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 미국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란 맘다니가 당선되자 언론 지면과 사회관계망 서비스 화면은 온통 '맘다니'라는 낯선 이름으로 도배됐다. 몇 달 전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 예비경선에서 맘다니 시의원이 쟁쟁한 다른 주자들을 제치고 후보로 선출됐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만 해도 다들 '만다니'인지 '망담니'인지 이름마저 헷갈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이름을 모르면 상식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할 지경이다. 그만큼 자칭 '민주사회주의자'가 자본주의 유일체제 시대에 뉴욕시장이 됐다는 사실이 세계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뉴욕시장 선거 있기 며칠 전인 10월 25일에는 아일랜드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단일후보 캐서린 코놀리가 압승을 거뒀다. 아일랜드에서는 노선이야 달랐더라도 어쨌든 반영국 독립투쟁에 뿌리를 둔 두 우파정당, '피어너 팔'(흔히 '공화당'이라 소개된다)과 '피너 게일'(흔히 '통합아일랜드당'이라 소개된다)이 오랫동안 교대로 집권해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재정위기 이후 줄곧 신페인당, 사회민주당, '이윤보다 인간-연대' 같은 좌파 정치세력들이 지지를 늘리더니 급기야 이들이 함께 지지한 코놀리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NATO의 군비 확장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아일랜드공화국 대통령의 등장은 맘다니 당선과 함께 또 다른 신선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떠들썩한 주목을 받을만하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뉴욕과 아일랜드를 넘어 과연 어떤 보편적이며 중장기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런 이변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분석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데 뜬금없이 '서울의 맘다니'를 자처하고 나서거나 다른 이들의 '맘다니'론에 훈수와 핀잔을 토하는 글들은 많아도 정작 두 사건을 관통하는 특정한 민주주의 제도의 중대한 역할에 충분히 눈길을 주는 경우는 찾기 쉽지 않다. 그 제도란 바로 선거제도다.
맘다니와 코놀리, 즉석결선투표제도를 통과하다
뉴욕시장 선거를 앞둔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민주당 주류가 지지한 후보는 앤드루 쿠오모였다. 쿠오모는 예비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본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맘다니에게 결국 패배하고 말았는데, 어쨌든 예비경선에서 민주당 주류 성향 유권자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쿠오모 말고 다른 유력 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 주류를 심판하고자 한 진보적 유권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맘다니 말고도 유능하고 원칙 있는 후보가 한 사람 더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 처음 뉴욕시의원으로 당선돼 12년 동안이나 시의회에서 활약했고 2021년에는 뉴욕시 회계감사관으로 선출된 브래드 랜더가 그 사람이었다.
랜더는 시의원으로 있으면서 뉴욕시에 참여예산제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고, 노동자와 세입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정 활동을 펼쳤다. 이번 선거에서 맘다니 지지를 선언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하원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2021년 회계감사관 선거에서는 랜더의 공식 지지자였다. 맘다니와 랜더의 차이라면, 맘다니는 민주당 후보이기 이전에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DSA)'의 회원이라는 정체성이 강한 데 반해 랜더는 좀 더 전통적인 민주당 좌파 혹은 리버럴 좌파라는 정도였다.
한국이었다면 예비경선에 참여한 진보 성향 시민들이 맘다니와 랜더, 둘 사이에서 엄청나게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평소 시의회나 시청에서는 막역한 동지 관계였던 두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서로를 깎아내리다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됐을 가능성이 높고, 유권자들은 둘 중 누가 쿠오모를 꺾는 데 더 유리한지 따지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시 민주당 예비경선에서는 후보와 유권자 모두 이런 시련을 겪지 않아도 된다. '즉석결선투표제(instant-runoff voting)'로 시장 후보를 선출하기 때문이다. 즉석결선투표제는 '대안투표제(alternative voting)' 혹은 '선호투표제(preferential voting)'라 불리기도 한다. 한데 '대안투표제'나 '선호투표제'라고 하면, 이름만 들어서는 도대체 어떤 투표제도인지 감이 잘 안 온다. 반면에 '즉석결선투표제'는 그 의미를 직관적으로 전달해준다. 이 제도는 한 마디로, 유권자가 투표를 한 번만 하고도 1차 선거와 결선을 동시에 치르는 효과를 거두게 하는 투표제도다.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가 되려면 예비경선 투표자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결선투표제 원리와 같다. 그러나 뉴욕시 민주당은 시장 후보 결선을 따로 치르지 않는다. 유권자는 투표용지에 적힌 시장 후보 모두에 대해 선호 순위를 매긴다. 가령 맘다니를 1순위 지지 후보로 기표하고, 랜더를 2순위로, 쿠오모는 가장 낮은 순위로 기표하는 식이다. 이런 유권자의 선호도 표시 덕분에 즉석결선투표제에서는 굳이 결선투표를 따로 실시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예비경선에서는 1순위 투표만 개표했을 때 맘다니가 44%, 쿠오모가 36%, 랜더가 11%를 득표했다. 맘다니가 1위를 달리기는 했지만, 민주당 시장 후보가 되는 데 필요한 과반은 획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각 1위, 2위를 한 맘다니와 쿠오모를 제외하고 나머지 후보들을 탈락시킨 뒤에 이 후보들을 1순위로 지지한 표 가운데 2순위로 맘다니나 쿠오모를 지지한 표를 두 후보의 득표에 각각 합산했다. 그랬더니 맘다니 56%, 쿠오모 44%라는 결과가 나왔고, 맘다니가 과반수 지지를 받는 시장 후보로 최종 선출됐다.
