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세가 불안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남모르게 내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미래의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나눔은 힘이 셉니다. 작은 결심, 조그만 행동이지만 태풍이 되어 사회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푸르메재단이 한국 최초로 어린이 전문 재활병원을 세운 것도, 단단한 의지로 나눔을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서 가능했습니다. '장애인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합니다.' 나눔을 실천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대표가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재단 설립 초기, 어느 날부터 푸르메재단 통장으로 매달 50만 원의 후원금이 입금됐다. 보통 직장인이 후원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송금자는 이철재 씨였다. 은행 직원을 설득해 그가 '쿼드디멘션스'라는 소프트웨어 회사의 대표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러 차례 통화 끝에 회사가 입주한 여의도 63빌딩을 찾아갔다. 티셔츠 차림의 30대 청년이 나타났다. 휠체어를 탄 이철재 대표였다. 서글서글한 눈매처럼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스스로 키다리 아저씨라고 소개했다.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키가 185센티미터(cm)를 훌쩍 넘을 것 같았다. 그가 2000년 설립한 쿼드디멘션스는 임직원이 여든 명인 작지 않은 벤처기업이었다. 처음 만난 자리였지만 우리는 쉽게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눴다. 이철재 대표로부터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가졌던 꿈과 교통사고로 인해 겪었던 고통과 격동의 순간들, 그리고 오늘에 이르게 된 과정을 들으면서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박수치고 기뻐하면서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약 제가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더라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지방의 재활원에 누워 인생을 한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의 1월 27일,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부모는 아들이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원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초콜릿 사업이 성공하면서 두 살 아래 동생과 함께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아버지 친구 집에 머물며 미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날도 수업을 마친 뒤 동생과 함께 승용차에 올랐다. 등하교를 도와주는 지인의 승용차였다. 무심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갑자기 승용차 한 대가 끼어들면서 그가 탄 자동차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전복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병원응급실이었다. "몸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했어요. 전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다리를 심하게 다쳤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병원에서 몇 개월 치료받으면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집과 학교로 돌아갈 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현실은 가혹했다. 사고 순간 목뼈를 크게 다쳤다. 가슴 아래 감각이 없었다. 아무리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도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주치의가 찾아와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혼자 설 수도, 걸을 수도, 양손을 사용할 수도 없을 거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없었지만, 의사는 앞으로 소년이 부딪히게 될 현실을 냉정하게 설명하고 사라졌다. 열여덟 소년의 꿈은 그렇게 시들어가는 듯했다.
그가 응급수술을 받고 옮겨진 곳은 LA 중심에 있는 랜초 로스 아미고 국립재활병원(Rancho Los Amigos National Rehabilitation Center)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활병원이다, 그곳에서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의사의 말대로 그는 걸을 수도 홀로 설 수도 없었다.
오랜 입원 생활이 끝나고 통원 치료가 이어졌다.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 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그사이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됐다. 자신만 덩그렇게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 것 같았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목표로 삼았던 스탠퍼드대에 입학서류를 보냈다. 그는 SAT 점수와 함께 교통사고로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지 못한 이유를 에세이로 썼다. 그럼에도 결과는 참혹했다. 고교졸업장과 학기이수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입학할 수 없다는 원론적인 답장이 돌아왔다. 다른 대학들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할 것 같았다. 앞으로 집안에 갇힌 채 누워서 남은 생을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한 곳에만 원서를 보낸 뒤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버클리대였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버클리대에서는 고교 졸업이 자격 요건이지만 이철재 학생이 처한 특수한 사정을 감안하겠다며 직접 학교를 방문해 구두 면접을 볼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는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640km를 쉬지 않고 달려갔다. "만약 우리 학교에 입학한다면 무엇을 전공하고 싶습니까?" 면접관이 물었다. "뉴로사이언스(neuroscience, 신경과학)를 전공해 저처럼 신경조직이 파괴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지, 버클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열정적으로 대답했다. 기적처럼 버클리대는 그의 입학을 허락했다.
그가 입학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버클리대에 진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언론자유, 장애인 인권운동의 중심지였던 버클리의 진보적인 학풍이 크게 작용했다. 전신마비의 중증장애라는 이유로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지만 1962년 호흡기를 단 채 이 대학에 입학한 에드워드 로버츠(1939~1995)가 버클리대와 샌프란시스코시를 장애인 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로버츠는 대학 인근 병원의 입원실을 기숙사 삼아 일반 뇌성마비 환자들과 생활했다. 매일 병원에서 자고 학교로 출근해 수업을 들었다. 어느 날 자신이 왜 자신 다른 학생들처럼 기숙사에 사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중환자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때부터 장애인 인권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호흡기를 매단 채 시내버스에 쇠사슬을 묶고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하라고 요구했다. 요즘 한국의 장애인단체 회원들이 쇠사슬 시위를 벌이는 것도 로버츠로부터 비롯됐다. 버클리대는 장애인 권익 운동의 발상지가 됐다.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휠체어 경사로와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장애인 화장실 등이 그의 투쟁 결과이다. 로버츠가 장애인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건립한 독립생활센터(Center for Independent Living, CIL)는 미국 전역으로 확산해 현재는 미국에서만 400개가 운영되고 있다.
로버츠는 버클리대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재활지원국장에 임명돼 장애인 정책을 구체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가 주장한 장애인 차별철폐 정책과 경제지원정책은 1990년 제정된 미국 장애인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 내 가장 진취적인 지방정부인 샌프란시스코시와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버클리대의 정신은 이후 스탠퍼드대와 더불어 구글, 애플, 인텔,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 기업을 낳는 결과로 이어졌다. 버클리대 속에 녹아있는 로버츠의 정신이 중증장애를 가진 이철재를 신입생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포기했을 테지만 청년 이철재는 스스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에 들어섰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처럼 그는 꿈을 가지게 됐다.

