 달콤함을 동시에
프라이는 초콜릿 사업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1764년 그는 활자 주조업에도 뛰어들었다. 당시는 인쇄술이 지식보급의 핵심수단이었다. 활자의 품질이 곧 책의 품질이었고, 책의 품질은 계몽의 품질이었다. 프라이는 인쇄업자 윌리엄 파인(William Pine)과 손잡고 활자 주조소를 세웠다.
1785년 그의 회사는 왕실 특허를 받아 '조셉 프라이 앤 선즈'라는 이름으로 활자 견본집을 냈다. 이 활자들은 당대 최고의 활자 제작자였던 윌리엄 캐슬런(William Caslon, 1692-1766)의 작품과 견줄 만큼 뛰어났다. 심지어 1774년에는 진주 활자로 성경을 인쇄했는데, 이는 당시 가장 작은 성경이었다.
그러니까 프라이는 한 손에는 초콜릿을, 다른 손에는 활자를 들고 있었던 셈이다. 달콤함과 지식, 육체의 즐거움과 정신의 양식을 동시에 제공한 것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사업가인가.
비누까지? 이 사람 도대체 몇 개 직업이 있는 거야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프라이는 윌리엄 프립(William Fripp) 시의원과 함께 비누 제조업도 했다. 초콜릿, 활자, 비누. 얼핏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업들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두 '깨끗함'과 관련이 있다. 초콜릿은 술보다 깨끗한 음료였고, 활자는 무지를 씻어내는 도구였으며, 비누는 말 그대로 몸을 깨끗하게 했다. 프라이는 18세기의 '청결 전도사'였던 셈이다.
가문의 영광, 그리고 최초의 초콜릿 바
1787년 프라이는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끝나지 않았다. 미망인 애나 프라이(Anna Fry, 1719/20-1803)가 사업을 이어받아 '애나 프라이 앤 선'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그리고 아들 조셉 스토스 프라이(Joseph Storrs Fry, 1766-1835)가 성장하면서 회사는 더욱 번창했다.
진짜 혁명은 그 다음 세대에서 일어났다. 프라이의 후손들은 초콜릿 가루에 설탕과 코코아 지방을 섞어 틀에 부어 굳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것이 영국 최초의 초콜릿 바였다. 초콜릿이 음료에서 간식으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1869년 회사는 250명을 고용했고, 1896년에는 4500명으로 늘어났다. 자본금 100만 파운드의 주식회사가 되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에서 51번째로 큰 제조업체가 되었다. 조셉 프라이가 1753년 작은 약제상을 열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성공이다.
이윤과 양심은 양립할 수 있는가
프라이 가문의 성공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와 윤리는 공존할 수 있는가? 퀘이커 사업가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프라이 가문처럼 퀘이커였던 캐드버리(Cadbury) 가문과 라운트리(Rowntree) 가문은 영국 초콜릿 산업의 3대 거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퀘이커로, 조용한 친절과 관대함으로 알려졌다. 직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급했고, 절제운동과 주일학교를 지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도 있다. 프라이 가문은 캐드버리나 라운트리처럼 체계적인 복지제도를 만들지는 못했다. 8개 공장에 직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캐드버리의 본빌(Bournville)이나 라운트리의 요크(York) 같은 모범공장 마을도 없었다. 결국 1919년 프라이 사는 캐드버리에 합병되었고, 1981년에는 프라이라는 이름마저 사라졌다.
초콜릿보다 달콤한 유산
조셉 프라이는 거대한 철학자도,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초콜릿과 활자와 비누를 팔았던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18세기 영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창문이다.
프라이와 같은 퀘이커 사업가들은 자본주의가 탐욕만의 시스템이 아니라 신념과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큰 자본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정직과 성실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영국사회의 한 뿌리로 남아 있다.
프라이가 만든 초콜릿은 이제 사라졌지만, 그가 증명한 것은 남아 있다. 돈을 벌면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 사업과 신념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술 대신 초콜릿을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말이다.
2025년 오늘, 우리는 여전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이윤과 양심, 성장과 정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프라이라면 아마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한번 해보시지요. 그리고 초콜릿 한 잔 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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