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로 현지 활동을 다녀왔다.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최소 6만 8000여 명의 가자지구 주민이 살해됐다. 팔레스타인을 처음 가본 이들이 목격한 팔레스타인 민중을 숫자와 자료가 아닌 삶과 이야기로 풀어낸다. 네 차례에 걸쳐 기고를 싣는다.
다니던 중학교 앞에 작은 정자가 있었는데, 점심이나 하교 시간이면 늘 삼삼오오 모이는 그런 곳이었다. 나도 남자친구들이 공 차자고 하면 정자로 도망가고는 했고, 그곳에는 늘 다른 것으로부터 도망친 또래들이 있었다. 그곳에서 보는 학교는 예뻤고, 여름이면 그늘로 시원했다. 중학생으로 보낸 두 번째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어떤 불량배 무리가 그곳을 완전히 아지트 삼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자 주위로 늘 오토바이가 너덧 대씩 세워져 있고,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조금이라도 어린 학생들이 서성인다면 돈을 뜯거나 때린다고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난 공포에 질려 그쪽으로는 발을 떼지 못했다. 정자로 돌아간 건 석 달쯤 지난가을, 그 패거리가 피우다 버린 꽁초가 기어코 불을 냈다는 말을 듣고는 뛰었다. 숨을 몰아쉬며 검게 그을린 정자를 보고는 내 집인 듯이 슬프고 모멸스러워하며 울었다.
알-꾸드스
그 후로 질 나쁜 무리를 집착적으로 피해 다녀서인지 열다섯 살 이후로 불량배 만날 일은 없었지만, 스물여섯이 된 올봄 이곳, 알-꾸드스(예루살렘)에서 결국 만나고 말았다. 값싼 팔라펠 샌드위치를 찾아 올드시티를 걸어 다니던 정오쯤, 무슬림 지구인데도 이따금 창문마다 이스라엘 국기가 게양된 것을 의아하게 여길 때쯤이었다. 동행한 활동가가 저들은 불법 유대인 정착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불법 유대인 정착민이라는 자들은 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곳곳에 곰팡이처럼 퍼져 있는데, 팔레스타인인 공동체 근처에 정착촌을 짓고는 밤이나 낮이나 몰려다니며 패악질을 일삼는다. 팔레스타인인의 집과 가축을 빼앗는 것은 물론, 잘 때 불을 지르거나 총을 난사해 목숨마저 앗아간다. 이 정착민 폭력에는 여성도 어린이도 예외가 아니다. 가자지구 집단학살이 그렇듯 말이다. 불법 정착민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상대로 그 어떤 악행을 저질러도 단죄받지 않는다. 불법 정착민 자체가 이스라엘의 프로젝트고, 실상 이스라엘 자체가 거대한 불법 식민 정착촌이기 때문이다.
올드시티 한쪽에 자리를 잡아 아랍식 커피와 팔라펠 샌드위치를 먹고는 통곡의벽에 들렀다. 통곡의벽이 있는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땅이지만, 1967년 이후 58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아래 있었다. 군사점령이라는 말은, 곳곳에 점령군이 총을 들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검문하거나 통제한다는 뜻이다. 팔레스타인 국기는커녕 이스라엘 국기 수천 개가 창백하게 나부끼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국기가 둘러싼 통곡의벽 앞에는 정통 유대교 복장을 한 정착민들이 기도하며 통곡하고 있었다.나도 마침 그날 들은 가자지구 소식에 울고 싶었고, 관광객의 신분으로 벽 앞에 다가가 마음 깊이 해방을 기도했다. 울고 난 정착민들은 돌아 나와 허리춤의 총을 고쳐 맸다. 정착민들은 일상적으로 외출할 때조차 권총부터 장총까지 다양하게 무장하고 다닌다. 팔레스타인인을 만나면 꼭 발포하고 싶은 사람처럼 그랬다. 날은 어둑어둑해졌고, 올드시티를 지나쳐 77년 전에 이스라엘이 빼앗은 서예루살렘에 들어서자, 거리마다 각종 명품 브랜드들이 넘실댔다. 한쪽에는 “이스라엘 전통 요리”인 팔라펠을 샐러드 위에 얹어 준다는 레스토랑 역시 보였다. 집과 대지, 사람뿐 아니라 정신과 문화까지 남김없이 약탈하는 장면에 속이 안 좋아 숙소로 서둘러 돌아가야만 했다.
