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커먼즈, 연구자의 커머닝, 연구자공제회

[민교협의 새로운 시선]

특권적 지식인이란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서 시작하기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제회는 1920년에 4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이다. 가혹한 식민통치 하에서 만들어진 노동단체로, 전국에서 6만 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많은 문헌들이 이 최초의 노동공제회에 많은 "급진적 지식인"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로부터 104년이 흐른 지금 '연구자공제회'가 설립되었다. 전편에 설명했듯이 "재생산의 위기에 처한 연구자들이 이 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ㅈ. (관련기사 ☞ '연구자 공제회'의 결성과 '연구자의 집'의 과제)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인민과 노동자를 지지하고 연대하던 '지식인'이라는 표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온갖 이름으로 쪼개진 연구자들이 삶의 재생산조차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학문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거나, 제도 안에서 더 많이 학습할 기회를 얻은 자들의 지위가 낮아졌다는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보통사람들, 인민, 노동자와 분리된 채로 그들을 대변하여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지식인'이란 위상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이 점했던 특권과 오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식민지와 독재정권으로 이어지는 혹독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이들은 (적어도 일부는 스스로의 특권을 자각한 위에서) 일종의 역사적 사명을 자임했으며, 소외된 계층에 연대하고 사회의 나아갈 길(!)을 고민했고, 그럼으로써 그에 따른 사회적 지위와 존경을 얻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이들을 다양한 관점을 역동적으로 종합하여 최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인'으로 여기건, 어떤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유기적 지식인'으로 규정하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지식인은 사회 발전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그를 위해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부여받은 역사적 구성물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식자층이 권력을 뒷받침할 지식을 생산하고, 권력에 밀착되어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아무튼 이 역사적이고 특권적인 지식인의 표상은 냉전질서의 종식과 거대담론의 붕괴, 세계적인 보수화의 물결, 그리고 대학의 신자유주의화 혹은 기업화 과정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지식인이라는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사법시험 합격이나 유학 등 스펙을 갖추고 체제의 최상층으로 진입한 소수의 지식엘리트, 그리고 각종 다채로운 이름과, 그 이름만큼 다층적인 분할선 속에서 생계를 지속하기 위해 논문을 쓰고 지원서를 내는 다수의 불안정 연구자들이다.

불안정한 연구자들의 각자도생

연구는 그 노동의 목표와 과정, 생산물이 (고용인에 의해) 결코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노동이다. 연구를 통해 비판적 지식/담론 생산이 가능하다면 이는 연구라는 노동이 끝내 놓지 않는 자율성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는 노동이란 것이 언제나 다른 누군가와 연루됨으로써만 가능한 집담의 과정, 즉 협업이라는 사실을 (무수한 레퍼런스 및 인간/비인간 연구 참여자들을 통해) 그 생산물에 각인하고 있다. 사실, 지식인이라는 허명이 사라지며 대학과 학문의 위기가 회자되기 시작한 시기는 인터넷의 발달로 집단지성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지식의 권력이 엘리트로부터 대중에게 분산될 가능성이 더 커진 시기, '집단지성', '대중지성'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집단적 협업을 통한 지식생산의 가능성보다 시장의 논리가 더 빨리 사람들을 사로잡았다는 점이다. 이와 함께 연구 노동 또한 급진적으로 시장에 포획되기 시작했다.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내가 재미는 없지만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던 철통 직장과 이별할 결심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함께 하는 공부의 재미였다. 좋은 질문을 만들고, 그것을 함께 추궁하고, 읽고, 쓰고, 토론하고, 질문을 갱신하는 사람들과의 조우는, 세상을 보는 방식을 새롭게 제작할 때 내가 바뀌고, 그러므로 세상도 바뀔 수 있다는 놀라움을 선사해주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잠깐 들를 뿐인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자신의 질문을 파고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연구자'들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러나,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정말로 연구를 업으로 하게 된 내가 마주친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한 삶이었다. 자리를 잡지 못한 연구자들이 놓인 열악한 물질적 조건은 단지 낮은 임금과 생계의 위험만이 아니라, 연구의 질과 내용으로 곧장 환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정적인 연구실, 지속적인 교육과정, 논문 엑세스, 논문게재와 학회 참여 등 연구를 위한 필수적 인프라와 물질적 지원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연구자로서 살아남으려면 어디에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장 어딘가 지원서를 들이밀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하다. 일단은 "퀄리티에 집착하지 말고" 논문을 많이 내면서 "존버"하라는 주위의 조언 속에서 홀로 논문과 원서를 쓰고 익명의 누군가에 의해 평가받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혹은 그조차 잘 못하는) 과정은 외롭고 피폐했다. 모든 성과가 논문 편수로 환원되는 현실 속에서 좋은 질문을 만들고, 장기적인 연구과제, 긴 호흡의 현장연구에 천착하는 것은 정말이지 불가능하다. 한국사회에서 연구는 워라밸 최악의 장시간 노동, 게다가 그 노동 시간의 대부분은 임금으로 환산조차 되지 않는 불안정 노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술장에 만연한 이 거대한 불안정성 속에서 연구라는 자율적이고 협동적인 노동 과정에 매혹되었던 사람들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지금은 실적 쌓기와 경쟁을 해야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럼으로써 불안정성의 회로를 강화하는 기이한 전도에 말려든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연구와 지식생산의 (근원적으로) 공통적인 속성이 해체되고, 그 안에 얽혀 있던 연구자들이 낱낱의 개인으로 파편화되는 과정이라고 보아도 좋다. 좋은 앎, 깊이 있는 연구,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지식 생산, 연구자들 간의,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과의 협업과 연대의 가능성은 급격히 사라진다. 불안정성이 통치하는 학술장,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학술-시장에서 연구자들은 연구의 자율성을 지우며 각자도생을 내면화하는 개인이 된다.