이런 투표제도 아래에서 경쟁했기에 맘다니 진영과 랜더 진영은 굳이 복잡한 정치 게임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두 진영은 예비경선 캠페인 기간부터 서로 연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진보적 유권자들은 맘다니와 랜더를 1순위나 2순위로 기표하는 단순한 선택을 통해 이런 연대를 손쉽게 정치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맘다니가 시장 후보로 결정된 뒤에 랜더는 맘다니 선거운동에 발 벗고 뛰어들었다.
뉴욕시 민주당에 이런 투표제도가 도입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6년 전인 2019년에 뉴욕시는 시민투표를 통해 처음으로 각 당의 시 공직자 예비경선에서 즉석결선투표제를 실시할 수 있다는(정확히는, 투표자가 복수 후보를 선택하는 투표제도를 실시할 수 있다는)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2021년 민주당 예비경선부터 즉석결선투표제로 시장 후보를 선출했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이런 방식에 따라 맘다니를 시장 후보로 선택했다. 소선거구제-단순다수대표제만 완강히 고집하는 것 같은 미국에서도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이렇게 조금씩이나 기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이 이제 막 이 길에 들어섰다면, 아일랜드는 즉석결선투표제의 본고장이라 해도 좋을 만큼 그 역사가 오래 됐다. 아일랜드에서는, 이번에 캐서린 코놀리가 승리한 대통령 선거를 오래 전부터 즉석결선투표제로 치러왔다. 이 제도 덕분에 양대 정당, '피어너 팔'과 '피너 게일' 말고도 노동당 같은 상대적 소수 정당 역시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 선거에서는 코놀리 후보가 워낙 압도적인 1순위지지 표(63%)를 얻는 바람에 결선투표에 해당하는 추가 개표 절차를 진행하지 않아도 되었다.
뉴욕뿐만 아니라 이런 아일랜드 사례까지 확인하고 나면, 이제 눈길이 우리 자신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투표자 과반수 지지로 선출해야 한다는 주장, 즉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개혁을 외치는 이들의 오랜 숙원이다. 지금 당장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면, 가장 확실하게 국민투표를 통과할 개헌 의제는 결선투표제 도입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시야를 조금만 더 확장하면, 결선투표제 도입 취지를 구현할 또 다른 방안으로서 아일랜드 대통령선거식 즉석결선투표제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면 국력을 낭비할 뿐이라는, 지겨운 반론에 굳이 대꾸할 필요 없이 우리도 대통령을 즉석결선투표제로 뽑는 게 어떨까.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구현하려는 제도적 틀은 이처럼,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허용해온 상식의 한계보다 훨씬 더 광범하고 다양하다.
아일랜드 정치의 역동성을 일군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
아일랜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일랜드 하원의원 선거의 독특한 투표 방식도 짚어볼까 한다. 아일랜드는 '단기이양식 비례대표제(single transferable voting)'로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단기이양식'이라니, '대안투표제'나 '선호투표제' 같은 말보다 더 아리송하기만 하다. 일단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제도가 어쨌든 비례대표제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독일식 소선거구-정당명부 연동형 비례대표제나 북유럽식 광역별(대선거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비례대표제다.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는 우선 광역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와 마찬가지로 선거구마다 복수의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보통 한 선거구에서 3명에서 5명의 하원의원을 선출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의 중선거구제처럼 유권자가 한 명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고 종다수로 2위 득표를 한 후보까지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방식이 '결코' 아니다. 유권자들은 마치 즉석결선투표제의 경우처럼 복수의 후보에 대해 선호도를 기표한다. 단, 이 경우에 복수의 후보를 선택하는 이유는 한 후보를 과반 득표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서다.