마사페르 야타
알-꾸드스에서 남부로 쭉 내려오면 마사페르 야타에 도착할 수 있다. 지명의 뜻은 ‘야타의 주변.’ 야타는 도시 이름이고, 마사페르 야타는 야타를 둘러싼 마을의 통칭이었다. 알-꾸드스와는 또 다르게 마을이 드문드문 퍼져 있고, 그 사이로는 시원한 구릉이 펼쳐졌다. 아주 처음 본 장면은 아니었다. 사실 마사페르 야타는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데, 팔레스타인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마사페르 야타가 배경인 다큐멘터리가 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온 활동가들이 참여한 <언허드>라는 작품이다.
<언허드>에는 이곳의 주민이자 활동가인 사미가 나오는데, 마사페르 야타에서 묵을 곳도 사미네 집이었다. 처음 만난 사미는 영상 속보다 더 장난스럽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볕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거실에서 그는 물담배를 피웠고, 우리는 대접받은 잎 차를 마셨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점령군이 마사페르 야타를 야금야금 군사구역으로 지정한 뒤, 일방적으로 퇴거 명령을 내리는 상황이 오래 이어지고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가령 이런 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무작정 불법 건축물이라고 통보하고, 그 통보의 방식이란 아랍어도 영어도 아닌 히브리어로 쓰인 고작 종이 한 장. 만약 어떻게든 읽어서 점령 당국에 건축물 허가 신청을 올린다고 해도, 해당 민원은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불시에 철거 집행. 그렇게 마사페르 야타 여기저기에서 ‘HYUNDAI’(현대)라고 적힌 포크레인이 이스라엘 점령군의 엄호를 받으며 주민들의 집을 짓이기는 중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사미네 집도 퇴거 명령을 받은 상황이었고, 소용없음을 알면서도 허가 신청을 계속해서 올리고 있었다. 꼭 이것뿐만이 아니라도 사미네는 온전한 생활을 꾸리기 어려웠다. 당장 사미네 집 뒤로 작물을 기를 수 있는 넓은 땅이 있지만, 맨눈으로도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정착촌과 초소가 생기면서 이제는 그 무엇도 심지 못한다고 했다. 무언가를 키우려고 하면 정착민들이 와서 모두 뽑고 불태워버릴 테니까.
간단한 콩 수프로 점심을 때우고는 사미의 소개로 옆 마을의 A를 만나러 갔다. 그의 집은 높은 광야에 탁 트여 있었고, A가 말아 준 담배도 한 대 얻어 피웠다. 무리를 이룬 낙타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는데,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사람 정도는 단숨에 삼킬 것 같아 겁에 질렸지만, A가 그 표정을 알아봤는지 나를 작고 단단해 보이는 손님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문 너머로 시원한 풍경이 보이는 방이었다. A는 우리가 다 모이자, 낙타만큼은 아니지만 큰 차가 하나 있었다고 운을 뗐다. 이 지역의 불법 유대인 정착민들은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가는 팔레스타인인 학생들을 막아서서 시간을 공연히 뺏거나 이유 없이 위협한다고 했다. 그래서 A가 차로 학생들의 등하교를 돕거나 이웃들에 식료품을 날라 주는 일을 맡고는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착민들이 차에 기름을 붓고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를 벽에 기대어 덤덤하게 들려주었다. 그가 기대어 있는 벽면 한쪽에는 온전한 자동차를 찍은 사진이, 다른 한쪽에는 불타는 자동차 사진이 적막하게 붙어 있었다.
