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일본 약탈 문화재 반환 요구…"이토 히로부미 고려자기를 반환하라"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제2부 ③ 이토 히로무비의 고려자기 97점을 돌려받다

한국정부의 고려자기 반환 자료 준비

지금까지 이토 히로부미와 고려자기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봤다. 그렇다면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는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그리고 교섭 결과는 어떠했을까?

▲ 제4차 회담 당시 황수영이 작성한 문화재 목록 관련 보고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와 오구라 다케노스케 소장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 측은 한일화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를 주요 반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일본인들에 의해 고려시대 고분이 불법적으로 도굴되어 고려자기가 매매되었다는 점, 통감이나 총독의 권력을 배경으로 불법 반출된 것이라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고려자기의 반환을 수 차례 요청했다.

제4차 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 교섭에 전문위원으로 참가한 황수영은 반환을 요구할 문화재 목록을 정리하기도 했다. '문화재 목록 검토의 건'(1958년 7월 21일)이라는 보고서에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자기는 386점이고, 그중에는 메이지 덴노에게 헌상한 최우수품 고려자기 96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이 고려자기의 반출 경위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1907년 소위 통감으로서 내한 중인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개성을 중심으로 일인에 의하여 고려시대 왕족의 능묘로부터 대규모로 도굴·매매되고 있던 고려자기 중 우수한 것을 선택하여 일왕에게 헌상품으로서 송부되었던 바 이들은 그 후 당시의 제실박물관(현재의 도쿄국립박물관)에 '하사'되었나이다. 이 같은 사실과 그 목록은 좌측 문헌에 의하여 확인되었사 온 바 이 고려자기는 청자, 백자를 포함하고 종류와 작품에 있어서 일본의 국립기관에 보관하는 동 종류의 유물 중 가장 우량한 것임.

한국 측은 이와 같은 황수영의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일본 측에 고려자기 도굴과 반출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반환을 요구한다.

한국 측,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반환 요구

제5차 회담부터 문화재 목록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국 측은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1960년 11월 11일)에서 '문화재 반환의 7항목'을 제출했고, 한일 양국은 이를 중심으로 전문가회의에서 문화재 목록을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제1회 전문가회의(1961년 3월 7일)에서 한국 측은 고대 분묘 출토 유물, 궁전 또는 사찰 유적의 석조물, 회화, 고서적 등의 반출 경위를 설명했다. 일본으로 반출된 문화재 대부분은 고대 분묘에서 출토된 것이며, 이는 국고에 귀속된다는 점, 한국에는 그와 같은 전례품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불법 반출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수만 고분의 파괴와 그 출토품의 일본 반출은 뚜렷한 예일 것이다. 한일합방에 앞서서 일본 동경에서 대규모의 고려자기 전람회가 있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면서 고려자기의 불법 반출을 지적했다.

제2회 전문가회의(1961년 5월 8일)에서는 제3항목 소위 통감 또는 총독에 의해 반출된 문화재의 대표적인 예로 "이등박문이 반출하여 일본 황실에 '진상'한 고려자기를 지적"하면서 일본인들이 고분을 대규모로 도굴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일본 측, 이토 히로부미는 '훌륭한 분'

제6차 회담에서도 한국 측은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반환을 요청한다.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1961년 11월 7일)에서 제1항목부터 제3항목까지 논의를 했는데, 한국 측은 해당 문화재들이 모두 불법 반출된 것이기 때문에 반환할 것을 요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논의가 있었다.

한국 측: 제3항목으로서는 '소위 통감, 총독 등에 의하여 반출된 문화재'가 있는데, 그들에 의한 반출은 그들이 행사할 수 있었던 권력을 배경 삼아서 비로소 달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므로 소위 총독부에 의하여 반출된 것에 준하여 반환을 청구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한 고려자기의 수집, '데라우치 마사타케'에 의한 전적, 기타 미술품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귀측의 의견을 알려 주기 바란다.

일본 측: 이토 씨, 데라우치 씨는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약탈하거나 훔치거나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에게 받았거나 샀거나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 제6차 회담 제1회 문화재소위원회 관련 외교문서. 당시 일본 측은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훌륭한 사람'이므로 문화재를 약탈할 리 없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 한국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한국 측은 위의 발언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초대 통감, 그리고 그 이전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갔던 이토 히로부미와 제3대 통감으로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초대 총독으로 무단 통치를 자행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만큼 존경심도 있었기 때문에 고려자기를 수탈해 갈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초대 통감과 초대 총독이라는 조선 침략의 상징적인 인물들, 그리고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 한일 양국의 인식 차이는 이와 같이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일본 측의 이토 히로부미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발언은 한일 양국의 굴곡진 역사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3회 문화재소위원회(1961년 11월 17일)에서는 제5항목 '고려시대의 분묘 및 그 외 유적에서 발굴된 문화재'와 관련해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가 논의되었다. 한국 측은 전세품인 고려자기는 거의 없었고, 일본인들이 개성 등지에서 수만의 고분을 파헤치고 고려자기, 청자, 불상, 묘지석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물을 가져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한국 측이 앞에서 설명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간의 고려자기 일화를 예를 들면서 왕조차 고려자기를 본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후 제7회 문화재소위원회(1962년 2월 28일)에서 한국 측은 '반환 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을 제출하면서 목록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한다. 동 목록의 제2항 '통감 및 총독 등에 의해 반출된 것' 중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가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었고, 한국 측은 "국유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고, 1919년 도쿄제실박물관 미술공예부 제2구 자기류 목록에 게재되어 있으며, 103점이다. 이것들은, 처음에 메이지 덴노에게 헌상되어, 그 후 궁내성이 제실박물관에 보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97점을 돌려받다

한일회담을 마무리짓는 제7차 회담이 1964년 12월 3일에 시작된다. 한일 양국은 제7차 회담에서 문화재 반환 교섭을 비롯한 주요 의제들의 교섭도 모두 타결했다. 그렇다면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는 어떻게 논의되었을까?