이 대목에서 좀 복잡한 논의가 등장한다.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에서는 각 선거구마다 복수 당선자의 당선 기준이 될 '기준수'를 산출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산정 방식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3인 선거구에서 기준수는 26%이고, 4인 선거구에서는 21%, 5인 선거구에서는 17%다(데이비드 파렐, 선거제도의 이해, 전용주 옮김, 한울, 2012. 203쪽). 즉, 3인 선거구에서 당선자는 득표율이 26%를 넘어야 한다. 1순위 지지 표가 이미 기준수, 즉 26%를 넘는다면, 그 후보는 단번에 당선이 확정된다.
문제는 나머지 2인의 당선자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두 가지 방향에서 차순위 지지표를 각 후보에게 합산해 기준수인 26%를 넘는 또 다른 당선자들을 산정해낸다. 한편으로는 이미 당선이 확정된 후보의 득표 중 26%를 초과하여 '남은' 표를 2순위 지지 기표 내용에 따라 다른 후보에게 배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1순위 지지 표를 가장 적게 받은 후보부터 탈락시키면서 그가 받은 표를 2순위 지지 기표 내용에 따라 남은 다른 후보에게 배분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국 최종 합산이 26%를 넘는 3인의 하원의원 당선자를 확정한다.
글로만 봐서는 누구든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누구나 모의 투표를 한 번만 해보면, 단박에 익숙해질 수 있다. 아일랜드 국민 500여만 명이 다 수학 천재라서 이런 투표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민주 사회의 시민이면 누구나 경험으로 익힐 수 있는 제도이기에 아일랜드에서 지금껏 운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이런 아일랜드 하원의원 선출 방식이 다른 비례대표제들과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인지만 확인하고 넘어가자. 독일식이든 북유럽식이든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결국 유권자가 '하나의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투표제도다. 그러나 아일랜드식은 비례대표제임에도 유권자가 '복수의 후보'를 선택한다. 유권자는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기보다는 자기가 선호하는 전체적인 정치 지형을 염두에 두고 그에 걸맞게 후보들에게 순위를 매긴다. 결과적으로 다른 비례대표제와 마찬가지로 승자 독식을 피하고 다당 구도를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동하는 유권자의 선택 논리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들과는 다르다.
아무튼 아일랜드는 독립 이후 계속 이런 비례대표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피어너 팔'과 '피너 게일'이 교대로 집권하는 와중에도 상대적 소수 세력이나 신진 세력의 원내 진출 통로를 열어놓을 수 있었다. 덕분에 캐스팅보트 역할을 통해 현실 정치에 계속 개입하면서 양대 우파정당의 정책 변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대표적 정치세력이 20세기에 아일랜드에서 좌파-노동계급 여론을 대변한 노동당이다.
그리고 오늘날은 아일랜드식 비례대표제를 바탕으로 새 세대 좌파 정치세력들이 노동당을 대체하며 성장하고 있다. 남북 아일랜드 통일과 사회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페인당이 2020년 총선에서 제1당(1순위 지지 24.5%)으로 부상할 만큼 약진했으며,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세대교체를 내걸고 노동당에서 분리한 사회민주당이 2024년 총선에서 노동당보다 많은 1순위 지지(4.8%, 노동당은 4.6%)를 기록하는가 하면 트로츠키주의 정파들의 연합인 '이윤보다 인간-연대'가 원내에 계속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이번 대선에서 코놀리 후보의 승리를 이뤄낸 주역들이다.
'그럼에도' 선거제도 개혁은 중요하다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필생의 과제였던 선거제도 개혁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비례위성정당의 일상화라는 난장판으로 귀결된 이후에 '선거제도 개혁'은 다시 꺼내기 쉽지 않은 구호가 되어 버렸다. 혁명의 원대한 꿈을 꾸는 이들은 여전히 이따위 하찮은 '개량'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현실 정치를 파고들자고 하는 이들은 더 이상 선거제도를 탓하지 말고 '한국형' 정치 지형에 익숙해지라고 훈계한다.
그러나 문제는 진보정당의 성장 여부가 아니다.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의 더 풍부하고 생생한 발전을 위해서다. 그런 성숙해진 민주주의가 있기에 좌파나 신진 세력이 진출하기도 수월해지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선거운동원의 호별 방문을 허용하는 민주주의였기에 맘다니 시의원 같은 신진 후보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고, 독특한 비례대표제를 시행하는 민주주의였기에 금융-재정위기 속에 신페인당 같은 대안 세력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국의 '가난한' 정치 지형에 던져진다면, 맘다니는 '공직 박탈이 확정된 선거법 위반 사범'일 뿐이고, 북아일랜드 투쟁에서 잔뼈가 굵은 신페인당 고참 당원들은 '현실 정치에 무능한 늙은 운동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이 모든 아수라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선거제도 개혁을 다시 의제에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과제들의 긴 목록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바꾸는 일은 여러 과제들의 하나일 수는 있어도 절대로 생략되거나 주변으로 밀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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