알-칼릴 (헤브론)
마사페르 야타에서 살짝 북부로 올라가면 알-칼릴이 나온다. 누군가에게는 ‘헤브론’이라는 지명으로 익숙한 이곳은 포도와 무화과, 공예품 등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우리도 이곳에서 여성협동조합이 만든 자수 가방을 조금 사 갈 참이었다. 알-칼릴에서 우리를 맞아 준 Y는 포도와 무화과, 공예품도 좋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브라힘 모스크를 보지 않아서 되겠느냐고 힘주어 말했다. 이브라힘 모스크 역시 중요한 유적지로, 이곳 역시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으로 쪼개어져 절반은 유대인 예배 구역으로 쓰이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유대인 예배 구역만 열려 있었는데, 그곳에 다다르려면 불법 유대인 정착촌을 통해야 했다. Y는 팔레스타인인이기 때문에 인솔자 없이 우리만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착촌을 멀리서 보기만 했지, 직접 진입하는 경험은 또 다른 것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검문소로 들어갔고, 우리는 이스라엘 점령군의 지시에 따라 가방을 풀었다. 그들이 짐을 검사하는 동안, 아까 인심 좋은
사장님께 받은 팔레스타인 국기 배지가 뒤늦게 생각났다. 정말이지 경악스러워서 당장이라도 비명 지르고 싶었지만, 다행히 검문을 통과했다. 정착촌에는 크고 작은 이스라엘 깃발이 여느 점령지처럼 빗발쳤다. 미국과 영국 억양의 영어를 쓰는 청소년 정착민들은 무리 지어 걸어 다녔고, 그들에게도 역시 총이 있었다. 저녁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유난히 춥고 어둑어둑했고, 저 멀리 보이는 이브라힘 모스크는 이스라엘 국기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는 말도 없이 밤길을 걸었다.
일어나서는 A의 형이 사다 준 팔라펠과 후무스, 감자튀김을 배 아플 만큼 먹었다. 나는 귀국하기 위해 요르단으로 넘어갈 채비를 해야 했다. 다른 활동가들은 현지활동을 이어 제닌으로, 또 나블루스로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기념품을 사러 가까운 공방에서 들렀고, 쿠피예 문양이 칠해진 주전자와 양귀비가 핀 듯한 접시를 샀다. 벽에는 앳된 남자로 보이는 사진이 액자로 걸려 있었는데, 눈을 떼지 못하자 사장님은 자기 아들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지난해 정착민이 살해한 아들 사진이었다.
사장님은 뒷문을 열어 공방을 한 바퀴 구경시켜 주셨다. 안쪽에는 커다란 화덕이 있었고, 멈추지 않는 불꽃 사이에서 새하얀 도자기들이 달궈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밤들 동안 다함께 시를 읽고 잠들고는 했다. 우리가 낭독한 건 팔레스타인 시인 무함마드 엘-쿠르드의 시집 <리프까> 번역 초벌본이었다. 리프까는 엘-쿠르드의 할머니 이름이다.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불과 서문을 지날 때쯤 “말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리고 말 아래에는, 그 말을 존재하게 만든 불과 분노가 있다”라는 문장을 읽었다. 팔레스타인에 온 뒤, 줄곧 불을 생각했다.
자동차를, 팔레스타인 땅과 작물을, 아이가 잠든 집을 삼키는 폭력의 불을 머리에서 지울 수 없었다. 내게 소중한 것들이 불탈 때, 과연 분노에 차서 우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이들은 내게 불로부터 온 단단한 말을 들려주었다. 정착민들이 리프까와 엘-쿠르드의 집에도 들어와 온 가족을 내쫓았을 적에, 마침 함께 있었던 출판사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물었고, 리프까는 답했다. 집으로 돌아가 네가 본 걸 세상에 말하라고.
나는 검게 그을린 정자로부터,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을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은 나를 불 앞에 앉혔다. 불을 보게 하고, 불로부터 피어난 말을 듣게 했다. 식민자의 총, 칼, 탱크와 겨루는 말. 그 말이 이제 여기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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