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영재학교가 '운동기계 양성소' 눈총을 피하려면…

[이종성의 스포츠 읽기] 프랑스는 왜 25조 스포츠 예산을 투자할까?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나리카와 아야가 쓴 <지극히 사적인 일본>을 읽으면서 여러 페이지에 밑줄을 치고 메모를 했다. 그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의 체력을 비교한 내용이었다.

"한국 친구와 놀러가면 조금 걷다가 금방 피곤하니 카페에서 쉬자고 하고 택시를 타려고 한다. 일본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부 활동(부카츠, 部活)을 통해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이 있다."

중학교 시절 육상부 활동을 했던 나리카와는 스무 살이었던 지난 2002년에 한국 동네 체육관에서 태권도를 배웠다. 초중고 남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이 체육관에서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 그녀가 늘 1등이었다고 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부카츠를 통해 다져진 일본 스포츠의 저력이 피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학교 체육에 진심인 프랑스

학교 체육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 학생들은 매주 초등학교 4시간, 중학교 3시간, 고등학교 2시간씩 체육 수업을 받는다.

고3 때에는 계열에 따라 수학이나 과학 같은 과목의 수업을 안 듣는 경우가 있지만 체육 수업에는 모든 계열의 학생들이 참여 한다. 체육 내신이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 총점의 5%정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고3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세 가지 운동 종목을 택해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평가도 받는다. 일반적으로 체육을 잘 하는 학생이 체육 내신 성적이 좋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운동 능력이 다소 부족하다고 해도 자신의 목표를 세워 꾸준히 향상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최종 점수가 좋아질 수 있다.

프랑스의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콜 입학을 위한 준비 과정인 프레파에서도 학생들이 어려운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체력이 있는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체육 과목의 점수가 중요하다.

프랑스 학교 체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 학생들의 진짜 체육 수업은 수요일에 펼쳐진다. 학교 스포츠 센터나 지역에 있는 스포츠 입문 센터에서 학생들은 체육 수업을 받는다. 당연히 수요일에는 적지 않은 프랑스 학교에서 일반 교과 수업이 없다. 그래서 프랑스의 수요일은 스포츠 활동을 위한 '가방 없는 날'로 불린다.

1880년부터 체육 수업을 의무화 했던 프랑스 학교 체육의 원류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 남작에서 시작됐다. 그는 보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한 결정적 원인을 공부에만 열중하는 프랑스 엘리트 학생들의 약한 체력에 있다고 봤다. 그는 영국의 퍼블릭 스쿨(기숙형 사립학교)과 미국 대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던 체육 수업과 스포츠 활동을 프랑스 학교에 이식시키고자 했다.

초기엔 쿠베르탱 남작의 주장에 대해 일선 교육자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프랑스가 다시 세계를 호령하는 일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체육 수업이 절실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런 측면에서 프랑스 체육 수업은 보불 전쟁 패배의 산물(産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국가 중 스포츠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프랑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 부문에 가장 많은 예산을 쓰는 국가다. 2023년에 프랑스 정부는 스포츠와 레크리에이션 예산으로 25조 5557억 원을 책정했다. 이는 유럽의 대표적 스포츠 강국인 독일에 비해서도 약 30%나 많은 액수다.

프랑스 정부가 이처럼 스포츠 예산을 많이 쓰게 된 이유는 1960년대 초반 자국의 올림픽 성적이 부진했기 때문이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프랑스는 단 1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4년 뒤 펼쳐진 도쿄 올림픽에서 프랑스는 대회 마지막 날 가까스로 금메달 1개를 획득했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자주 국방 노선을 택했던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프랑스의 대외적 위상 강화를 위해 스포츠에 공공자금을 대거 투입했다.

당장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프랑스 스포츠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그래서 피레네 산맥이 있는 생 로메이우(Saint Romeu)에 엘리트 선수들을 위한 트레이닝 센터를 건립했다. 멕시코의 고원 지대에서 경기를 펼쳐야 하는 프랑스 선수들의 적응을 돕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의 지원 덕분에 프랑스는 멕시코 올림픽에서 금메달 7개로 메달 순위 6위에 오르게 됐다.

