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재난, 방치된 고등교육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한국의 고등교육은 지금 재난의 초입에 서 있다. 재난은 언제나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무관심과 구조적 방기의 결과다. 건물이나 제방이 갑작스레 붕괴된 것처럼 보이나 붕괴된 건물에는 이미 균열이 있었고, 폭우로 인한 인명사고 역시 경고의 신호가 있었다. 대학의 위기도 다르지 않다. 학령인구 감소, 지방대 소멸, 인문사회계열의 급격한 축소는 모두 오래전부터 관측되어 왔지만 우리는 그 경고음을 정치와 시장의 논리로만 해결하려 했다. 국가는 그 신호를 무시한 채 교육을 정치와 시장의 변동에 방치해왔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고등교육의 위기는, 실은 예견된 사회적 재난이다.

한국 근대 대학의 기원부터 돌아보면, 고등교육이 국가의 장기적 안목 속에서 설계된 적은 거의 없었다. 서울대학교가 미군정에 의해 급히 세워졌듯이, 대학은 '독립 국가의 고등교육 비전'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필요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성장 정책 속에서 대학은 엘리트 위주의 ‘인력 양성 기관’으로 기능했을 뿐, 학문과 사회가 만나는 지적 기반으로서의 위상을 갖지 못했다. 교육정책의 중심이 늘 유초중 등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고등교육은 국가적 설계의 사각지대였다.

그 공백은 지금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생존의 논리가 곧 학문을 압박한다.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인문사회계열이다. 대학은 '비인기학과'라고 낙인찍힌 인문학과 사회학을 통폐합하며, 대신 취업률이 높은 실용학과를 신설한다. 드론 공학, AI 학과, 게임애니메이션, 미용 예술, 모델학 등 새로운 전공이 생겨나지만, 그것은 대학의 미래 전략이라기보다 ‘등록금 확보’라는 절박한 자구책이다. 이렇게 대학의 구조조정은 학문을 ‘시장 가치’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다. 그러나 단기적 수요에 기반한 생존 전략은 장기적으로 대학의 존재 이유를 허물고, 사회 전체의 지적 토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출범하며 교육의 중장기적 설계를 약속했지만, 실제 운영은 초·중등 중심에 머물렀다. 대학 정책은 여전히 교육부의 단기 행정 정책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국교위는 실질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사후 승인 기구'로 전락했다. 고등교육에 대한 장기적 비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글로컬 대학', 'AI 기반 혁신대학', '의대 정원 확대' 같은 정책들은 일시적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이는 재난이 닥친 뒤 구조 활동을 흉내 내는 ‘대응형 행정’의 전형이다. 예방이 아니라 사후 대응에 머무르는 국가 교육 정책은 결국 교육 재난을 더욱 심화시킨다.

재난 대응학에서 말하는 '예방'과 '복구'의 패러다임을 교육에 적용해 보면, 지금 한국의 고등교육 정책은 전형적인 '사후 복구형 대응'에 머물러 있다. 재난이 터진 뒤 구조와 복구를 논하듯, 대학이 이미 위기에 빠진 뒤에야 긴급 지원, 통폐합, 구조조정이 논의된다. 그러나 진정한 재난 대응은 사전 예방과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강화하는 것이다. 학령인구 감소가 예견된 시점에서 이미 대학의 구조와 학문생태계를 재설계했더라면, 지금처럼 대량의 학문 공백과 연구자 유출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문사회학의 축소는 단순한 학과 문제를 넘어 사회적 재난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문학적 사고와 사회비판적 이해가 사라진 사회는, 기술과 효율의 논리만 남은 비인간적 사회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학문은 사회의 집단지성을 구성하는 기반이며, 대학은 그 지성을 재생산하는 공공의 장이다. 지금의 대학 구조조정은 그 기반을 허물고 있다. 인문사회학의 교수는 줄고, 대학원은 사라지고, 신진 연구자는 설 자리를 잃는다. 이는 결국 국가의 지식생산 체계를 붕괴시키는 연쇄적 재난이다.

OECD 주요 국가들은 고등교육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다루며, 학문 분야별 설계·재정·인력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한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대학 자율'이라는 명목 아래 구조조정의 책임을 대학에 전가한다. 정부는 대학을 살리는 대신 시장에 맡기고, 국교위는 이를 감시하거나 설계할 권한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정치적 독립성’이라는 명분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정책적 무책임 또는 방기'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고등교육은 단지 한 부처의 행정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등 교육 정책의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대학을 생존의 단위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 회복력의 핵심으로 인식해야 한다. 재난 이후의 복구가 아니라, 재난을 예방하고 대비하는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 출발점은 국가교육위원회의 전문성 강화와 고등교육 분과 신설이다. 현장 기반의 정책연구, 교수·연구자·학생이 참여하는 공론화 절차, 그리고 학문 다양성 보존에 대한 명시적 국가 책무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전문성에 기반한 공공적 설계력'에서 비롯된다.

재난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맞닥뜨린 위기도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위기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멈추게 하는 일이다. 대학의 위기를 사회적 재난으로 인식하고, 고등교육을 국가적 책무로 되돌려야 한다. 학문을 지키는 일은 곧 사회를 지키는 일이다. 고등교육의 회복탄력성은 민주 사회의 회복탄력성과 맞닿아 있다.

지금, 우리는 재난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맞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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