일본 측은 한일회담 타결 11일을 앞둔 6월 11일이 되어서야 도자기 72점, 고고자료 291점, 석조미술품 3점, 고서적 163부 852책, 체신 문화재 35점을 포함한 인도 문화재 품목을 제시했다. 이는 최종 목록이며, 한국 측이 요구한 절반 가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이 목록에 한국 측도 동의해 줄 것 등을 요청했다. 이 목록에 있는 도자기 72점은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였다.

이에 한국 측은 6월 15일에 열린 제4회 문화재소위원회에서 "일본안에 기재된 인도 품목에는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또한 지금까지 한국 측이 요망해 온 중요 품목이 빠져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이 점 일본 측의 재검토를 강하게 희망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한국 측은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 측이 인도 문화재 목록을 처음으로 제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논의한 적도 없었고, 심지어 그동안 요구해 오던 문화재들도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측은 6월 16일에 열린 제5회 문화재소위원회에서도 '일방적인 인도 문화재 목록 제시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목록을 살펴본 결과 중요한 것은 모두 빠져 있다'는 취지의 입장을 다시 설명하며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등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72점을 결정한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 일본 측이 6월 18일 회의에서 일본에 남기고 싶다고 설명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6점. ⓒ 日本政府(일본정부)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72점은 실물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질적으로 좋은 것이 없는 듯하므로 남은 것 모두를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한국 측은 "일본에는 민간에 좋은 자기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라고 묻자 일본 측은 "민간품은 아무리 좋은 것이 있더라도 여기에 손을 델 수가 없다", "고려자기는 박물관에 있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것뿐으로 이것을 내어 버리면 국유의 고려자기는 없어져 버린다"라고 답했다.

결국 인도 문화재 목록은 합의되지 않은 채 6월 18일 자정부터 열린 논의로 이어진다. 첫 번째 회의에서 일본 측은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와 관련해서 12점만 일본에 남기고 나머지는 인도하겠다고 제안하자 한국 측은 전부를 인도해 달라고 주장했다. 이를 둘러싼 논의 끝에 한일 양국은 일본에 6점을 남기고 97점을 한국 측에 건네기로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두 번째 회의에서 일본 측은 일본에 남기고자 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경상남북도 소재 분묘 및 그 외 유적에서 출토된 것', '고려시대 분묘 그 외 유적에서 출토된 것'의 구체적인 품목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므로 잠시 휴회를 요청했다.

세 번째 회의에서 일본 측은 "이미 한국 측의 요망을 충분히 받아들여 상당히 양보한 선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측이 아직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은 도대체 어느 선이 되어야만 타결할 것인지 끝이 없다", "이전 회의에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 너무 이해하기 힘들다"라며 한국 측의 태도에 불만을 드러냈다. 한국 측은 97점을 돌려받는 방침은 변한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품목을 듣고 이를 더 논의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후 네 번째 회의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97점을 돌려받는 것을 포함한 인도 문화재 품목 논의가 모두 종료되었다.

고려자기 수탈, 한일 양국의 굴곡진 역사의 한 단면

지금까지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를 둘러싼 일화, 그리고 한일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를 살펴봤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일 양국의 굴곡진 근대사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1900년 전후로 개성을 비롯하여 강화도, 해주 등지에서 수많은 고려시대 고분을 불법 도굴하면서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고려자기가 긁어모았다. 당시 조선이 아직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적인 고려시대 고분 도굴과 고려자기 매매를 자행한 것이었다. 힘이 없었던 조선은 고려시대 고분을 지킬 수 있는 안전지대가 아닌 도굴이 성행해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법지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6년에 통감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고려청자광' 시대로 부를 만큼 수 많은 고려자기들이 일본인들의 불법 매매 대상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또한 수천 점의 고려자기를 손에 넣었다. 그렇게 고려자기들은 수십 년간 일본인들에 의해 수탈되었다.

▲ 1966년 5월 28일에 인도된 문화재 중 고려자기를 둘러보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국가기록원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은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를 주요 반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제5차 회담 때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제7차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97점을 인도받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간 103점의 고려자기를 모두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당시 한국 측의 노력으로 일본 측이 처음에 제시한 73점보다 많은 97점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처참하게 파헤쳐지고 도굴당한 고려시대 고분들, 그리고 불법 매매가 자행된 고려자기. 수많은 고려자기를 일본에 수탈당한 만큼 역사의 살갗에는 지워지지 못할 깊은 상처가 아로새겨졌다. 일본인들이 수탈해 간 고려자기는 현재 누가 무엇을 어디에서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또한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우리가 선조들이 만든 우리 문화재의 행방조차 알 길이 없는 현실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연구하는 한 학자로서 슬프고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 참고문헌

한국정부 및 日本政府 공개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

엄태봉,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문제의 구조'>, 경인문화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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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태봉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정치학자로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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