버클리대와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그에게 급경사로 된 캠퍼스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최고급 전동휠체어를 지원했고 기숙사와 강의실에 각종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좋은 보조기구를 지원받았지만 갑자기 중증장애인이 된 저에게는 모든 것이 장벽처럼 보였습니다. 누가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결국 많은 시간을 투자해 혼자 해나가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시련은 저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시련의 연속이었다. 남들이 10분이면 할 수 있는 샤워가 그에게는 큰 고역이었다. 혼자 옷을 벗는 일도 힘들지만 샤워를 마친 뒤 옷을 입을 때면 단추가 끼워지지 않아 한두 시간을 훌쩍 넘길 때도 있었다. 아침 일찍 시작되는 실험을 위해 그는 새벽 4시부터 준비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과정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학생 신분으로 세미나를 준비하는 일도 버거운데 만약 교수가 되면 어떻게 강단에 설 것인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마침내 박사과정을 자퇴하고 실리콘 밸리에 있는 작은 컴퓨터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년 일하다 보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후배들과 작은 IT 기업을 창업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계기입니다." 때마침 한국에서도 IT 붐이 불자 그는 아예 귀국해 회사를 세웠다.
"제가 사는 집이 푸르메재단에서 멀지 않은 청운동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 푸르메재단 앞을 지나 출근합니다. 처음에는 '푸르메'라고 씌여진 노란색 간판을 보고 환경단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장애의 조기 발견과 재활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조기 치료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저는 운 좋게 미국 사회로부터 4000만 원이 넘는 전동휠체어와 각종 보장구를 지원받았고,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장애어린이들에게 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철재 대표에게 푸르메재단의 1차 목표는 어린이재활의원과 장애인치과를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이철재 대표는 "한순간 사고로 중도장애를 갖게 되면 처음에는 주어진 상황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처지를 수용하는 네 개의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충분한 준비를 거쳐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합니다. 그런 병원이 한국에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일을 푸르메재단에서 해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푸르메센터 착공식을 가졌습니다. 종로구 소유의 600평 부지 위에 어린이재활의원과 장애인치과, 장애인복지관 등 장애인을 위한 의료복지시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푸르메재단이 건물을 지어 종로구에 기부채납한 뒤 30년 동안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하루는 이철재 대표가 전화했다. "조금 여유가 있어 기금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 출장을 다니면서 눈여겨 보아온 그림이 한 점 있는데 푸르메센터 안에 어린이들이 잘 볼 수 있는 공간을 하나 비워주십시오. 그곳에 그림을 설치하고 싶습니다."

며칠 뒤 재무 담당 직원이 흥분해 달려왔다. 사무실에 있으면 직원들이 가끔 기쁜 소식이나 슬픈 소식을 가지고 달려오곤 한다. 흥분한 목소리로 재단 통장에 10억 원의 거금이 들어왔다고 전했다. 송금한 사람이 바로 이철재 대표였다. 게임회사 넥슨의 고 김정주 대표가 이철재 대표의 쿼드디멘션스를 인수합병하는 조건으로 넥슨의 비상장주식을 이철재 대표가 받게 되었는데 이것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재단에 기부했다고 한다. 비상장주식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기부한다는 것은 수중에 있는 돈을 기부하는 것보다 열 배, 스무 배 어려운 일이다. 이후 그가 뉴욕 갤러리에 주문한 그림이 재활의원 로비에 설치됐다. 미국의 유명작가 피터 오페임의 <비행하는 강아지와 아기 조종사>였다. 문을 연 푸르메센터에는 매일 1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치료받기 위해 찾아온다. 그가 기증한 그림 앞에는 늘 꼬마들로 붐빈다. 그림 옆에는 작은 안내 문구가 붙어 있다.
'어린이를 사랑한 이철재 키다리 아저씨가 기증했습니다.'

이철재 대표는 마포의 어린이재활병원과 여주에 발달장애 청년을 위한 농장을 지을 때도 적잖은 기금을 내놓았다. 푸르메재단은 이철재 대표를 기억하기 위해 푸르메센터 강당 입구에 그의 모습이 담긴 부조를 새기고 '이철재 홀'이라 이름 지었다. 가끔 그에게서 전화가 오곤 한다. "오랜만에 뵙고 싶어서 지금 재단 1층 카페에 와있습니다. 내려와서 커피 한잔하시지요." 키다리 아저씨는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이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는 CBS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뒤 영국에서 가족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푸르메재단을 세웠습니다. 푸르메재단은 시민 1만 명과 넥슨 등 500개 기업과 함께 2016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하고, 2022년 경기도 여주에 푸르메소셜팜을 여는 등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와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한 사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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