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8년 후', 2025년에 등장한 좀비는 뭐가 다를까?

[이동윤의 무비언박싱] <28년 후>

2002년, <28일 후>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때 모두가 관심 가졌던 대목은 텅 빈 런던 브릿지 풍경이었다. 팬데믹을 겪은 이후 우리는 바이러스에 의해 문명이 멈출 수 있음을 몸소 목도 했지만 2002년 당시 문명이 멈출 수 있을거란 상상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2002년 갓 등장한 디지털 카메라로 마치 도그마 형식을 방불케 하는 사실적인 디지털 이미지로 펼쳐진 지옥도는 모든 관객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그 공포는 영화 속 현실이 곧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핍진성 때문에 유발되었다. 시스템이 붕괴했을 때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결국 인간이 될거라는 영화적 예언은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폭력을 지속적으로 겪어온 현대 문명에서 지극히 타당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로부터 5년 뒤 28주후가 흐른 시점을 배경으로 후속편 <28주 후>(2007)가 공개되었고 2010년대로 넘어오며 '워킹데드' 시리즈(2010~2022), <월드워Z>(2013)를 필두로 자칭 좀비 전성시대가 펼쳐진다.

지금까지 공개된 모든 좀비 장르는 일관되게 좀비의 폭력성보다 인간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춰왔다. 조지 A. 로메로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만들었을 당시 영화 속 좀비는 베트남 전을 연상케 하는 집단 학살의 이미지였다. 로메로는 여러 인터뷰에서 의도적으로 정치적 영화를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니라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좀비 장르가 무정부 상태에서의 인간 군상들을 살펴보려 했음을 인정했다. 로메로가 열어젖힌 좀비 장르는 결국 좀비가 아닌 인간이 핵심이었고 이러한 전통을 대니 보일 감독 또한 이어받은 것이다. 그가 만든 <28일 후>에서 가장 폭력적인 존재들은 좀비가 아닌 군인들이었으며 그들의 만행은 역사 속에서 자행되어 왔던 군의 학살을 연상시켰다. 비록 <28주 후>에선 장르적 긴장을 높이기 위해 여러 복잡한 서사 장치들이 삽입되어 전편에 비해 주제가 흐려진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니 보일은 두 작품들을 통해서 법적, 제도적 장치가 붕괴되었을 때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을지 관객들에게 주지시켜 왔다.

▲좀비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스파이크와 그의 아빠 제이미. ⓒ소니픽쳐스코리아

그랬던 그가 첫 작품을 선보인지 22년 만에 세 번째 후속작 <28년 후>(2025)로 돌아왔다. 굳이 22년이 지난 지금에서 다시금 '분노 바이러스'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가 공개되기 전 예고편만으로는 전작들의 주제를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28년이 지났으니 '워킹데드' 시리즈처럼 좀비들의 형태는 이전보다 덜 위협적인 존재로 변했을테고 결국은 살아남은 인간들이 서로를 어떻게 억압하고 폭력을 저지르며 착취할지 더더욱 잔혹한 형태로 보여줄 거라는 예상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정반대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주장을 내뱉고 있다. '당신들이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좀비들 또한 그들의 문화가 있고 공동체가 있으며 생존을 위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좀비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협적 상황에서 모든 좀비 영화 팬들은 좀비의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지는 모습을 통쾌하게 바라봐왔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런 좀비들도 존중해야 한다니? 조금은 당혹스러운 영화적 변용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독의 주장이 충분히 공감된다. 마땅히 죽여도 되는 존재를 손쉽게 죽여오면서 우리가 놓친 가치들은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는 내가 살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존재들의 죽음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것은 아닌가? 우리를 공격하고 해하는 존재들을 간단히 터부시하며 그들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해온 것은 아닌가? 이 질문들이야말로 감독이 22년 만에 다시 '분노 바이러스'를 치켜든 이유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감독의 시선 속에서 이 시대야 말로 그 어느 때보다 분노 바이러스가 만연한 시대인 것은 아닐는지.

▲문 틈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 보는 스파이크와 제이미. ⓒ소니픽쳐스코리아

영화는 서사와 공간을 정확히 이등분으로 구분 짓는다. 먼저 서사는 첫 사냥을 위해 본토를 겪은 후 진실을 깨닫게 되는 스파이크(알피 윌리엄스)의 서사와 의사가 본토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마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다시 본토로 향하는 스파이크의 서사로 구분된다. 전반부가 스파이크의 진실을 깨닫는 각성 단계라면 후반부는 진실 이면에 숨겨진 가치를 발견하는 단계다. 스파이크가 살고 있는 '홀리 아일랜드'는 감염으로부터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공동체다. 이들은 마치 원시부족처럼 성인이 되면 본토에서 좀비를 사냥해야만 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그 전통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신화를 만들어 낸다. 스파이크는 이 신화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사실은 공포에 질려 아빠 제이미(애런 존스)에게 끌려오다시피 생존했지만 제이미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스파이크를 용맹 무쌍한 투사로 탈바꿈 시킨다. 스파이크가 부정한 신화는 전적으로 홀리 아일랜드의 가치 뿐만 아니라 '좀비는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당위성마저도 의심하게 만든다. 영웅이길 포기하고 엄마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다시 본토로 향하는 스파이크를 영화는 진정한 영웅으로 승격시킨다.

