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성평등가족부'로 새롭게 출범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폐지 수순을 밟으며 16개월간 장관 자리조차 공석이었던 부처가, 이재명 정부 들어 오히려 확대 개편되었다. 정부는 성평등정책실을 신설하고 고용노동부의 여성고용정책을 통합하며 "성평등 정책 컨트롤타워"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남성 역차별'을 연구하는 부서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환영과 기대 속에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단순한 명칭 변경과 조직 확대가 과연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성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을까. 지난 30년간 제도는 갖추어졌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던 이유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성평등가족부 역시 또 다른 실패의 역사를 반복할 위험이 크다.
왜 여성가족부는 실패했는가: 선언만 있고 자원은 없었다
한국의 성평등 지표는 처참하다.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 격차 1위(29.3%), 유리천장 지수 최하위, 관리직 여성 비율은 고작 15.4%로 OECD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계 최저 수준의 합계출산율(0.75명)은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여성에게 육아와 가사를 전담시키고 남성에게는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누가 기꺼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겠는가.
그동안 여성가족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성평등기본법도 제정되었고, 육아휴직 제도도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현실이 바뀌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돌봄의 공공화 실패다. 국가는 여성에게 '일터로 나오라'고 했지만, 그들의 자녀를 누가 돌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한국의 공공보육시설 비율은 15%로, 스웨덴의 85%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맞벌이 부부조차 아내가 남편보다 3.7배 더 많은 가사노동을 감당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둘째, 남성 참여 유도 실패다. 최근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이 31.6%로 상승한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는 동시에 '권장'과 '인센티브'에 기반한 정책의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노르웨이가 '아버지 할당제'라는 의무적 제도를 통해 남성 육아휴직률을 4%에서 90%로 끌어올린 것과 비교하면, 우리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단순한 '권장'이 아닌, 강력한 '강제'와 '인센티브'가 어떻게 뿌리 깊은 문화를 바꿀 수 있는지를 노르웨이 사례는 명확히 보여준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자원 투입의 부재다. 한국의 가족정책 관련 예산은 GDP 대비 1.6%로, OECD 평균(2~3%)에 크게 못 미친다. 내년도 성평등가족부 예산안은 전체 정부 예산의 0.27%인 1조 9866억 원에 불과하다. 자원 없는 선언은 공허할 뿐이다.
성평등가족부가 해야 할 일: 북유럽에서 배우는 교훈
이제 우리는 실패의 교훈을 넘어, 성공의 길을 걸어간 나라들의 사례에서 상상력을 얻어야 한다. 1975년 10월 24일 아이슬란드에서 여성의 75%가 모든 노동을 하루 동안 전면 중단했다. 나라는 그대로 멈췄고, 이 단 하루의 파업은 이듬해 성평등법 제정과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 탄생으로 이어졌다.
노르웨이의 '아버지 할당제'는 단순히 남성의 육아 참여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연쇄 효과를 일으켰다. 여성에게는 경력단절이 줄고 관리직 비율이 약 35%까지 증가했으며, 성별 임금 격차는 약 6% 수준으로 좁혀졌다. 남성에게는 자녀와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혼자 짊어졌던 생계부양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80%에 달하며 출산율은 한국의 2배 수준을 유지하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남성 수준으로 높아질 경우 GDP가 최대 10%까지 성장할 수 있다. 돌봄 인프라 확충은 저출산 해법이자 가장 확실한 성장 전략이다. 스웨덴의 사례가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성평등 정책이 50년이 걸린 장기적 과제였다는 사실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사회적 합의'와 정책의 '일관성'이 성공의 핵심이었다.
성평등가족부에 던지는 세 가지 질문
그렇다면 새롭게 출범한 성평등가족부는 이러한 교훈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예산과 권한이다. 정부는 "성평등 정책 컨트롤타워"를 표방하지만, 전체 예산의 0.27%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부처 간 성평등 정책을 조율할 조정 권한조차 명문화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정책의 진정성은 예산과 제도적 권한으로 입증되는 법"이다. 국회는 예산 심의 과정에서 대폭적인 증액과 실질적 권한 부여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 '남성 역차별' 연구 부서의 방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청년 남성의 70%가 남성이 차별받는다고 느낀다"며 이를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객관적 지표들이 명백히 여성의 구조적 불이익을 보여줌에도, 젊은 남성들의 '역차별' 인식이 높다는 것이다. 이는 진짜 문제인 저성장, 양극화, 부동산 폭등과 같은 거대한 구조적 불안이 특정 집단에게 '전치(displacement)'되는 심리 기제의 결과다.
성평등가족부는 이를 제로섬 게임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남성 역시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희생자임을, 성평등이 남성에게도 이익이 됨을 설득해야 한다. 캐나다 정부의 캠페인처럼 "성평등은 모두를 이롭게 한다. 더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덜 스트레스받는 강한 가족, 더 생산적인 일터를 만든다"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셋째, 과감한 제도 개혁의 의지다. 인식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오히려 과감한 제도가 인식을 견인한다. 성평등가족부는 노르웨이처럼 일정 기간 남성 육아휴직을 의무화하는 '아빠 육아휴직 할당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공공보육시설 비율을 현재 15%에서 최소 5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과감한 투자도 필요하다. 이번에 추진하겠다는 '고용평등임금공시제' 역시 실효성 있게 설계되어야 한다. 기업들의 형식적 대응을 막고 실질적 임금 격차 해소로 이어지도록 강력한 인센티브와 페널티를 결합해야 한다.
명칭이 아니라 실천이 답이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극심한 성별 갈등은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수명을 다한 '과거의 사회 모델'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미래의 생존' 사이의 격렬한 충돌이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여성은 일터에 진출했지만 여전히 돌봄의 짐을 지고, 남성은 생계부양자 역할을 강요받지만 더 이상 그에 따른 권위도 없다. 이 낡은 시스템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보인다.
성평등가족부 출범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출발이다. 하지만 명칭 변경이 곧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 계약'을 맺어야 한다. 첫째, 돌봄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닌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적 권리'이다. 둘째, 남성과 여성 모두 '생계부양자'이자 '돌봄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
성평등가족부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의 정책 집행 과정에서 판가름 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소모적인 갈등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사회적 결단이다. 우리 딸과 아들이 성별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회, 일과 가정이 조화를 이루는 행복한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성평등가족부가 선봉에 서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변화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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