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 살아오시면서 행복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100년 동안 어렵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행복했습니다."
- 스스로 행복했다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제가 철학을 전공했고 무엇보다 학생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동료와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셋째로 제가 독실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에 의해 설립 운영되고 있는 연세대학교와 잘 맞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 이유로 행복하게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 그중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내심 30대 중반부터 40대 후반이라고 기대했다)
"살아온 100년 중 98세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참석자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해 두 권의 철학책을 썼습니다. 큰 상을 받았고 상금으로 철학연구기금을 만들었습니다. 일주일 평균 이틀은 강연을 다녔고 이틀은 마을버스를 타고 수영장에 가서 운동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2019년 2월 푸르메재단의 고액후원자 모임 '더미라클스' 조찬회 강연자로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모셨다. '100세 철학자가 터득한 삶의 지혜'라는 제목의 강연이었다. 1980년대 초 서양철학사를 강의했던 노 교수님은 마흔 번 넘는 성상(星霜)이 바뀌는 동안 눈이 더 작아지고 얼굴에 검버섯만 피었을 뿐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은 변한 것이 없었다. 교수님은 마치 40년 전 젊을 때로 돌아간 듯 열강을 했다. 다음 날 조간에 강연 기사가 크게 실렸다.
이날 오후 사무실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은행 직원이었다. 고객 한 분이 재단으로 기부하길 원하시는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뒤 통장을 확인해 보니 1억 원이 입금돼 있었다. 고객정보를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은행 직원을 설득해 기부해 주신 분의 성함과 연락처를 받았다.
재단 직원이 전화드리자 그분은 "김형석 교수님이 인생을 잘 살려면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남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신문 기사를 읽었어요. 제가 느낀 바가 커 기금을 보냈습니다. 푸르메재단이 장애어린이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믿고 맡기니 좋은 곳에 쓰세요. 만날 필요도 없고 연락도 하지 마세요" 뚜 뚜 뚜…. 전화가 갑자기 끊어졌다.
이튿날 내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미루어 60대 후반의 남성 같았다. "이렇게 큰 기금을 주셨으니 꼭 찾아뵈어야겠습니다. 기부금 영수증도 드리는 것이 도리입니다." 여러 번 간청했지만 완강했다. "만날 필요도 없고 영수증도 필요 없어요." 뚜 뚜 뚜…. 또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끈질긴 통화 끝에 주소를 받아 방문하게 됐다. 청담동 언덕 위에 있는 2층 양옥집이었다. 주인의 성격을 말해 주듯 마당 한가운데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주위 잔디가 단정하게 깎여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바지와 러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통화했던 권오록 님이었다. 목소리만큼 행동도 활달했다. 안내를 받아 2층 거실로 올라가니 탁자 위에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적십자사,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에서 보내온 감사패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큰 기금을 쾌척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권오록 님은 손사래를 치셨다. "바쁜데 왜 만나자고 했어요. 가치 있게 돈을 쓰라고 해서 기부했는데 그게 뭐 자랑거리인가요." 대화를 나눠보니 할아버지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연세가 많았다. 여든다섯. 권오록 할아버지는 지금은 북한 땅인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갈현리에서 1934년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지였던 부친은 춘궁기가 되면 이웃들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소작료를 면제해 주는 넉넉한 분이었다. 부친은 또 교실 두 개가 딸린 강습소를 세워 마을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앨범을 꺼내 아버지의 사진을 보여줬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말 위에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6.25가 발발하자 할아버지는 평택으로 피란 왔다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정말 어려웠어요. 아버지를 모시고 정신없이 며칠 걷다 보니 수중에 남은 것이라고는 만년필 한 자루와 은반지 하나뿐이었습니다. 피란지에서 땔감을 모아 팔면서 어려운 시기를 견뎠어요. 전쟁이 끝나자 의정부에 터전을 잡게 됐습니다."
다행히 매형의 도움으로 대동상고(현 대동세무고)와 건국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1962년 서울시청 주사보로 들어가 34년 동안 공무원으로 일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서울시청 인사과 시절, 이원종 씨와 일할 때였어요. 밤늦도록 정말 열심히 일했지요. 이원종 씨는 나중에 행정고시를 봐서 서울시장이 됐습니다. 서민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좋은 시장이 될 거라고 기대했어요.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권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시인 이은상 씨와 한국산악회를 조직해 주말이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녔다. 여든을 넘긴 연세지만 등산으로 다져진 몸매가 다부졌다. 1996년 은평구청장으로 34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70~80년대 서울시 공무원 중 명예롭게 퇴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는 청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일하다 보면 어려운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퇴직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나 그때부터 나누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날카롭게 느껴졌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누구보다 자상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 평안도 출신 부모님께 들었던 고생 끝에 남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던 이야기와 6.25 전쟁 때 겪었던 고통을 말씀드리자 "그래, 맞아요!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젊은 사람이 대단하네!" 하고 내 어깨도 치시고 헤어질 무렵이 되자 볼을 비빌 만큼 친근함을 표현하셨다.