영웅이길 거부하는 자를 결국 영웅으로 등극시키는 것이야말로 영화 서사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감독도 이를 이해해서일까? 대니 보일 감독은 마지막 에필로그로 예상하지 못한 존재들과 조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스포일러이기에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꼭 극장에서 확인하시길) 그리고 한 사람에 의해 구원받는 서사가 아닌 다양한 존재들이 뒤엉커 무정부 상태를 '견디는 중'임을 강조한다. 이미 '워킹 데드' 시리즈가 시즌을 열한 번이나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워킹 데드 역시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무정부 상태를 다시 질서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영웅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강박이 '워킹 데드' 시리즈의 종결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도 <28년 후>는 이 길로 퇴보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좀 더 서사를 밀어붙인다. 마지막 순간을 보며 누군가는 후속편을 염두해둔 의도적인 결말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영화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자체로 이미 완결된 결말이다. 좀비 퇴치를 당연시 해왔던 '홀리 아일랜드'의 신화를 거부한다면 여전히 좀비가 활개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좀비를 상대할 수 있을까? SNS와 숏폼 시대를 마주하며 모든 것이 놀이와 밈, 풍자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좀비 장르로 풍자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 아닐까 싶다.

▲캘슨 박사를 만난 스파이크의 엄마, 이슬라(조디 코머). ⓒ소니픽쳐스코리아

마지막으로 꼭 언급해야 하는 존재는 의사 캘슨이다. 홀리 아일랜드 주민들이 그를 터부시하는 동안 캘슨은 모든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멘토 모리'를 몸소 실천한다. 그리고 분노 바이러스에 의해 이성을 잃으면 영혼도 없어진다는 제이미의 주장과 정반대 위치에서 좀비가 된 모든 존재들을 포함해 그들의 죽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캘슨은 주장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감염자든, 비감염자든 결국 이들은 모두 한 때 '인간'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었기에 당연히 어떤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는 캘슨의 입장은 반박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이 대목을 만나는 순간 머리 속에서 그동안 봐왔던 모든 좀비 영화들의 살육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좀비 장르는 공포 장르의 세부 장르로서 고어(신체 훼손을 장르적 쾌감으로 연결시킨 장르)와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확장시켜 왔다. 그렇기에 좀비가 인간을 물어뜯는 장면, 좀비의 신체가 잔혹하게 해체되는 장면들은 모두 영화적 쾌감을 위해 용인되며 좀비 장르 팬들을 열광시켜왔다. 필자 또한 좀비 장르의 팬으로서 잔혹함이 안겨주는 극적 쾌감에 열렬히 환호했던 일인이었다. 하지만 캘슨의 주장을 접하며 어쩌면 영화 속에서 손쉽게 죽음을 소비해왔던 좀비들이 어쩌면 누군가를 지칭한 존재들은 아닐지 잠시 되새겨 보았다.

많은 영화 학자들은 영화 속 좀비들을 시대적 집단들과 연결지으며 또 하나의 상징으로 해석해왔다.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되던 1960~1970년대에는 좀비와 베트남 국민이 연결되었다. 미군에 의해 학살당하는 죄없는 마을 주민들의 이미지가 곧 좀비에게 투영됐다.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던 80년대 이후에는 소비 주체로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집단 군중이 좀비와 연결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멈춰버린 상황에서도 쇼핑몰과 대도심을 가득 메운 채 배회하는 좀비 이미지들은 소비적 욕망으로 비판적 판단을 잃어버린 자본의 대중 그 자체였다. 2000년대로 넘어오며 좀비의 이동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고 2007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빠른 속도로 신자유주의 체제가 확산하며 좀비의 창궐 또한 공중에서 발생할 정도로 국경을 넘나들게 된다. 금융자본의 급속한 확산이 야기하는 체제의 특이점으로 인해 어쩌면 또 다른 위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팽배하던 시기, 좀비는 그 불안의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상징이었다.

▲초췌한 모습의 좀비. ⓒ소니픽쳐스코리아

그렇다면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직후 경제적 위기와 정치의 보수화, 새롭게 도래하는 파시즘적 상황을 목도하는 현 시국에 출연한 <28년 후>의 좀비들은 무엇을 상징할까? 좀비임에도 임신과 출산을 하고 고대 부족을 상기시키며 '알파'라는 리더를 중심으로 집단 행동을 하는 좀비들의 행태는 분명 다시 가족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가족주의의 부활을 통해서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가족주의는 이전 가부장 중심의 가족주의와 어떻게 같거나 다를까? 또는 가족주의가 아닌 다른 가치가 이끄는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질문의 답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 한 가지는 <28년 후>는 현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다양한 상징들로 뒤덮인 흥미로운 장르영화라는 점이다. 영화가 공개된 이후 이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이 작품을 중심으로 펼쳐질 수 있길 희망해본다.

▲<28년 후> 메인포스터. ⓒ소니픽쳐스코리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동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영화 연출, 시나리오, 영상문화이론을 전공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2007), <오이시맨>(2008)의 시나리오를 집필 했으며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춘천SF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 했다. 2019년부터 4년 간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와 함께 ‘한국퀴어영화사’ 연작 시리즈를 책임 편집 했으며 『A Collection of Korean Queer Cinema』(2023)를 집필하여 영문으로 출간했다. 현재 영화 평론, 시나리오, 영화 연출 등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와 창작을 수행 중이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