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의 옛 읍성 동문안에는 한 쌍의 돌로 깎은 석장승이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데 서쪽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이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이 장승은 부안에서는 ‘벅수’라고도 하는데 몸체에 ‘상원주장군’이라 새겨져 있고 동쪽의 ‘하원당장군’과 더불어 주신인 당산을 보조하고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며 질병과 액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상원주장군의 생김새는 다름 아닌 제주도 돌하루방의 모습이 연상되는데 벙거지 모양의 모자나 부리부리하고 툭 튀어나온 두 눈하며 커다란 주먹코와 귀, 앙 다문 입까지 빼닮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물길 건너 800리나 떨어진 제주도의 돌하루방을 닮은 돌장승이 부안에서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일까.
제주도와 부안의 인연은 약 800년 전인 12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도가 이처럼 정확한 것은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전라도 제주목 풍속조와 '탐라지'의 풍속 조 등에 따르면 "제주의 땅에는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 콩, 조만이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으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내용은 고려시대 김구(金坵·1211~1278)의 행적과 글을 담은 '지포선생문집'의 부록에 실린 연보(年譜)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놀라운 점은 제주판관에 부임했을 당시(1234년) 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의 약관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제주도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1980년대 삼양동에 '돌문화의 은인 판관김구 공적비'를 세웠고 2020년에는 돌문화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내 비석거리 인근에 '판관김구 공적비'를 세웠다.
제주특별자치도지사 명의로 된 공적비 비문에는 '제주에 최초로 돌담을 쌓게 한 김구 판관은 백성을 위한 목민관으로 고려말에 성리학을 도입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한 학자이자 시인이다. 선생께서는 제주판관으로 재임 중에 밭의 경계가 없어 발생하는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토지 소유의 경계에 돌담을 쌓도록 함으로써 밭의 경계가 분명해져 백성들이 편해졌고 우마와 바람으로부터 밭을 보호해 주기도 했으며 제주 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는 초석을 마련하여 더욱 상징적인 역사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공적비를 세운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인연은 지금도 꾸준하게 이어지며 제주도와 전북 부안에서 열리는 학술 행사에서 양 지역의 학자들은 김구와 밭담에 대한 여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부안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의 대접주였던 '김낙철(金洛喆, 1858~1917)' 또한 제주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는데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5'에 실려 있는 '김낙철 역사'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하루는 나주 수성군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부안 김모 형제(김낙철 형제)가 30여명 죄인 중에 어떻게 살아났는지 아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제주 뱃사람 40~50명이 배를 타고 영광 등지를 지나다 '부안 대접주 김낙철, 낙봉 형제가 나주 진영에 잡혀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갑오년에 우리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몇 만명이나 되는 인민들이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는데 부안 김모 형제의 애휼지덕(愛恤之德)을 입어서 목숨이 보전되었는데 만약 그들이 죽을 지경에 이른다면 하늘이 어찌 돌아본다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나주군에 죽는다 할지라도 구활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하고 일제히 나주감영에 들어가 나주목사에게 등장(等狀)을 올려 호소하기를, '제주도가 계사(1893), 갑오(1894) 두 해에 큰 가뭄을 만나 경내 수많은 생령들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생선 등을 배에 싣고 전라도 각 포구에 이르러 곡식과 바꾸려는데 다른 포구에서는 탁란군(동학농민군)에게 모두 빼앗겼으나 오직 부안에서는 혹시 물건을 빼앗기면 김모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추급했기 때문에 단 한 홉의 곡식도 빼앗기지 않아 제주 경내의 인민들이 부안군의 조맥(租麥)으로 모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김모 형제의 덕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김모 형제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여 주소서'라고 호소하니 나주목사는(…) 탄복하면서 폐하에게 장계(狀啓)를 올리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김낙철 대접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1894년 4월, 다른 지역과 달리 무력으로 관아를 접수하지 않고 군수와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 도소를 설치했고 폭력을 최소화하는 등의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그러다 1894년 12월 11일 동생 낙봉은 물론 다른 동학농민군 32명과 함께 체포되어 나주관아로 이감되었다. 이들 중 김낙철 형제와 3명을 제외한 27명은 곧바로 처형당하였으나 앞의 설명대로 소식을 전해들은 제주도민들이 나주진영에 몰려가 구명을 애원함으로 처형은 면하고 서울로 이송되었다. 결국 '김낙철이 동학당에 들어간 것은 확실하지만 범죄에 대한 증빙이 확실치 않아 무죄로 풀어준다'는 판결을 받고 이듬해 초 풀려나게 되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제주도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구해준 김낙철은 후에 제주도민들의 호소 덕분에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런 양 지역의 인연에 깊은 관심을 보여온 김정기 전북특별자치도의원(더불어민주당, 부안)은 수년 전부터 제주도와 전북도의 직접적인 교류를 위해 수차례 제주를 찾았으며 마침내 6일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제주학연구센터, 제주문화원, 제주연구원 등에서 대거 부안을 방문하게 됐다.
이번 전북 부안 방문의 참석자들을 보면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서는 현길호 보건복지안전위원장, 정민구 환경도시위원장, 박두화 문화관광체육위원회 부위원장, 박호형 행정자치위원장 등이 함께했다.
또한 류일순 제주도 문화체육교육국장과 김미선 역사정립TF팀장, 제주학연구센터 김완병 센터장, 제주문화원 백종진 국장, 서경호 제주연구원 연구위원 등도 동석했다.
부안예술회관에서 '전북-제주 문화교류 기념전시'행사를 마치고 한국학미래진흥원과 지포 김구의 묘역을 방문하는 등의 일정을 진행했다.
특히 전북-제주문화교류 기념전에서 선보인 부안의 동문안 당산과 제주 돌하루방 '목(木)장승'은 '인연은 서로를 닮아가게 한다'는 주제를 반영하듯 묘하게도 닮아 양 지역 관계자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날 이정석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인사말을 통해 "김구 선생의 돌담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육지와 섬을 잇는 마음의 다리였다"면서 "오늘 우리가 전북과 제주의 문화를 다시 이어가는 일 또한 그 정신의 현대적 계승으로 오늘 이 자리가 서로의 유산을 나누고 배우며 상생의 길을 여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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