커먼즈로서의 학술장을 재조립하기

어떻게 공통적인 것으로서 학술장을 재조립할 수 있을까? 훨씬 오래, 더 위태로운 곳에서 불안정성과 싸워 온 존재들이 공제회를 구성해왔다는 사실은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공제(共濟)의 '제(濟)'는 본래 '물을 건너다'라는 의미이다. 이후, 돕다, 구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17세기 유럽에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던 노동자들이 질병이나 죽음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를 돕기 위해 만든 것이 공제회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계와 같은 전통적 공제의 형식들은 훨씬 오래전부터 전 세계 어디에나 존재했다. 어려운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돌보고, 위험을 함께 건너기 위한 안전망, 다양한 상호부조를 실천해왔다.

중요한 것은 공제회를 통한 서로 엮음의 과정이 소박한 경제적 실천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도생을 내면화하는 개인들을 생산하고, 그들을 각자도생하기 위해 경쟁하는 주체로 구성하는 것이 삶 전체로 확장되는 경제적 불안정성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소위 '경제'가 얼마나 삶정치적인 것인지 다시 볼 것을 요청한다. 폴라니가 지적하듯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사회와 경제는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삶의 다른 영역들과 분리된, 이윤을 생산하는 영역으로서의 '경제'란 관념 자체가 특수한 역사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어떻게 자원을 생산하고 교환하는가의 문제는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적인 관계 및 정체성,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품관계로 환원되는 자본주의적 경제가 세계를 각자도생의 시장으로, 사람들을 경쟁하는 개인으로 생산한다면, 지금 여기서 다른 경제의 과정을 구축하고 그것의 일부가 되기로 하는 것은 지극히 삶정치적인 대항 실천, 다른 주체화의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조선노동공제회는 단지 제도적 지원의 수혜자가 아닌, 서로에게 기꺼이 연루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생생히 보여주었다. 신문배달부, 인력거부, 지게꾼, 소작농민들까지 참여한 이 조직은 야학과 소비조합활동을 벌였고, 조선노동공제회가 함께 한 양복 직공, 운수노동자, 부두노동자의 동맹파업, 소작인들은 수많은 투쟁을 일으켰다. 즉, 서로를 엮음으로써 작은 공동체를 넘는 열린 안전망을 구축하고자 한 공제회의 활동 속에서 구성된 공동체와 공동의 경험은 부정의한 세계에 함께 저항할 힘이 되었다.

연구자 공제회가 시작된다. 연구자들의 노동을 존엄하고 자율적인 활동으로 되돌리기 위해 이제 막 만들어지는 이 흐름에 더 많은 연구자들이 함께하길 염원한다. 내가 얼마를 냈으니 어떤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 없이, 능력에 따라 필요에 의해 지금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채로) 서로를 돌보는 것, 돌보기로 하는 결심은 무너지고 있는 학술생태계를 재조립하고 우리의 연구를 언제나 공통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지식생산으로 되돌리며, 서로를 함께 지식을 생산하는 동료이자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만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연구자의 집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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