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항소법원이 전날 1심 법원이 내린 상호관세 무효 결정을 일시 중지함에 따라 관세 징수가 일단 유지되게 됐다. 전날 판결로 상대국들이 무역 협상에 신중해질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백악관 쪽은 빠른 발동이 가능한 무역법 122조 등 다른 법 조항 활용을 시사하며 영향력 축소를 경계했다.
<워싱턴포스트>(WP),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29일 미 연방순회항소법원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날 미 연방국제통상법원이 내린 상호관세 징수 중지 결정을 하루 만에 일시 정지했다. 이에 따라 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 상호관세 징수가 현행대로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항소법원은 "추후 공지가 있을 때까지" 일시 정지 조치가 유지된다고 설명했다.
전날 통상법원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명령을 권한 남용으로 판단해 10일 이내 관세 징수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트럼프 정부는 즉시 항소했다.
항소법원 결정에 따라 일단 징수가 유지되는 관세는 비상권한법에 근거한 10% 기본관세 및 유예된 상호관세, 캐나다와 멕시코에 대한 25% 관세, 중국에 대한 30% 관세다. 1심 법원이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철강·알루미늄, 자동차 관세에 대해선 무효 판단을 내리지 않아 이들 관세도 유지된다.
이번 소송에서 원고인 미국 5개 중소기업을 대리한 미 비영리 공익 법률회사 리버티저스티스센터는 1심 판결 일시 중지 결정이 항소심 진행 과정에서의 "절차적 단계일 뿐"이라며 의미 부여를 경계했다. 전날 통상법원은 해당 기업들과 미 12개 주가 제기한 유사한 소송을 병합해 결정을 내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항소법원 결정이 "다행"이라고 환영하며 1심 법원 판결을 공격했다. 그는 통상법원 결정이 "너무 잘못됐고 심하게 정치적"이며 결정 배경에 "트럼프에 대한 증오"가 있을 수 있다고 근거 없이 비난했다. 이어 "연방대법원이 이 끔찍하고 나라는 위협하는 결정을 빠르고 단호하게 뒤집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번 사건은 항소법원을 거쳐 결국 보수 우위 대법원에서 결판이 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1심 판결을 내린 통상법원 판사 3인이 "대체 어디서 온 거냐"라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이 중 한 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재임 당시 지명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29일 통상법원 결정이 "대통령 권한 찬탈을 위한 사법권 남용"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또 다른 연방법원도 트럼프 관세 관련 전날 통상법원과 유사한 판결을 내렸다. 미 의회전문매체 <더힐> 등에 따르면 29일 미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은 비상권한법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방적 관세 부과 권한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일리노이주 소재 장난감 회사 2곳에만 적용된다.
통상법원 결정은 상호관세 유예 마감 시한인 7월8일까지 90개국과의 무역 협상을 공언한 트럼프 정부 일정에 차질을 가져올 수 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고문 윌리엄 라인쉬는 "극도로 단기적으론 판결이 확실히 협상을 탈선시킬 것"이라며 "불법으로 판결된 위협을 피하기 위해 긱국이 왜 협상을 하겠나"라고 전망했다.
<워싱턴포스트>도 유럽의회 국제무역위원장인 베른트 랑게가 "일부 관세가 미국 내부 법률 체계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볼 때 우린 이제 약간 나은 입지를 갖게 됐다"고 평가했다며 무역 상대국들이 협상 긴박감을 덜 느낄 수 있다고 분석했다.
'150일 한정' 122조 일단 적용 뒤 232조·301조 활용 가능성…338조도 존재
트럼프 정부는 다른 수단을 통한 관세 부과를 시사하며 협상 영향력 유지에 나섰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 고문은 29일 취재진에 "여러분은 만일 우리가 (법정에서) 패하더라도 (관세 부과를 위한) 다른 수단을 취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바로는 이날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여러 다른 선택지가 있다"며 "122조, 301조, 232조, 338조" 등 구체적 무역법 조항을 언급하기도 했다.
미국 1974년 무역법 122조 발동은 트럼프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신속한 관세 부과 수단이 될 수 있다. 이 조항은 "크고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 해소를 위해 대통령이 150일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15% 이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다. 기간 연장을 위해선 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기한이 정해져 있지만 별도의 공식 조사를 요구하지 않아 빠른 발동이 가능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트럼프 정부가 122조 활용을 "임시방편"으로 고려 중이라고 보도했다. 일단 이 조항을 통해 150일 시간을 벌고 그 기간 동안 다른 조항을 통한 관세 부과를 준비한다는 것이다.
나바로는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이런 전략을 시사하는 듯 했다. 그는 왜 처음부터 122조를 사용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고 이 조항이 관세 부과 시한을 "150일만 허용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122조가 232조나 1974년 무역법 301조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나바로는 "그런 종류의 생각"이 고려되고 있다고 답했다.
국가 안보를 손상할 위협이 있는 수입품에 대해 상무부 조사 거친 뒤 대통령의 수입 제한 조치를 허용하는 232조는 이미 철강, 자동차 관세에 적용 중이고 이 법에 근거한 반도체 및 의약품 관세 조사도 진행 중이다. 301조는 불공정한 해외 무역 관행에 대한 행정부의 무역 제재 부과를 허용하며 트럼프 대통령 첫 임기에 중국 관세 부과 근거로 사용됐다.
1930년 무역법 338조는 대통령이 미국 상거래에 차별을 가하는 국가들에 최대 5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다. <로이터> 통신은 이 법이 발동된 적 없으며 1940년대 이후 공공 기록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로이터>는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관련 다른 법 조항이 있음에도 비상권한법 활용을 택한 것은 이 법이 장기간 무역 조사와 대중 여론 수렴을 피해 취임 몇 주 안에 "신속하고 광범위한" 관세 부과를 실현하려 했던 그의 "욕구"에 부합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통신은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무역 고문을 지낸 켈리 앤 쇼가 트럼프 대통령이 소송 결과와 관계 없이 "관세 전략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고 전했다. 그는 "행정부에 (관세) 조치 정당화에 활용할 다른 권한이 많다고 생각한다"며 "똑같진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관세가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이 가장 안전하다"고 분석했다.
지난달 상호관세 발표 뒤 극심한 혼돈을 겪었던 미국 증시는 1심 법원이 상호관세 집행을 정지하고 하루 만에 항소법원이 이를 일시적으로 되돌린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29일 뉴욕증시 스탠다드앤푸어스(S&P500)지수는 0.4%,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는 0.28%, 기술주 중심 나스닥지수는 0.39% 상승했다.
<로이터>는 시장이 트럼프 대통령이 높은 관세를 발표하고 곧 연기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분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관련해 TACO(Trump Always Chickens Out·트럼프는 항상 겁을 먹고 물러난다)라는 용어를 만들기까지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8일 취재진으로부터 이 용어에 대한 질문을 받고 중국에 대한 관세 인하 등의 과정은 "협상"이라고 설명하고 "불쾌한 질문"이라며 "다시는 그 질문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상호관세 징수 일시 부활 뒤 아시아 증시는 전날 상승분을 일부 되돌렸다. 30일 한국 코스피지수는 0.84%, 일본 니케이225지수는 1.22%,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0.47%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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