내게 마음을 연 권오록 할아버지는 한 달 후 재단을 방문하셨다. 사무실로 들어오는 발걸음부터 쾌활했고 검은색 선글라스와 초록색 재킷으로 한껏 멋을 내셨으니 누가 80대라고 상상하겠는가. 하지만 할아버지 손에는 오랫동안 사용한 낡은 2G 폴더폰이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기부하시는 데 자식들의 반대는 없었을까. "원하는 만큼 대학원까지 공부시켜 줬어요. 그만하면 됐지. 70년대 초 강남땅이 개발됐지만 당시엔 교통이 나쁘고 시내에서 멀어서 땅을 사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청 직원에게도 강남땅을 사라고 독려했습니다. 다들 외면했지만 저는 집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은행 대출을 받아 지금 사는 택지를 불하받았고 인근 땅도 100평 샀습니다. 버스도 안 다니던 시절이라 이른 새벽 청담동 집에서 신사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곳에서 시청으로 가는 통근버스가 있었어요. 그러다 강남 땅값이 오르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지요." 할아버지는 사회단체와 학교에 25억 원을 기부하셨다.
아깝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당신 돈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땀 흘려 부자가 됐다면 기부하지 않았을지 몰라요. 하지만 땅값이 저절로 올라 생긴 것이니 내 돈이 아니지.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요. 하하하!"
권오록 할아버지는 감사패도, 기부금 영수증도 다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택시를 잡아드리겠다고 따라나서자 "아직 정신이 멀쩡한데 왜 택시를 타요?"하고 야단치셨다. 댁으로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탄다는 말씀을 듣고 중간까지만 바래다 드리겠다고 우겨서 함께 지하철에 올랐다.
할아버지 옆에 큰 함지박을 든 할머니가 앉았다. 할아버지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물었다. 종묘 앞에서 떡을 파신다는 할머니는 나이 들수록 사는 게 어렵다고 한탄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늙으면 아프지 말아야 해요. 고생스럽지만 이렇게 다니시니 얼마나 좋아요" 하더니, 갑자기 낡은 지갑에서 2만 원을 꺼내 할머니 손에 쥐어 주셨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남은 떡을 모두 사고 싶은데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할아버지는 마음이 부자였고 친절이 종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분이었다.
권오록 할아버지는 주위에서 감동적인 사연을 접하면 먼저 적은 금액을 기부한 뒤 투명하게 집행되는지 지켜본다고 한다. 그 단체가 믿을 만하다고 확신하면 큰 기부를 하신단다. 2020년 봄 신천지 사태로 대구·경북지방에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하자, 할아버지는 고통받는 경북도민을 위해 공동모금회에 5억 원을 기탁하셨다. 정부는 국민추천제도를 통해 평생 큰 나눔을 실천하신 할아버지에게 2021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했다.
권오록 할아버지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일하는 여주농장 '푸르메소셜팜'에 3억 원, 푸르메재단 에 2억 원 등 총 5억 원을 기부하셨다. 여주농장에서는 '권오록기금'으로 청년들이 근무를 마친 뒤 들을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곳에선 청년들이 통장과 카드를 어떻게 개설하고 월급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배우는 금융교육을 비롯해 청년들이 좋아하는 요리와 보석십자수공예, 미술, 요가, 탁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할아버지 덕분에 푸르메소셜팜은 직장이면서 동시에 청년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교가 됐다. 농장 건립 초기 채용된 직원들은 농산물 실습 등 모든 직업훈련비를 '권오록기금'에서 지원받았다. 청년들이 입사해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도 권오록 할아버지의 기부로 가능한 일이었다. 부자가 거액을 기부해 화제가 된 적은 있지만, 평생 성실하게 일해 모은 재산을 내 것이 아니라고 모두 기부한 분은 많지 않을 것이다.

권오록 할아버지는 재단에 오실 때마다 직원들에게 꼭 밥을 사셨다. 극구 사양해도 "좋은 일 하고 있는데 내가 해줄 것은 따끈한 밥 한 끼 대접하는 것밖에 없어요. 내겐 큰 기쁨이에요" 하고 말씀하셨다. 봄이 되면 꽃이 피었다고, 감기를 앓았는데 회복됐다고, 농장을 짓느라고 얼마나 수고하느냐고, 이유는 다르지만 꼭 이유를 붙여서 맛있는 점심을 사주셨다. 권오록 할아버지가 사주시는 것은 밥이 아니라 직원들에게는 사명감과 자부심이다. 정작 소식(小食)하시는 당신은 직원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 흐뭇하게 바라만 보셨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남에게 베풀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이웃을 돕는 삶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내가 기부하는 것도 아버지를 본받으려는 노력입니다. 다음에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우리 오록이가 아주 착하게 잘 살았구나' 칭찬해 주실 거라 믿어요."
2023년 미수(米壽·88세)를 맞으신 권오록 할아버지의 미소가 해맑다.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던 김장하 선생처럼 권오록 할아버지도 진정한 큰 어른이셨다.
가진 것을 아낌없이 주위에 베푸셨던 할아버지는 2025년 1월 폐렴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장례식장을 찾았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남미 잉카 문명지 마추픽추를 방문했을 때 모습으로 영정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셨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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