프랑스의 엘리트 스포츠 진흥 정책은 축구에서도 나타났다. 프랑스는 1972년 프랑스의 온천 도시이자 스포츠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던 비시(Vichy)에 국립축구센터를 설립했다. 프랑스 축구는 이 국립축구센터를 통해 성장한 선수들이 주축이 돼 1984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88년 프랑스 국립축구센터는 클레르퐁텐으로 이전했고 이번에는 새로운 세대가 1998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프랑스 INSEP은 한국 국립체육영재학교의 롤 모델

프랑스는 지난 1975년 국립 엘리트 스포츠 선수 육성 기관인 INSEP도 창설했다. 주로 개인종목 선수들이 많은 INSEP에서는 전체 프랑스 올림픽 메달 리스트가운데 상당수의 선수가 배출된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는 42명의 프랑스 메달리스트 가운데 무려 50%에 해당하는 21명의 선수가 INSEP 소속이었다.

이는 프랑스 체육부 산하의 기숙형 아카데미인 INSEP이 학생 선수들에게 최고 수준의 훈련 프로그램은 물론 다양한 방식의 수업도 제공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INCEP의 수업은 학생 선수들의 훈련과 대회 참가 일정을 고려해 유연하게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운동 기계'가 되지 않았다. INSEP 학생 선수들은 프랑스 평균보다 높은 대학 입학 자격시험 합격률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학업과 대회 성적에서 모두 뛰어난 학생 선수들 중 일부는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을 포함해 무수히 많은 프랑스 고위 엘리트 인사를 배출했던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프랑스의 유도 영웅 테디 리네르도 INSEP을 거쳐 시앙스포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어쩌면 프랑스 INCEP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국립체육영재학교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문체부가 직접 관리하게 될 국립체육영재학교는 종목별로 다른 학생 선수들의 훈련과 대회 참가 일정에 맞춘 유연한 수업 운영을 할 예정이다. 이 제도가 잘 정착된다면 신유빈처럼 탁구에 전념하기 위해 고교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는 줄어들 수 있다.

관건은 이곳에 입학할 학생 선수들을 위한 수업 프로그램이다. 탄력적인 수업 운영을 하려면 무엇보다 수준급의 온라인 수업이 필수이며 지역 교육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INCEP처럼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춘 수업과 다면적인 학업 능력 평가가 이뤄져야 국립체육영재학교가 '운동기계 양성소'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여기에 학생 선수들을 위한 커리어 지원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체육영재학교는 단순히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양산하는 공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곳에서 공부하고 훈련한 학생 선수는 꼭 국가대표 선수가 아니더라도 존경받는 스포츠 지도자와 행정가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 프랑스 INSEP(국립 스포츠·전문·성과 연구소) 모습 ⓒINSEP

프랑스가 농구, 배구, 핸드볼 강국이 된 비결

프랑스는 1960년대 이후 국가가 나서서 엘리트 스포츠 진흥 정책을 폈던 대표적인 국가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스포츠 투자는 주로 참여 스포츠 확산과 발전에 사용됐다. 결국 참여 스포츠의 발전만이 엘리트 스포츠의 성공을 만들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 때문이었다. 좋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서는 비옥한 토양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물론 프랑스가 무조건 엘리트 스포츠의 성공을 위해서 참여 스포츠에 막대한 공공자금을 투자한 것은 아니다. 국민들이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최고의 복지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지속적인 투자 속에서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올림픽 메달 유망 종목이 속속 출현했다.

프랑스가 농구, 배구, 핸드볼 강국이 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학교 체육과 클럽 스포츠를 통해 인기를 끌던 이 세 종목의 등록 선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났다. 2024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농구, 배구, 핸드볼 등록 선수 숫자는 각각 71만 명, 18만 3000명, 60만 명이나 된다.

프랑스는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코로나로 인해 2021년 개최)에서 남녀 핸드볼 금메달, 남자 배구 금메달, 남자 농구 은메달을 기록했다. 자국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에서도 프랑스는 남자 배구 금메달, 남녀 농구 은메달, 여자 핸드볼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처음부터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정책적 일관성을 갖고 꾸준하게 이뤄진 프랑스 정부의 참여 스포츠에 대한 투자가 키워 낸 달콤한 열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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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프레시안> 스포츠 전문기자 시절, 스포츠와 사회·문화·역사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구조에 주목했던 언론인 출신 학자다. 이후 축구의 본고장 영국으로 건너가 드몽포트대학교에서 '남북한 축구사'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야구의 나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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