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2025년이니까요!

[인권의 바람] 공약을 보면 보인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이 누구인지

여성 후보가 적었던 6회 지방선거 시기였다. 이제 막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친구의 딸이 공주 그림을 그려달라 재촉하기에 나는 열 장이 넘도록 공주를 그렸다. 지쳐가던 와중에 친구 집 소파 위에 놓여 있던 후보자 안내 뭉치를 발견했다. 후보자들을 예쁘게 꾸며주자고 제안하자 내가 지친 걸 눈치챈 아이는 혼자 후보로 나온 60~70대 할아버지들에게 귀걸이 목걸이를 그려줬다. 한참을 그리던 아이는 갑자기 색연필을 내던지며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 왜 여자는 없어?"

아이가 '후보자 안내문과 선전물들만 봐도 한국사회 정치에 성평등이 요원한 것 같습니다'라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아동발달학은 대개 그 또래 어린이들이 다양한 의미로 이성보다 동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보다 수십 년은 더 한국사회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순간 할 말을 잃었었다.

7년이 지난 지금, 2025년에 치러지는 제21대 대통령 선거에도 달라진 것이 없어 참담하다. 나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광장혁명 이후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어떻게 여성 후보 한 명이 없습니까"라고.

▲제21대 대선 후보 명단ⓒ네이버

기계적 평등조차도 없는 선거

나는 평소 정치 관련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친구에게 "어떻게 이번 대선에 시스젠더 남성 외에 다른 성별의 후보가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렇게 따지면, 성소수자 후보도 없고 장애인 후보도 없잖아"라고 답했다. 바로 그것이다. 숱한 광장의 시민 발언으로 이번 대선을 이끌어 주권자들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정치권에 '다양성과 성평등'을 명령했음을 확인했는데, 왜 지정 성별과 정체화하는 성별이 남성, 그것도 비장애인 남성만 대선후보인가.

광장을 주도했던 여성청년들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고 다양성과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광장에서는 퀴어, 장애인, 청년, 이주민, 여성 등 소수자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발언을 시작하는 소위 '광장식 자기소개'가 유행이기도 했다. 이렇게 뚜렷한 광장의 맥락을 한국 정치권은 외면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번 대통령 선거의 풍경이 이렇게 될 수는 없다.

나는 페미니스트이자 인권단체 활동가로서 다양한 활동과 투쟁현장을 다니며 '기계적 성평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주 말한다. 사회적 맥락, 공동체적 상상력을 삭제한 기계적 성평등은 차별의 기제가 될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단 하나의 성별이 후보를 잠식해버린 이번 선거를 보니 한국사회의 정치권이 기계적 성평등의 구색이라도 맞췄다면 여성과 소수자 주권자들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눈치'는 보고 있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5년,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는 당시 장관에 남녀 동수를 적용하고 장애인과 난민, 청년을 기용했다. 이렇게 다양성이 있는 내각을 구성한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트뤼도 총리가 약간은 어리둥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Because it’s 2015!(지금은 2015년이니까요!)"라고 간명하게 대답했던 것이 떠올라 심란하다. 명실상부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한국사회의 인권활동가로서 겨우 이런 수준의 문제인식으로 고민해야 하는가.

왜 남성으로 뒤덮인 이번 대선이 후퇴적인 한국 정치의 단면이냐고 묻는다면, 똑같이 답해주고 싶다. "지금은 2025년이니까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16일 전북 익산시 익산역 동부광장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약을 보면 보인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이 누구인지

어느 나라나 정당 간의 경쟁은 존재한다. 거대 양당이 주도하는 한국 정치는 시의성 있는 정책과 공약으로 의미 있는 정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진영의 약점을 잡아 헐뜯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거대 양당의 이런 행태는 시민들에게 정치 혐오를 부추긴다. 그 결과 정치를 외면하게 하고, 이는 다시 거대 양당만을 공고하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상대편에 더 많은 비난이 가게 하는 것이 유능한 정치인의 소양이 된 듯한 한국사회 제도권 정치이지만, 그렇다고 실망만 할 수는 없다. 더 평등하고 진보된 사회를 위해 정치가 반드시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장이 만들어낸 선거에 존재하는 반성평등, 반인권적 지점을 명백하게 짚어내야 한다. 더 많은 관심과 의견이 쏟아져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홈페이지에는 주요 정책공약을 24가지로 추려 각 영역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K-AI, 반도체, 불교문화 전승 영역까지 있으나 성평등 영역은 없다. 이는 정책공약 부분에 '여성' 분야가 있었던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공약보다 더 후퇴한 내용이다.

청년 여성들을 따라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왔던 민주당 정치인들이 많았다. 이재명도 마찬가지였다. 대선 공약을 보니 그때 그 행동에는 어떤 공감과 진정성이 있었는지 묻게 된다.

'반도체특별법 조기 제정' 약속도 문제다. 이재명이 주요 정책으로 삼은 '반도체'는 오로지 친기업, 친자본적인 정책일 뿐이다. 반도체 산업은 수많은 노동자의 생명을 앗아간 경우가 많아 노동자의 건강권을 침해한 기업에 제재 방안이 필요하다.

이재명 후보가 김문수 후보에 비해 노동 공약이 많다고 보도되지만, 한국사회 불평등의 핵심 고리인 비정규직법 철폐는 없다. 20대 대선후보 시절 내놓았던 비정규직 차별 철폐조차 없는 것은 그의 보수선언이 노동자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는 뜻임을 확인해준다. '노동자' 영역 페이지에 적혀 있는 '일하는 사람 모두가 주인공인 나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무색할 따름이다.

내란 범죄자를 배출한 정당인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경우 여성, 장애인, 노동자 등 소수자 관련 정책은 전무한 수준이다. 여성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책은 여성의 군복무를 가능하게 하는 '여성희망복무제'와 출산과 육아에 관한 지원뿐이다. 여기에 더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인구청년가족부'를 제정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런 정책은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과 거리가 멀다. 여성의 삶을 이성애 중심 결혼, 출산, 육아에 국한하는 수준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나 노동기준법 제정과 5인 미만 사업장 법 적용과 같이 여성, 소수자, 노동자에게 실효성이 있는 법과 제도를 내세운 후보는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각 정당의 대선 공약을 보는 내내 이 노래의 구절이 떠올랐다.

"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에 너와 나는 간 데 없고, 저들의 계획 속에 너와 나의 미래는 없지"

이번 21대 대통령 선거는 광장이 요구한 사회대개혁의 분기점이다. 선거에 임하는 거대 양당의 정책을 보면 대의제 민주주의가 뭔지, 주권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절망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은, 민중들은 공동체의 주권자이기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싸워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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