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개인', '권리', '자유' 등은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다. 우리가 쓰던 말이 아니며, 일본을 거쳐 새로 들어온 말이다. 그 뜻을 알려면 영어나 독일어 등을 봐야 한다. '공공'도 그러하다. '공공(公共)'은 'public'을 번역한 말인데, public은 다시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로마제국은 전쟁에서 빼앗은 땅은 모두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의 땅으로 간주하고 'publicus'라고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공공'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공공이 사적 이익이 아니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을 공공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共(함께, 모두)'이라는 것이다. '公'은 '私'와 대립하는 것이고 '모두의 땅'을 의미하므로, 공공은 공통의 사적 이익, 사적 이익의 교집합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 이익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다. 즉, 공공성은 모두에게 관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공통의 사적 이익이 공공성인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 제1항에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조항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학문의 자유는 진리 탐구의 자유, 발표의 자유, 교육의 자유를 포함하는데, 이러한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헌법 제31조 제4항에서 “교육의 자율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라고 규정한다. 헌법으로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 즉 진리 탐구와 교육의 자유를 위해서다. 대학의 공공성은 이러한 학문의 자유에서 나온다. 대학이 추구하는 지식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그 수혜자이며, 따라서 대학의 지식은 사적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대학은 지식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연구 성과를 창출하기 시작하였고, 기업이 요구하는 인력을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대학은 취업을 우선시하는 교육 기관이 되었고, 이는 다시 대학의 서열화와 직결되었다.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원하는 것은 높은 서열의 대학 졸업장이 되었다. 지식은 사유화되었다. 그런데 헌법으로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 지식의 공공성 때문이지 개인의 입신양명과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학은 왜곡되었다.
한국의 부모는 자녀의 인적 자본을 키워줌으로써 부와 지위를 물려주고자 한다. 학벌사회의 엘리트 계급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높은 사교육비를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의 무상화가 선결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대학 무상교육이 곧바로 공적 책임의 강화로 연결될까? 대졸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받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한다. 이것은 분명 사회적 책임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이를 위해서라면 굳이 대학 무상화가 필요할까? 대학 교육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을 다닌 사람은 더 높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 무상화의 목적은 이들이 더 높은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
대학 무상화를 위해서는 나라에 돈이 있어야 한다. 그 돈을 왜 써야 하느냐? 개인의, 능력 있는 개인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누가 동의할까? 등록금 부담을 덜어주자는 주장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대학이 추구하는 지식의 공공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요즘 학생들이 입결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한다고 한탄하지만, '요즘 학생들'만 그러한가? 지식은 사유화되었고, 학벌주의도 여기서 나온다. 대학의 공공성은 지식의 사유화와 대비되는 것이며, 지식의 공적인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다룬 <미지의 서울>이란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대학원보다는 회사가 편하던데요. 정시에 퇴근도 하고, 교수님도 없고.” 언제부턴가 대학교수는 지식인이 아니라 직장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느덧 최악의 직장인, 갑질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대학의 강사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된다. 동료 강사가 대학에서 쫓겨나더라도 자신의 수입을 위해 6시간 최대 시수제 폐지를 찬성한다. 교원들 간의 차별로 붕괴된 학술 공동체를 복원해야 한다.
대학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의 교원을 확보해야 하는데, '교원확보율'은 학생 수로 결정된다. 대학의 학과를, 그러니까 한 나라의 학문을 담당할 학자와 연구자를 결정하는 기준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학과에 들어오는 학생의 숫자이다. 학생들이 들어오지 않는 학과는 더 이상 교원을 임용하지 않는다. 취업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학생 수로 교원의 수를 결정함으로써 학술생태계는 파괴되었다. 학문의 필요에 따라, 사회의 요구에 따라 학자와 연구자가 있어야 하고, 정부와 대학은 그러한 필요와 요구에 따라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할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우선 시급한 일이 대학의 강사들에게 기본급을 지급하는 일이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학술생태계가 그나마 겨우 유지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체 대학의 80%가 사립대학인데, '대학의 자율성' 운운하면서 대학에 맡겨버린 결과가 학술생태계 붕괴였다. 강사들은 경쟁에 내몰렸고, 각자도생하였고, 대학 사회는 파편화되었다. 국가에서 책임지고 강사의 고용과 임금을 보장하여 대학원을 살려야 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지역거점국립대를 서울대 수준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키우자는 방안이다. 연구 중심 대학이 된다는 것은 대학원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원한 대학원생이 아니다. 그들은 강사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2024년 국내 신규 박사 학위 취득자 중 인문학과 문화예술 분야의 무직자는 40.1%이고, 취업한 25.5%는 2천만 원 미만, 71.7%는 4천만 원 미만을 번다. 사정이 이러한데, 연구 중심 대학을 만들고자 한들 누가 대학원을 가려고 할까? 강사들을 위한 정책이 없으면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대학 서열 완화는커녕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학술 연구는 기존의 연구와 지식에 기반한다. 학술논문의 연구와 집필, 투고, 심사, 출판, 이 모든 과정은 학술계 공동의 작업이다. 학술논문은 연구자 개인의 사적 행위가 아니다. 강사도 학술논문을 발표하며, 그럼으로써 학술 공동체에 기여한다. 그런데 사비를 들여서 그렇게 한다. 그리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 강사는 대부분 자기 돈을 들여서 연구하고, 심사료와 투고료를 내고 논문을 발표한다. 대학의 공공성은 지식의 사유화와 대립하는 것이다. 학술 연구의 공공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BK, HK, 학술연구교수 등 경쟁을 부추기는 사업비 위주의 학술 연구 지원을 버려야 한다.
경쟁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학술연구지원사업은 경쟁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양한 학문 분야와 전공 연구자들에 대한 연구지원사업이 필요하다. 대학의 전임교원 임용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으므로 강사를 통한 다양한 학문 분야, 세부 전공의 학술 연구가 필요하다. 학술 세계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은 얕은 학문적 성과물을 양산할 위험에 노출된다. 중요한 것은 저변 확대이다. 그 이후의 경쟁이어야 비로소 경쟁은 효력을 발휘한다. 모든 강사에게 학술연구비를 지급하자. 이를 사립대에 맡기면 사립대는 학술연구비를 지급하는 대신 강사를 해고할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80%가 사립대다. 나라의 학문이 망한다. 대학의 모든 강사의 학술연구비를 포함하여 강사의 임금을 국가에서 지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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